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56
56화
―스슥! 스슥!
반대편에서 들리는 생명체의 움직임에 습관적으로 몸을 낮췄다.
상대도 견제하는지 움직임이 눈에 띄게 작아졌다.
―사삭! 삭!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움직임으로 보아 작은 생명체는 아닌 듯한데… 수도권의 산에 들짐승이라면 멧돼지나 고라니! 아님 사람인가?’
일단 상대가 어떤 생명체인지 모르니 대비를 해야 했다.
최대한 작은 몸짓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목검을 대신할 만한 게 없는지 살피기 위함이었다.
중턱을 지났을 때부터 마치 알몸을 드러내듯 조금씩 암석의 본모습을 드러내던 주금산.
그런 곳에 목검을 대신할 만한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그 흔한 나뭇가지 하나 보이지 않다니…….’
불안감이 엄습하며 조바심이 생겼다. 서둘러 대적할 수 있는 무기로 쓸 만한 것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허둥대고 있을 때였다. 꺼져 가던 촛불이 다시 살아나듯 문득 무엇인가 떠올랐다.
‘그렇지!’
용하가 떠올린 건 다름 아닌 등산스틱이었다.
‘그래! 트레킹폴을 잘만 사용하면 쓸 만한 무기가 될 수도 있어. 얼핏 수수깡처럼 약해 보이지만 신소재를 사용해 가벼우면서도 강도가 높잖아!’
목검을 대신하긴 좀 그렇고, 죽도 대신 쓰기엔 제격이었다.
바로 백팩에서 등산스틱을 꺼냈다.
그런데 막상 등산스틱을 요리조리 살펴보니, 죽도처럼 무기로 사용하기엔 너무 약해 보였다.
‘스읏! 이걸로는 좀 어렵겠는걸. 상대가 사람이라면 급소 공격만으로도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겠지만, 만약 들짐승이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이런 깊은 산중에서 들짐승을 상대로 사투를 벌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머리칼이 다 쭈뼛해졌다.
‘아무튼 21세기는 도움이 안 된다니까. 막말로 21세기가 내게 해준 게 뭐가 있어. 그럼 이럴 땐 좀 도와줘야 하는 거 아냐?’
어쩌면 코드가 이렇게 안 맞는지. 갑자기 가슴이 먹먹했다.
‘그래. 이 없으면 잇몸이다.’
등산스틱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반대편에서 순식간에 10여 미터를 이동하는 기척이 들렸다.
정말이지 눈 깜짝하는 새 벌어진 일이다.
이 정도 속도라면 적어도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거 영 재수 없게 걸렸군.’
등산스틱을 접어 다시 백팩에 넣었다. 그리고 등산용 폴딩 나이프를 꺼냈다.
폴딩 나이프를 펴서 영화에서 본 근접 전투 장면을 떠올리며 몇 차례 허공을 향해 휘둘러보았다.
‘음, 쓸만하군…….’
초등학교 때 처음 죽도를 잡은 이후, 지금처럼 이렇게 짧은 검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워낙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 연필조차 깎아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검(劍)이 근접 무기라는 데 토를 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연마해 온 검에 비하면 턱없이 짧아, 더 가까이 접근해야 유효 살상 범위 내에서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앞섰다.
‘달라진 게 없어. 무림의 세계에서 그 고생을 했으면서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니…….’
이만한 일로 두려움을 느끼다니, 스스로 자괴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지레 겁먹었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해 잔뜩 위축됐다고 하는 게 솔직한 대답이다.
다시 한번 영화 속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며 몇 가지 예비 동작을 따라 해 보았다. 아주 느린 동작이었다.
몇 차례 반복하자 제법 자세가 영화 속 장면처럼 멋지게 잡혀 갔다. 그렇게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허공을 향해 휘두르는 폴딩 나이프의 궤적이 훨씬 크고 과감해졌다.
―휙! 휙! 휙!
―휙! 휙! 휙! 휘익!
마지막 동작으로 폴딩 나이프를 눈앞에 가로로 긋는 자세를 취했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미간을 좁혔다.
바로 그때였다.
―피슝~
―푸드드득!
전광석화처럼 무엇인가 급습해 들어왔다. 온몸이 얼음장이 되어 꼼짝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 근접 전투 태세를 갖췄다.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상대 또한 근접 전투를 위한 초식을 취했다.
