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6
6화
“그대의 지나친 당당함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이며 무엇이란 말이오?”
아미파의 장문인 보현의 목소리는 아득히 먼 메아리가 되어 인공의 귀에 와닿았다.
“어떤 대접을 해도 좋으니, 나를 좀 거둬 주시오.”
인공의 목소리는 이상하다 생각될 만큼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어금니를 깨물어 가며 낸 목소리였다.
보현의 눈에는 거둬 달라는 사람의 목소리치고는 당돌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인공의 처지는 달랐다. 그는 절대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이곳은 적진의 중심이다. 적의 소굴로 너무 깊이 들어왔기 때문에, 금세 들통나고 말지언정 끝까지 당당해야 했다.
다시 말해 인공은, 지금 두 사람이 대등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보현에게 각인시켜야 하기 때문에, 그 작전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거둬 달라!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고 하는 말이시오?”
“아홉 개 정파 가운데 하나인 아미파가 아니오. 그것을 어찌 모르겠소.”
“그럼 내가 누군인지도 아시오?”
“그야 뭐, 나를 독대하는 거로 보아, 아미파의 장문인쯤 되지 않겠소?”
“그 말은 곧, 한 조직을 대표하는 우두머리 정도는 돼야, 그대를 상대할 수 있다는 뜻이오?”
“꼭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지만, 장문인답게 통찰력 하나는 끝내주는구려.”
단 한 번도 굽힘이 없이 대등하게 맞서는 인공을 바라보는 보현은 입술을 꼭꼭 깨물며 생각했다.
‘저자는 대체 무엇을 믿고 저리도 당당한 것인가. 소림도… 화산도… 무당도. 감히 내 앞에서 저리 당당하지는 못했는데.’
그리고 물었다.
“우리 문파가 여인으로만 구성됐다는 사실도 알고 계시오?”
“어디 알다 뿐이겠소. 아미산 금정봉에 있는 복호사(伏虎寺)를 근거지로 하며 방편산을 주로 사용하거나 장법과 연검을 절기로 하지 않소?”
인공의 말에 보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미파의 비급마저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인공에 대한 위기감 때문이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저자를 회유해야 한단 말인가, 처단해야 한단 말인가.’
“진정 그대의 정체는 무엇이오? 혹 염탐꾼이 아니시오?”
보현의 물음에 인공은 고개를 내저으며 의연하게 대답했다.
“염탐꾼이라니, 말씀이 지나치시오. 나 역시 부처를 섬기는 구도자라오.”
“어느 사찰에 몸을 담고 계시오?”
“포천의 주금산에 자리 잡은 인공사에 적을 두고 있소.”
“인공사?”
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척 내리깐 눈으로 무엇인가 생각에 잠겼다. 지금 보현의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는 건, 딱 그거였다.
‘흠, 난생처음 들어 보는 절이군!’
그리고 대뜸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오?”
“인공이라 하오.”
“인공? 그럼 그대가 조금 전, 적을 두고 있다고 말한 그 사찰의 주지란 말이오?”
“뭐, 얼추 그 비슷한 사람이긴 하외다.”
보현은 그제야 상기됐던 얼굴에 혈색을 띠며 호의적인 미소를 지었다.
“뜻하지 않게 결례를 범했습니다. 저는 아미파의 장문인 보현이라 합니다.”
줄곧 경계를 늦추지 않던 보현이 그제야 예를 갖추며 고운 음색으로 인공을 대했다.
“짐작은 하고 있었소이다. 아미파의 장문인 보현보살이라.”
포로가 되겠다는 야무진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아무튼 인공은 그보다 훨씬 쉽게 아미파 근거지로 파고들 수 있었다.
* * *
“지금 이곳엔 공민왕이 볼모로 와 있다오.”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광야를 헤매던 용하는, 노화자라 자처하는 백발의 사내를 만났다.
“네? 방금 뭐라 그러셨습니까? 누가 볼모로 와 있다고요?”
용하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아하니 고려국의 사람 같아서 하는 말인데, 공민왕을 모른단 말이오?”
노화자는 용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어찌나 날카로웠던지, 가슴을 후벼 파는 듯했다. 가슴이 떨리고 식은땀이 흐르며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속내를 감추고 애써 태연한 척 능청을 떨었다.
