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60
60화
이제 좀 먹고살 만하다.
용하는 흔히 어른들 입에서 안도의 한숨과 함께 새 나오던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비로소 조금은 알 것 같다.
지금까지 살아온 용하의 뒤안길을 돌이켜보면, 벼랑 끝이나 다름없는 삶이었다. 그런 그가, 남 얘기로만 여겼던 이 말이 주는 가슴 벅찬 느낌을 지금이라도 알게 됐다니, 이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이제 좀 살 만하다는 말. 이번 생에는 나와 무관한 말일 거로 생각했는데.’
항상 만만하게 아니, 하찮게 보였던 인공이 오늘따라 우러러 보였다.
“형님!”
가슴이 벅차 한번 불러 봤는데, 인공의 주먹이 정수리를 향해 날아온다.
―쿵!
―번쩍!
“악!”
거의 동시에 벌어진 현상들이다. 잠시 어둠에 갇힌 듯한 공포의 시간이 흘렀다.
“그새 잊은 것이냐? 체육관에선 뭐라 부르라고 했더냐?”
인공의 호된 목소리가 메이리처럼 귓전을 맴돌았다.
그제야 주먹맛이 제대로 느껴졌다. 용하는 고통을 견디느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겨우 인공의 물음에 대답했다.
“죄… 헉! 죄, 죄송합니다……. 헉! 형, 형님…….”
“또, 또, 또! 형님.”
“죄… 허헉! 죄송 헉! 합니다……. 형…….”
“뭐, 형?”
인공은 두 눈을 부릅뜨며 또 한 대 쥐어박을 기세로 주먹을 둘러멨다. 그의 눈매가 어찌나 위협적이던지, 입이 다 쑥 들어갔다.
그가 아무 말도 못 하자, 인공은 속사포처럼 쏘아붙였다.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용하가 한심했기 때문이다.
“너, 내가 말했지! 체육관에선 항상 사범님이라 부르라고! 사내자식이 한 번 약속한 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야 하는 거 아냐? 그게 자신 없으면 떼 버리던가.”
조금 전 얻어맞은 것에 대한 고통 따위 온데간데없었다. 저승사자같이 혹독한 인공의 목소리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넵, 사범님! 명심하겠습니다. 앞으론 형님을 아니, 사범님을 상전으로 모시겠습니다.”
“음, 지금 그 자세 절대 잊지 말도록!”
“그럼요, 제가 감히 어떻게 잊겠습니까. 관장인 제가 사범인 형님을 상전으로 모셔야 한다는 그 기상천외한 말을.”
“비꼬는 거니?”
“아, 그럴 리가요. 제게 깨달음을 주신 어르신의 주옥같은 어록을 감히 제가 비꼬다니요.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깨달음을 줬다! 게다가 뭐? 주옥같은 어록이라고? 나는 왠지 그 말이 더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데 음, 이렇게 들린다는 건 네 녀석 말에는 문제가 없고 순전히 내 귀가 잘못된 거겠지?”
“당연히 형님 귀가 잘못된 거죠. 원래 형님 나이 정도 되면 신체 기능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잖아요. 그나저나 형님, 해장은 어떤 거로 할까요?”
“어허, 이거 왠지 한 방 먹은 기분인데…….”
“형님도 참, 제가 감히 어떻게…….”
“됐고! 근처에 맛집이 어디냐?”
“워낙 변두리라 맛집 같은 건 없고요. 음, 철도 건널목 건너에 노포가 하나 있는데, 그나마 그 집이 좀…….”
“가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느냐.”
* * *
“이보게, 김 관장! 내가 아까부터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생각이라뇨, 무슨 생각을요?”
“수련 시간을 좀 늘렸으면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때?”
“수련 시간을요?”
“그래. 시간을 늘리면 늘어난 시간만큼 수익이 늘어나고, 수익이 늘어난 만큼 우리 생활도 윤택해지지 않을까?”
“단순 검도 수련이면 얼마든지 가능하죠. 그런데 형님도 알다시피 기(氣) 수련이잖아요.”
“검도 수련이나 기 수련이나, 뭐가 달라?”
“다릅니다. 분명 달라요. 기 수련이 끝나고 나면 이 몸이 말해 줍니다.”
“몸이 말을 해? 뭐라고 하는데?”
정말 몰라서 그러는지 일부러 이러는 건지. 설명하려니 한숨만 나왔다.
“아무튼 두 시간이면 합당한 겁니다. 아니, 차고 넘치는 겁니다.”
어떤 울림이 있었는지 인공은 별다른 항변을 하지 않았다.
그럴 리 없는 인공이었다. 그래서 더욱 부연 설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한 타임당 한 시간 수련이었는데, 수강료를 너무 세게 불러 놔서, 두 시간으로 늘린 겁니다.”
