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71
71화
“아무튼 우리가 무림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우리를 못 알아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우리도 그들을 못 알아봐야 하는데 그게…….”
더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던지 인공은 씁쓸하게 입을 닫았다.
“형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 과거를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알아보는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에 우리를 보았고 21세기는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입니다. 즉 처음 경험하는 세상이란 얘기죠. 그러니 몰라보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들에게 형님과 저는 그들 생에는 처음 접하는 새로운 사람들이니까요.”
인공의 씁쓸했던 표정이 금세 달라졌다. 한마디로 화사해졌다고나 할까?
“너 정말 많이 진화했구나. 운동하느라 공부하고는 담쌓고 살았다더니.”
“네, 맞습니다. 운동하느라 공부하고는 담쌓고 산 이생망입니다. 그런 제가 먼 과거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후 많은 게 달라졌습니다.”
“많은 게 달라졌다? 그래, 어떻게 달라졌느냐?”
“그게 말이죠, 하는 일마다 거슬리는 거 없이 일사천리로 잘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세상 모든 게 제 편이 된 것처럼요.”
“세상 모든 게 네 녀석 편이 된 것처럼?”
용하는 두말하면 잔소리라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런 용하를 지그시 바라보는 인공. 그의 입가에 무슨 이유인지 씁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런 순간을 세상 짓궂은 용하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그 표정, 그거 뭐예요? 아니란 뜻입니까?”
“그럴 리가 있느냐. 오늘은 왠지 네 녀석이 부럽구나. 음, 그래. 부러워서 그러는 것이다.”
“부러워요……? 제가……?”
“네 녀석 말이 내 귀에는 세상 다 가졌다는 말로 들려서 부러울 따름이야.”
잠시 생각에 잠겼던 용하는 곧 대답했다.
“네, 맞아요. 제 속마음은 바로 그거예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요.”
용하가 우쭐한 기색으로 대답하자, 이번에도 인공은 변함없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왜 자꾸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형님답지 않게 말이야. 내 진짜 속마음쯤 진작에 꿰뚫어 보고 있으면서… 음, 아닌가?’
일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려 말하지 말고 바로 얘기를 해 줘야 할지를.
“그런데 말이야, 김 관장…….”
“형님! 거, 왜 자꾸 이랬다저랬다 하세요?”
“엥! 이랬다저랬다 하나니, 뭘 말이냐?”
“호칭 말입니다. 통일 좀 하시죠!”
“아니, 검도 체육관 관장을 관장이라 부른 게 뭐, 잘못되기라도 했다는 것이냐?”
“그러니까 관장이라는 호칭은 검도 체육관에서만 부르세요. 그리고 그 호칭을 쓸 때는 뒤에 따라오는 서술어도 호칭하고 걸맞게 존댓말로 해주세요. 그게 바로 우리 민족은 물론 한글을 대하는 리스펙입니다.”
“리스펙?”
“아, 눼눼… 리. 스. 펙. 트!”
“리. 스. 펙. 트?”
“리스펙트 몰라요, 리스펙트?”
다그치듯 몰아가는 용하의 물음에 인공은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모른다는 뜻이다.
“무식한 겁니까, 나이 탓입니까? 리스펙트! 존경, 존중, 경의. 즉, 상대를 존경하고 경의를 표한다는 뜻으로, 우리 민족과 한글에 경의를 표하고 존중하자는 말입니다.”
용하의 유창한 설명에 인공은 넋 나간 듯 그를 바라보며 떡 벌어진 입으로 물었다.
“너 정말 운동만 한 놈이 맞느냐?”
“몇 번을 말씀드려야 합니까? 저는 말이죠, 죽도 손에 쥔 이후 공부라고는… 그러니까 기역(ㄱ)은 아는데 히읗(ㅎ)은 모르고, 아(ㅏ)는 아는데 이(ㅣ)는 모르는 놈이라고요.”
“와― 무식하다는 말을 어쩜 그렇게 실감 나게 하니? 그 또한 네 녀석의 재주이니라.”
“아무튼! 앞으로 호칭을 이렇게 통일하자고요.”
“어떻게?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꾸나.”