‘저자의 초식은 영춘권이 아닌가?’
상대가 취한 영춘권 자세를 보자 본능적으로 그의 얼굴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리고 곧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형님!”
설마 했는데 진짜 인공이었다. 그가 처연하게 미소를 지으며 눈앞에 서 있었다.
“자네는 창의부흥원 원장 김용하가 아닌가?”
“네, 형님. 저 변두리 검도 체육관 관장 용하입니다.”
“하, 세상에 이런 인연이…….”
그 역시 감동하는 기색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무림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는데, 정작 21세기로 돌아와서는 각자 다른 곳에 떨어져 인연이 여기까지였나 보다 했는데 말입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어디 한번 안아보자꾸나.”
인공은 두 팔을 벌려 말했다. 마음 같으면 한달음에 달려가 그의 품에 안기고도 싶었지만, 그의 입 냄새가 느껴져 망설여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반가움이 더 커서인지 한달음에 달려가 인공을 얼싸안았다.
“형님!”
“용하야!”
* * *
인공을 따라 걷는 이 길은 조금 전까지 걸어온 등산로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고색창연하고 험한 길이었다.
의아했다. 혹시 뭔가에 홀려 헛것을 보고 따라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왜 잘 만들어 놓은 등산로를 두고 이렇게 숲이 우거진 길로 가는 걸까?’
약간의 의심과 약간의 불만이 함께 뒤섞였다. 바로 그때였다.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냐?”
용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습관적으로 구시렁거렸다. 물론 속으로만. 만약 인공의 귀에 들린다면 매를 버는 것임이 틀림없다.
‘하여튼 귀신이라니까.’
그 순간 [장.인.왕.]이란 말이 떠올랐다. 장설만 없으면 인공이 왕이다.
“뭐 하나 여쭤봐도 돼요?”
“말해 보거라.”
“왜 등산로로 안 다니고 이렇게 험한 길로 다니세요?”
“왜 그럴 것 같으냐?”
“제가 먼저 물었잖아요.”
저도 모르게 떼를 쓰고 말았다. 인공은 용하가 하는 짓이 귀엽기라도 하다는 듯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이 길을 걷는다는 건, 곧 수련이니라.”
“수련이라고요?”
“그렇다. 이 숲을 걸으면 수없이 많은 나뭇가지와 풀잎들이 앞길을 막는다. 예전에는 그걸 그냥 치고 지나가 살갗이 갈라지기 일쑤였다.”
인공의 말을 듣고 보니 아까부터 수도 없이 나뭇가지와 풀잎들이 얼굴을 할퀴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은 보거라. 어디 한 군데 작은 스침조차도 찾아볼 수 없지 않으냐?”
인공은 자랑이라도 하듯 얼굴을 들이댔다. 빈말은 아니었다. 정말 인공의 얼굴에서 나뭇가지는커녕 나뭇잎에 쓸린 자국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깊은 뜻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이제 알겠느냐? 알았으면 이제 대답해 보거라.”
“네?”
“그새 잊은 것이냐?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는지 묻지 않았느냐.”
“아아, 그거요? 별거 아니었습니다. 혹, 형님이 요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내심 불안했습니다.”
“요물? 왜 그리 생각하였느냐?”
“무림에서 생긴 습관이죠. 끝없이 의심하고 경계하고 조심했던…….”
“내가 가르치긴 제대로 가르쳤나 보구나.”
“제대로 가르쳤다기보다는 제대로 배운 거죠. 홋.”
그러는 사이 어느덧 정상이 눈앞에 보였다.
“형님, 인공사는 어디 있습니까?”
“보채지 말거라. 거의 다 왔으니.”
“보채긴요? 아무 생각 없이 형님 뒤만 따라오다 보니, 다음에 또 올 일이 있어도 못 찾아올 것 같아, 하는 소리입니다.”
“정상을 지났으니 조금만 내려가면 바로 인공사가 보일 것이다. 다시 말해 다음에 찾아올 때는 등산로를 따라 정상까지 올라온 후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인공사가 보일 것이다.”
“그럼 오늘처럼 숲으로 올라가도 정상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되는 겁니까?”
“이 길로 올라가면 북쪽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외워 둬야 하겠는데요. 등산로는 남쪽, 숲길은 북쪽!”