“그래서! 그게 불만인 게야? 불만 있으면 말해. 지금이라도 물러 줄 테니까.”
“아앙~ 형님, 저한테 왜 그러세요~ 저 진짜 시간 때우느라 죽을 맛입니다.”
인공에게 이 정도 아양은 얼마든지 부릴 수 있었다. 그의 공적을 생각하면 비굴의 코미디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다.
“내 말은, 타임당 시간 줄이는 건 개의치 않겠다. 다만 하루 한 타임을 네 타임으로 하는 게 어떨까 해서 의견을 묻는 것이다.”
“하루 네 타임!”
귀가 다 쫑긋해졌다. 한 타임당 스물다섯 명씩, 네 타임이면 수련생 수가 백 명이다. 그럼 체육관 월 총 수익이 5,000만 원!
“그래, 네 타임. 우리는 지금 하루 한 타임밖에 수련을 안 하잖아. 나머지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다 좋아요. 그런데 수련생은요?”
“수련생 걱정은 하지 말라니까. 예비 수련생 백 명쯤이야 진작에 줄 세워놨어.”
체육관의 꽃은 수련생이고, 그들은 곧 돈이다. 그러니 인공의 말에 솔깃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수련생 백 명이면, 월 5,000이다.
지금 한 타임 가르치는 데도 통장 잔고가, 월 1,250만 원씩 따박따박 찍혀 행복해 죽겠는데, 그걸 네 배로 불려준단다. 인공을 만나기 전을 생각하면 이건 호강이다.
정말 인공의 말대로 네 타임으로 늘리면… 헉! 가슴이 벅차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절대 그럴 순 없는 노릇이다. 차라리 아예 모르면 죽기 살기로 한번 해 보겠는데, 몸을 쓰는 일이 그렇듯, 기를 쓰는 일은 항상 절제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쉽게 내가진기가 소진돼 제명에 살 수 없다.
그런 사실을 용하는 물론 인공도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무대뽀 인공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지 못하고 의견을 묻는 거네 뭐네, 하며 쭈뼛거리고 있는 것이다.
“네 타임은 무리입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아마도 제가 살아남지 못하고 이렇게 될걸요~”
용하는 양 볼을 쪽 빨아들여 쏙 들어가게 하고 눈동자를 가운데로 모아 인공을 바라보았다.
“아공, 볼살이 쏙 빠지니까 애교가 철철 넘치는 게 보기만 좋은데, 뭐가 문제냐?”
“농담이시죠? 아시는 분이 왜 그러세요. 꼭 늘려야겠으면 하루 최대가 두 타임입니다.”
“두 타임?”
웬일인지 인공은 솔깃해하는 기색이었다. 마치 협상의 목적이 두 타임이었다는 듯.
“대신 한 타임당 삼십 분씩 시간을 줄여야 하니까, 명분은 형님이 만드세요.”
“명분! 무슨 명분?”
“형님! 머리당 월 50만 원 수강료에 하루 두 시간씩 하기로 해놓고, 갑자기 삼십 분을 줄이는데 아무 명분 없이 한다면 누가 그걸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런 건 나중에 해도 돼. 지금 입관하는 수련생들은 다 충성 회원들이라, 내 말이 곧 법이거든.”
“네네, 다 좋습니다. 그래서 형님이 존경스러워요. 하지만 체육관은 유기체입니다. 원칙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죠. 명분 없이 아무렇게나 했다가는 언젠가 고소당하고 말 겁니다.”
21세기,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법치국가! 인공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명분만 있으면 삼십 분씩 줄여서 하루 두 타임으로 할 거야?”
인공은 무엇인가 공고히 하려는 말투로 다시 물었다. 그의 말에 대답하긴 좀 망설여졌지만, 용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충 동의의 뜻을 전했다. 그러자 인공이 말했다.
“알았어. 삼십 분만 기다려. 내가 가서 돈 좀 있는 애들로 한 타임 분량 만들어 올게.”
역시 인공다웠다. 그는 항상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내였다. 그리고 그런 인공의 면면이 꼭 필요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 김용하다.
불현듯 미숙이가 떠올랐다. 아니, 지금 그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건, 정확히 말해 연회장 하녀다. 용하는 오랜만에 그녀가 남긴 수련일지를 펼쳤다.
“제대로 된 수련 도감 하나 없는 지금, 이처럼 훌륭한 서책을 혼자 힘으로 만들었다니.”
사실 한국의 본국검은 정조 때 편찬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이후, 제대로 된 수련 도감 하나 출판된 적 없었다. 그것도 극히 일부분인 24반무예 중 본국검 수련 편뿐이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연회장 하녀의 수련일지를 토대로 현대판 본국 검도 수련 도감을 만들자.”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인공 덕분에 활동비도 충분히 비축돼 있어 바로 실행에 옮겼다. 우선 우리나라에서 좀 규모가 있다 하는 출판사 몇 군데를 선정해 이메일을 보냈다. 그러나 기대감에 비하면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이렇게 관심이 없으니 본국검이 사라질 수밖에.”
