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70
70화
건축사라는 사내.
그는 다름 아닌 개방의 장문인이자 소희의 아비인 용두방주였다.
그를 보는 순간 용하의 뇌리에 무림에서 있었던 일이 전광석화처럼 스쳤다. 연회장 하녀를 단칼에 베어 비정함을 드러냈던 용두방주. 과거로 거슬렀던 찰나에 불과한 시간은 곧 현실로 돌아왔다.
용하는 놀란 가슴을 달래며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인공을 불렀다.
“형님!”
두 사람의 눈길이 빠르게 부딪쳤다. 용하의 심상찮은 목소리에 인공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저 반응! 나를 저렇게 본다는 건 아직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용하가 이렇게 판단한 이유는, 조금 전 인공이 입 모양으로 ‘왜?’라고 물어왔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이 사실을 형님에게 알려야 하는데.’
발을 동동 구르며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불현듯 얕은수 하나가 떠올랐다. 가장 흔하면서 감쪽같이 상대를 속일 수 있는 방법.
‘일단 시간을 좀 벌고 최대한 형님에게 알려야 한다.’
그 방법은 다름 아닌 이것이었다.
“저 화장실 좀 잠깐……. 괜히 긴장되네요.”
역시 효과적이었다. 아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대충 둘러댄 용하는 화장실 쪽으로 종종걸음쳤다. 잠시 후.
―징~ 지잉~
인공의 휴대전화에서 옅은 진동이 울렸다.
“큼큼!”
인공은 두어 차례의 헛기침으로 시치미를 떼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보자, 지금 시간이…….”
인공은 시간을 보는 체하며 용하가 보낸 메시지를 열었다.
[형님! 일단 이곳을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건축사라는 자 말입니다. 용두방주입니다.]한눈에 보기에도 최대한 함축적으로 보낸 메시지였다.
메시지를 보는 순간 인공은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건축사 쪽으로 시선을 보낼 뻔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그런 어리석은 행동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었다. 대신 휴대전화의 카메라 모드를 눌러 건축사의 생김새를 면면히 살펴보았다.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것 같은 부리부리한 두 눈… 삶은 달걀 두 개를 올려놓은 듯 불룩한 양 볼… 콧수염처럼 길게 자란 눈썹… 게다가 짙은 구릿빛 피부 색깔까지도 무림에서 보았던 용두방주를 쏙 빼닮은 모습이었다.
바로 그 순간 무림을 떠나오던 날 신물(新物) [바람찬]에 몸을 싣고 하늘로 날아올랐을 때 마지막 광경이 불현듯 떠올랐다. 인공의 다리에 매달려 있던 소희가 에베레스트의 빙벽으로 떨어지자 피를 토할 듯 소리를 지르며 잡아먹을 듯 올려다보던 그 눈빛.
아뿔싸!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어쩐다. 만에 하나 용두방주 아니, 건축사가 우리를 알아보기라도 하는 날엔…….’
극도의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 두려움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인공은 생각지도 않은 행동으로 보는 이를 놀라게 했다. 고개를 휙휙 돌리며 거부감을 느끼듯 잦은 손짓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광경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부동산 업자와 건축사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멀쩡해 보였는데, 틱 장애가 있었나 보군.’
그때였다.
“이거 초면에 죄송하지만, 저도 화장실엘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훌륭한 건축사님을 만나 아름다운 건물을 짓게 될 것으로 생각하니, 괜히 긴장됩니다그려.”
“얼마든지 다녀오십시오. 지금부터는 고객님을 위한 시간입니다. 그렇지요, 건축사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편안하게 다녀오십시오. 저희는 얼마든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인공은 대충 얼버무리고 부랴부랴 길게 이어진 복도를 종종걸음쳤다. 이윽고 화장실 쪽으로 사라졌을 때였다. 기다리고 있던 용하가 인공의 손을 잡으며 은밀하고도 낮은 목소리 불렀다.
“형님!”
얼핏 결연한 듯 보였지만 실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어, 그래. 용케도 방주를 알아봤구나. 다행이야 다행. 그나저나 이제 어쩌면 좋으냐?”
“이대로 달아나 버릴까요?”
“두말하면 잔소리지. 난 지금도 나를 올려다보던 그 눈빛을 생각하면…….”
인공은 하던 말을 멈추고 부르르 떨었다.
“그런데 형님. 형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는 알겠는데, 만약 이대로 도망쳐버린다면 미숙이에게 선물하겠다던 건물은 영원히 물 건너가는 거 아닙니까.”
“그것이 아쉬운 것이냐?”