“어르신도 참, 저 같은 일자무식 평민 나부랭이가 왕의 이름까지 어찌 알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자기 나라 군주의 이름도 모를 수 있단 말이오.”
기도 차지 않았던지 노화자는 혀를 끌끌거렸다. 그 틈을 타 노화자의 눈을 피해 스마트폰을 열어 공민왕에 대한 자료가 없나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공민왕에 대한 자료를 찾았는데, 사료는 아니고 드라마 속에 녹아든 쓸 만한 자료였다.
내용은 이러했다.
공민왕. 1330년에 태어나 1374년에 승하.
개혁군주로 고려 말 원나라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했다.
우달치 최영의 호위를 받았으며 노국 공주를 왕비로 맞았다.
방대한 양의 자료를 읽어 내리는 용하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이 고려 말이라니… 게다가 이곳은 원나라… 그러니까 인공 스님과 나는 7세기를 거슬러 14세기 원나라로 차원 이동한 거였어…….’
용하는 떨리는 속내를 숨기느라 두어 차례 헛기침을 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노화자 곁으로 성큼 다가갔다.
“음,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별것 아닐 수도 있으니 비웃지는 마시고.”
미리 배수진을 쳤지만,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원나라를 먼저 거론해야 할지, 고려를 먼저 거론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어차피 원이나 고려나 둘 중 하나만 파고들면 두 나라의 역사는 관통하게 돼 있다.
고민 끝에 용하는 원나라를 선택했다. 몇 가지 이유를 들자면, 고려인이 자기 나라에 대해 꼬치꼬치 묻는다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할 것이다. 그다음 이유는 운동만 하느라 공부와는 담쌓고 지낸 지 오래라, 고려 시대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괜히 아는 체하다 밑천 떨어지면, 그것 또한 입맛 없어진다.
“저는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평민 나부랭이입니다. 무턱대고 집을 떠나 서역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해가 지는 쪽으로 석 달 열흘을 걸으면 닿을 거라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그래서 여쭙건대 이곳이 서역입니까?”
앗싸! 용하는 속으로 쾌재를 질렀다. 이쯤 말을 돌렸으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역시 천재야, 천재! 이 좋은 머리로 왜 학교 다닐 땐 공부를 더럽게도 못했던 걸까.
“석 달 열흘을 걸은 것이 확실한 게요?”
“네, 오늘이 딱 백 일 되는 날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걸었길래 여기까지밖에 못 오신 게요? 혹, 갈지자(之)로 걸으셨소?”
“왜 그러십니까? 뭐가 잘못되기라도.”
“이곳은 원이라는 나라요. 다시 말해 서역까지 가려면 지금까지 온 만큼을 더 걸어야 한다는 말이오.”
입 모양으로 방금 노화자가 했던 말을 더듬거리는 용하. 사실 반도 못 왔다는 말은 관심 밖이었다. 어차피 거짓말을 한 거니까.
그런데 원이라는 나라! 이 말에는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원나라! 그럼 이곳 사람들이 칭기즈칸의 후예란 말입니까?”
“어허, 말씀 삼가시오!”
노화자의 눈에 핏발이 섰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왜 갑자기 사납게 구는 거지.
“어르신, 제가 무슨 실수라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말 한 마디도 차분하고 자상하게 했던 노화자. 그래서 호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가 무슨 일로 심사가 뒤틀렸는지, 좀처럼 노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내가 분노하는 이유를 고려 사람이 어찌 모른단 말이오? 거리를 떠돌던 자가 내 집에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한다고 생각해 보시오. 기분이 어떨 것 같소? 게다가 원래 주인을 종 부리듯 한다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화자의 말에, 용하는 몇 걸음 물러서며 황급히 스마트폰을 열었다. 잽싸게 파일 아이콘을 터치해 원나라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원나라]
몽골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세운 나라.
1206년 칭기즈칸은 몽골족을 통일해 몽골제국 건설…….
용하는 방대한 양의 자료를 빠르게 눈으로 읽어 내렸다.
아, 몽골에 정복당한 피해자들! 용하는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노화자를 바라보았다. 그를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웠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동병상련의 아픔이 전해졌다. 그리고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고려 공민왕 때면 1300년대! 음, 원나라가 곧 막을 내리겠구나.