그러는 사이 수련생 사냥에 나갔던 인공이 돌아왔다. 그는 약속했던 스물다섯 명의 예비 수련생을 정확히 세팅해서 데리고 왔다. 믿음직한 그들 앞에 가슴이 벅찼다.
그날 밤.
“형님! 뭐 하나 여쭤볼게요.”
“주색잡기가 특기인 땡추한테 여쭙긴 뭘 여쭤?”
비아냥이었다. 아니, 자기 자신을 땡추라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을 향한 원망의 목소리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용하는 막무가내로 물었다. 이것저것 봐주다가는 되는 일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출판사에서 솔깃하게 들을 만한 말이 뭐가 있을까요?”
“출판사? 걔들은 무조건 판매 부수지.”
“판매 부수?!”
“우리가 수련생들 머릿수 계산하듯, 출판사 애들은 오직 판매 부수! 그런데 그건 왜?”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용하는 생각했다. 도대체 이 노인은 정체가 무엇일까? 개방에서는 내 밑이었는데, 21세기에선 처세왕이잖아.
“형님! 형님은 그런 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너, 지금까지 살아온 만큼 앞으로 더 산다고 한번 생각해 봐. 그까짓 것쯤이야.”
“아무리 그래도…….”
“세상은 돌고 돌거든. 가만히 지켜보면 앞으로 뭐가 대세겠구나, 하는 정도는 눈에 보인단 말이야. 마찬가지로 어떤 계획이 세워지면, 이걸 어떻게 해야 계획을 성공시킬까, 하는 게 보인단 얘기지. 세상 돌아가는 거, 그거 별거 없다.”
역시 인공다웠다. 출판이라면 양질의 원고만 생각했는데, 인공은 핵심을 정확히 짚었다.
“그래, 인석아. 적어도 믿고 팔릴 만한 판매 부수를 제시해야 출판사가 덤비지.”
그 순간 출판사에서 피드백 받을 방법이 불현듯 용하의 머릿속에 스쳤다.
“형님! 스무스카에 회원이 몇 명입니까?”
“그건 알아서 뭐 하게?”
“그냥요.”
“그냥? 뭐 대충 이십만 명쯤……!”
이십만이란 숫자를 너무 쉽게 말하는 인공. 반면 용하는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헉! 이, 이십만 명요?”
“그게 작년에 세 본 거라서 지금은 더 늘었을 수도…….”
“그 회원들이 전부 체육관 운영하는 분들인가요?”
“거의 다. 근데 왜?”
“그중에 검도 체육관 운영하시는 분은 얼마나 될까요?”
“아, 그거? 대한민국에 간판 건 체육관은 딱 정해져 있어.”
“정해져 있다니, 그게 무슨……?”
“전체 체육관 중에 70%는 태권도. 그리고 나머지 30% 중에 절반은 검도, 유도, 특공무술. 그리고 나머지 15%는 그 밖에 외국에서 들어온 근접 무술하고 복싱이지.”
“스무스카도 그런가요? 검도 체육관 비중은 얼마나 될까요?”
갑자기 조바심이 생겼다.
“크게 벗어나지 않아. 근데 우리 카페는 검도하고 전통 무술이 좀 많은 편이야.”
인공의 말에 용하는 머릿속에 청량감이 반짝거리며 얼굴이 환하게 펴지는 기분이었다.
“아, 그래요? 대략 얼마나…….”
“이십 만 명 기준으로 대략 팔만 명은 검도 체육관 관장이거나 사범이야.”
“팔만 명요? 그럼 그분들이 가르치는 수련생은 얼마나 될까요?”
“그 사람들, 네임드가 있어서, 다들 밥은 먹고살 만해.”
“네임드?”
“다들 세계 대회에서 메달들 따고, 방송도 좀 타고 해서,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아.”
“그래서 대충 얼마나 되는데요?”
“작게는 몇백 명에서, 많게는 몇천 명씩들 되지! 근데 그건 왜?”
인공의 물음에 대답은 뒷전이고, 용하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대충 삼백 명씩만 잡아도, 체육관 수가 팔만이니까……. 갑자기 숨이 헉! 막혔다. 2,400만 부!
‘인공의 스무스카만 계산한 게 2,400만 부라니! 하지만 이건 최소한이다. 적어도 이만큼은 팔린다는.’
다음 날. 용하는 당당하게 우리나라 출판 업계 1위인 출판사를 찾아갔다.
출판사 사옥으로 들어서는데, 현관부터 오늘의 협상이 만만치 않을 것을 예고했다.
안내데스크를 통과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편집부를 들어서는 순간 냉기가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