이제 막 주금산의 정상을 지났다. 인공의 말대로 북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인공사가 보였다. 그런데 생각했던 사찰이라기보다 그냥 작은 산장이었다.
그런데 사실 산장이란 말도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말해 작은 움막이란 말이 더 어울렸다.
한편 중간에서 인공을 우연히라도 만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왔으면 절대 찾을 수 없었을 거야. 누가 이런 움막을 사찰이라고 생각하겠어.’
머릿속에서는 이런 생각을 했지만 절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원래 남의 집에 올 때는 선물을 사 들고 오는 게 동방예의지국에서 지켜야 할 도리 아닌가.
그런데 빈손으로 오는 객 주제에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다 왔네. 들어가서 차라도 들면서 그동안 못 한 이야기나 나눔세.”
문 앞에 인공사임을 알리는 현판이 보였다. 인공이 먹을 갈아 직접 썼는지 보잘것없었다.
인공이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고, 그 뒤를 썩 내키지 않은 걸음으로 따라 들어갔다. 웬일인지 습하고 퀴퀴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막상 안으로 들어가니 시원하고 쾌적한 느낌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어둡다는 생각이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형님, 대낮인데도 꽤 어둡네요.”
“왜, 어두운 게 싫은 것이냐?”
“그럼요. 이렇게 어두워서야 활력이 생기겠습니까?”
그때였다. 옅은 인기척이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안과 밖의 밝기가 너무 뚜렷해, 문 앞에 서 있는 의문이 생명체가 역광으로 보였다.
“아, 자네 왔는가? 그래, 요기가 될 만한 건 좀 구했는가?”
“오늘은 버섯을 좀 구했으니 어제 먹고 남은 나물과 함께 먹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소곳한 여인의 목소리였다.
‘땡추라더니 진짜였네. 이런 으슥한 곳에서 여자까지 끼고 살았던 거야?’
눈앞에 보이는 상황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형수님. 인공 형님의 의형제, 김용하라고 합니다.”
속으로는 비난을 퍼부으며 겉으로는 안 그런 척 능청을 떨었다.
나름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예를 갖추었는데, 인공이 버럭 역정을 냈다.
“터진 입이라고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다시 인사 올리거라. 이 사람은 인공사의 안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는 보살이니라.”
인공의 말에 풋! 웃음이 새 나올 뻔했지만 겨우 참았다.
안살림을 책임진다고? 그 말인즉, 저 여인은 부처의 시중을 드는 게 아닌, 인공의 시중을 드는 부엌데기란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을 저렇게 거창하게 하다니, 역시 인공다웠다.
언제부터인지 인공의 궤변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남들은 어떻게 들을지 몰라도 적어도 용하는 아무렇지 않게 인공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아, 보살님! 죄송합니다. 제가 초면에…….”
그 순간 머리칼이 쭈뼛해지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남채화 어른…….”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은 다름 아닌 남채화였다.
곧 온몸에 돋았던 소름은 온데간데없고, 언제 그랬냐는 듯 반가움이 앞섰다.
그러니까,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무림에서 두 사람을 개방으로 안내했던 첫 번째 남채화였다.
개방을 알리는 경계석 앞에서 아미파의 협객이 휘두른 칼에 맞고 비명횡사한 바로 그 남채화.
그녀를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고맙다는 인사도 못 하고 그렇게 보낸 게 못내 안타까웠는데 말이다.
용하가 뜬금없이 알은체를 하자 여인은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저 표정은 나를 못 알아보는 눈치다.’
조금은 서운했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인공에게 도움을 청하는 뜻에서 그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형님, 왜! 기억 안 나세요? 그때 그 경계석 앞에서…….”
그런데 인공의 눈에 웬일인지 핏발이 서 있었다. 공포감이 느껴질 만큼 강렬한 눈빛이었다. 그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아, 이게 아닌데……. 이건 절대 입에 담아서는 안 될 천기누설인데…….’
어제 있었던 일들이, 그러니까 미숙이를 만났던 순간이 불현듯 스쳤다.
미숙이를 보는 순간 연회장 하녀가 떠올라 자칫 알은체를 할 뻔했다.
다행히 병원장 덕분에 위험했던 순간을 모면하긴 했지만.
자칫 천기를 누설할 뻔했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