용하는 뜻 모를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고, 노화자는 갸웃한 표정으로 용하를 바라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14세기라, 물밀 듯 차오르는 강한 조바심.
서둘러 이 사실을 인공에게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아미산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 * *
한편 아미파의 근거지인 복호사 대웅전 앞에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인공과 보현의 날 선 신경전이 팽팽했다.
“그런데 이를 어쩌면 좋소?”
“또 무엇이 불만입니까?”
“이대로는 너무 싱거워서 받아들이기가……. 왜 있잖소? 사내들 알량한 자존심 말이오.”
“그 알량한 자존심! 어찌하면 지켜드릴 수 있는지 말씀해 보십시오.”
목소리로 보아 한걸음 물러섰던 보현 또한 적잖이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청하건대, 아미파의 장문인 보현과 대결하고 싶소. 대결에서 이기면 당당하게 신세를 질 것이요, 만약 패한다면 머슴으로 부려도 좋소.”
제법 흥미로운 제안이었다. 인공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오랜 세월 말로만 전해 듣던 아미파의 무공을 직접 경험하고 싶어서였다. 베일에 가려진 그들의 절기와 비급.
“그런 제안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보현의 마지막 목소리는 서릿발 같았다. 그녀의 눈짓 한 번에 대웅전 앞 정원의 분위기는 섬찟하게 달라졌다. 전장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이 돌았다.
아미파 장문인 보현은 방편산도 연검도 들지 않았다. 대체 무엇으로 대적하겠다는 말인가. 인공은 호흡을 고르며 이자겸양마의 자세로 보현 앞에 섰다.
얼핏 소극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인공의 자세. 보현은 가늘게 뜬 눈으로 인공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저런 자세로 대체 무엇을 하겠단 말인가.’
영춘권!
아직까지는 무림에 알려진 바 없는 가장 효율적인 남파계열의 근접 무술이다.
바로 그때였다. 인공과 한 차례 대적한 바 있는 여인이 보현에게로 종종걸음쳤다.
“이게 다 무슨 짓이냐? 나, 보현이 지금 다른 문파의 고수와 대적을 하려 하지 않느냐.”
여인은 주저하지 않고 보현의 귀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인! 저자의 무공에서 신기를 보았습니다.”
여인의 속삭임에 보현의 눈이 조금은 커지는 듯했지만, 인공이 알아볼 만큼은 아니었다.
보현의 옅은 고갯짓으로 여인은 빠르게 물러갔다.
보현은 인공을 향해 거리를 좁혔다. 조금 전 물러간 아미파 여인이 귀엣말로 속삭였던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분명 거리를 두지 않으려 들 것입니다. 초식이 좀 단조로워 보였지만, 분명 남파계열의 권법이었습니다…….
‘음, 거리를 두지 않는다는 건, 검이 지나갈 길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계산이겠지. 일단 초식을 좀 지켜봐야겠군.’
잠시 인공을 직시하던 보현은 갑자기 몸을 돌렸다. 보현은 한달음에 전당으로 들어가 방편산을 들고 나왔다. 아마도 맨손으로 대적하려다 생각이 바뀐 모양이다.
‘갑자기 방편산을 들고 나오다니, 만만하게 봤다가 그게 아니라는 판단이라도 섰단 말인가. 차라리 잘된 일이다. 사실 관심사는 방편산이었으니까. 나로선 영광이지 뭐, 홋!’
방편산의 일 초식은 구름을 옮겨 놓을 만큼의 커다란 돌풍을 일으켰다.
‘듣던 대로 그 위세가 천하제일이군.’
인공은 좀처럼 보현과의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거리를 좁힐 수 없다는 건 보현의 공격을 차단할 수 없다는 뜻이고, 그렇게 되면 근접 무술의 주력 공격 수단인 단수나 봉수를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중선 무술, 그러니까 근접 무술인 영춘권의 한계.
아무런 대책 없이 보현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야만 하는 인공은 결국 패하고 말았다. 무술 인생에 오점으로 남을 만큼 참혹하게.
일상으로 돌아온 아미파의 근거지. 그곳의 분위기를 한마디로 말하라면, 어느 정도의 평화와 적당한 나른함이었다.
무림의 필수 항목인 긴장감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