단호했다. 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고 꾸짖는 듯했다.
“아무런 말도 못 하는 걸 보니 미련이 남는 모양이구나.”
이번에도 용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럼 들어가자꾸나.”
“네에?”
용하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아직은 용두방주가 우리를 못 알아보는 것 같으니 한번 부딪쳐 봐야 할 것 아니겠느냐.”
“그러다 알아보기라도 하면요.”
“지금은 21세기 아니더냐. 설마 무지막지하게 개방에서 하던 그 잔악한 짓을 아무렇게나 할 수 있겠느냐.”
인공의 말이 선뜻 귀에 와닿지 않았다.
“형님은 그자를 잘 모르십니다. 그자의 성격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아무 죄 없는 연회장 하녀가 단말마조차 남기지 못한 채 비명횡사했습니다.”
“우리가 연회장 하녀는 아니지 않느냐. 용하 자네는 긴 세월 검도를, 나는 영춘권을 연마한 무술 고수가 아니더냐. 위급한 상황에 부닥치면 그때 줄행랑을 쳐도 늦지 않을 것 같으니 일단 안으로 들어가 부딪쳐 보자꾸나.”
“…….”
“이보게, 김 관장. 내 말대로 하세. 그래야 후회가 남지 않는 법.”
인공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알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제 걱정하지 말고 서둘러 몸을 피하십시오.”
용하의 목소리 또한 세상 둘도 없이 결연했다.
“우리 서로 믿는 사이 아니냐. 혹시 무슨 일이 생겨도 각자 알아서 잘하겠지.”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굳게 모았다.
이윽고 건축사 사무실로 돌아온 용하와 인공. 아무렇지 않아 보이려고 최대한 애를 썼지만 두 사람의 얼굴 구석구석에서 묻어나는 두려움은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부동산 업자와 건축사의 눈에는 긴장감 때문으로 보였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건물이 지어지고 준공 떨어질 때까지는 가족처럼 함께 가야 할 사인데요.”
웬일인지 말꼬리를 흐리는 건축사. 준공이 떨어질 때까지 가족처럼 함께 가야 할 사이라는 말에 용하와 인공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오싹했다.
건축사의 말에 어정쩡하게 대답하고 그가 안내하는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건축사의 책상 뒤 벽면에 일본도를 연상시키는 장식용 대검이 장식돼 있었다.
딸꾹, 딸꾹!
그것을 먼저 발견한 인공이 자기도 모르게 딸꾹질부터 해 댔다.
딸꾹!
뒤늦게 벽에 걸린 대검을 본 용하 역시 딸꾹질과 함께 얼굴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두 사람의 태도에 건축사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불현듯 리모컨을 들었다. 그의 손이 리모컨 중단쯤에 온도라고 쓰여 있는 왼쪽 화살표 버튼을 몇 차례 눌렀다.
금세 냉기는 온데간데없고 온기가 돌았다. 아니, 정확히 말해 좀 덥다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건축사의 눈에는 센 에어컨 바람 탓에 감기 기운이 돌아 딸꾹질을 하는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희 건축 일 하는 사람들은 매일 뙤약볕 아래서 뜨거운 땀을 흘리며 일하다 보니 습관적으로 사무실 에어컨을 세게 트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저희도 요즘 땅 보러 다니느라 매일 더위에 지쳐 있었는데, 건축사님 사무실에 들어오는 순간 시원한 공기 덕에 청량감을 맛보았습니다.”
결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건축사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아니, 건축사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간담이 다 서늘해졌던 건 사실이니까.
‘건축사라는 자. 우리를 못 알아보는 게 분명하다.’
인공은 물론 용하의 머릿속에 거의 동시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급기야 긴장감이 풀렸다.
잔뜩 조였던 긴장이 한순간에 풀려 버린 탓에 갑자기 더위가 밀려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숨쉬기가 답답할 정도였지만 참아내는 수밖에.
“이번 유치원 사옥 관련해서 건축사님에게 일임했으면 합니다. 다만 제가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건, 대부분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이 도로 쪽으로 마당과 놀이터를 지어 놨던데, 그건 분명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보여주기보다는 원생들 정서 함양을 위해 도로 쪽으로 건물 입구와 전실을 만들고, 도로 이면으로 놀이터와 정원을 꾸몄으면 합니다.”
용하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건축사는 그의 말이 끝났을 때 비로소 입을 뗐다.
“아, 그거 좋은 생각인데요. 아주 창의적입니다. 제 곁에 예비 건축주님 같은 일꾼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건축사의 말에 용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언젠가 들어본 듯한 저 말……. 저 말에 발목이 잡혀 영원히 과거에 파묻힐 뻔하지 않았던가.’
같은 순간 인공은 용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못 느꼈을 용하가 아니었다. 하지만 애써 못 본 척하며 다시 입을 뗐다.
“어차피 드려야 할 말씀이라 생각돼 또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얼마든지 의견을 제시해 주십시오. 건축사인 제게는 예비 건축주님의 의견 제시가 소중한 자료가 됩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
“용적률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습니다만 될 수 있으면 5층 건물을 지어 주십시오. 원래는 4층으로 올리려고 했는데 5층이 좋겠습니다.”
“건축비가 부담되지 않는다면 용적률은 제가 맞춰보겠습니다. 건축사는 건축주님의 요구에 부응하면서도 준공이 날 수 있도록 법적 요건을 갖추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건물의 외관이나 실내디자인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네, 얼마든지요.”
“3층까지는 유치원과 어린이집으로 사용할 겁니다. 그리고 4층과 5층은 어린이 관련 병·의원으로 임대를 놓을 생각입니다.”
“아, 병·의원… 그거 괜찮은 아이디언데요. 이런 말씀 드리기는 좀 뭐하지만, 얘기를 나눌수록 탐나는데요.”
“탐나다니, 뭐가요?”
“건축주님만 아니면 제가 고액 연봉으로 스카우트 제안이라도 드리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당연히 좋은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용하의 귀에는 건축사의 말이 족쇄를 채우겠다는 협박처럼 들렸다.
“그냥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대충 얼버무린 용하는 빨리 건축사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는 해야 할 일도 있고 해서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용하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인공은 얼떨결에 따라 일어섰다.
“건축사님,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동산 업자도 바로 따라 일어섰다.
“중개사님도 벌써 가시게요?”
“부지 관련해서 마무리 지으려면 바쁩니다.”
“아, 그렇겠군요. 볼일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 주십시오.”
* * *
그날 밤.
“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냐?”
“형님도 참, 그걸 저한테 물으십니까?”
“왜 자꾸 네 녀석 눈에 무림에서 만난 사람들이 보이는 거냐고.”
“그러게, 말입니다. 왜 그런 거죠?”
“낸들 알겠느냐.”
“왜 모르는 거죠? 스님은 알고 계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왜 내가 그런 걸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냐?”
“스님은 부처님을 섬기는 불제자 아니십니까? 그러니 불교의 주 교리인 윤회에 대해 알고 계셔야 하는 게 마땅한 일 아닙니까?”
“아, 윤회! 음, 그건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지. 불제자인 우리는 그 말에 대해 믿음을 부여할 뿐, 그것이 실체라고 말할 순 없지 않겠느냐.”
“하긴, 윤회를 눈으로 목격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한숨처럼 새 나오는 용하의 말에 인공은 일침을 놓았다.
“목격한 사람이 없다니?”
“그럼 있다는 말씀입니까?”
“있다마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
“누굽니까? 윤회를 목격했다는 사람.”
“누굴까?”
“뜸 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 보세요. 괜히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려고 들지 마시고.”
“윤회를 목격한 사람은 바로!”
인공은 여전히 뜸을 들였고 용하는 궁금증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직시했다.
“자네와 나!”
“엥?”
용하의 눈에 실망이 가득했다. 하지만 곧 인공의 말을 알아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21세기로 돌아와 미숙이를 보았을 때 왜 진작 몰랐죠?”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런데 형님! 형님과 나는 그들을 알아보는데 그들은 왜 우릴 모르는 거죠?”
“왜, 그게 이상해?”
“이상하잖아요.”
“누가 이상해?”
“무림에서 환생한 사람들이요.”
“그들이 뭐가 이상해. 이상한 건 그들을 알아보는 우리지.”
“네에? 우리가요?”
“왜? 아닌 것 같아? 잘 생각해 봐. 자네와 난 무림으로 차원 이동을 하는 순간부터 이상해진 거야. 아니, 인생이 꼬인 거지.”
“아뇨, 전 형님과 생각이 달라요. 저는 무림으로 차원 이동을 한 덕에 그곳에서 그야말로 세상 사는 방법을 깨달았고, 21세기로 돌아온 지금 더 이상 이곳이 진흙탕처럼 느껴지지 않아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형님과 의형제를 맺을 수 있었던 건 커다란 행운입니다.”
“녀석, 말하는 걸 보니 철이 다 들었구나.”
인공은 흐뭇한 미소로 용하를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천진스러운 인공을 바라보는 용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