“체육관에서는 김 관장! 밖에 나오면 김용하, 용하! 그리고 네 녀석이란 호칭은 절대 하지 않기!”
“곧 죽어도 그렇게는 못 하겠다면?”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아니, 부탁입니다. 형님, 제발…….”
“좋다. 그럼 이렇게 하자꾸나. 체육관에선 김 관장, 밖에 나오면 용하야, 그리고 네 녀석이 어리석다고 판단되거나, 바보 같은 짓을 하면 그땐 어김없이 네 녀석이라고 부를 것이다.”
“아, 제발 형님. 네 녀석이란 표현은 삼가시라니까요.”
“네 녀석 소원대로 그리 안 부르겠다고 하지 않느냐. 단, 네 녀석이 어리석은 짓을 했을 땐 어김없이 그 호칭이 나간다는데, 왜 자신이 없는 것이냐?”
용하는 인공의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았다.
‘저 말은… 아, 내가 어리석은 짓만 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네 녀석이란 소리는 듣지 않는다, 뭐 그런 말이었어.’
그러니까 인공은 아까부터 그렇게 안 부르겠다는 말을 돌려서 했고, 용하는 그제야 그것을 깨닫고 해맑은 표정으로 넙죽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형님.”
“어허, 너무 그러지 말거라. 그럼 내가 미안하지 않느냐. 응당 그리 해야 했는데, 나 또한 어리석은 한 인간에 불과하다 보니, 알면서도 깜빡깜빡하는구나.”
그 순간 용하는 속이 다 후련했다. 명치를 꽉 막고 있던 무엇인가 쑥 내려가면서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기라도 한 듯.
“어디 가서 탁배기라도 한잔하고 오늘은 푹 쉬자꾸나.”
“네, 형님.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용하 자네도 체육관에서는 나를 부를 때 반드시 사범님이라고 하게. 그래야 우리 사업도 번창할 게야. 우리 카페 회원 중에 예비 수련생들이 줄을 섰어.”
“네, 알겠습니다. 저도 형님의 스무스(스트리트 무공 스님들) 카페가 수련생을 모집하기엔 최적의 보고라고 생각합니다.”
“보고?”
“네, 보물창고!”
“아아, 보물창고…….”
* * *
다음 날, 오전 수련을 마친 용하는 서둘러 신도시로 향했다.
“형님, 서두르셔야 합니다. 건축비 견적 받고 돌아와서 오후 수련생 맞이하려면요.”
“알았어. 자네가 왜 그런 언급을 하는지 알아. 지난번처럼 바보짓은 하지 말라는 거 아냐.”
“지난번요? 아, 어제 버스에서 내린 거 말이군요. 설마 오늘 또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겠어요? 바보도 아니고.”
“뭐라? 너 그거, 녀석이란 소리 들을 만한 짓을 저지른 거란 걸 알고 있느냐? 이 녀석아!”
“아,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혼이 덜 났나 봅니다.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좋다. 이번 일은 없었던 거로 해 주마.”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새 신도시로 향하는 버스가 들어왔다. 두 사람을 맞이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어제 그 버스 기사였다.
“안녕하시오, 기사 양반.”
“네, 안녕하세요. 어제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가신…….”
버스 기사도 기억하고 있었다. 벌써 3년이란 세월, 변두리와 신도시를 오가는 버스를 운전해 온 그가 인공을 기억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그런 승객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하, 기억하시는군요. 제가 어제 그런 행동을 보인 건 오직 버스 기사에게 잘 보이기 위한 수작이었소.”
“아, 그러십니까? 아무튼 제게는 너무 인상적이었던 건 사실입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 버스 기사의 표정은 왠지 씁쓸해 보였다.
‘나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라고, 왜에?’
버스 기사의 표정을 놓칠 리 없는 인공이었다.
“한번 봐주슈. 실은 신도시로 가는 버스를 처음 탔는데, 이건 걸어가는 게 더 빠를 것 같다고 오판을 한 것뿐이오.”
“아, 예. 압니다, 알고 말고요. 신도시 처음 생겼을 땐 그런 분들이 엄청 많았습니다.”
“나 같은 인간이 많았다고요?”
“그럼요.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 당시 이 지역은 공사 차량과 승용차들이 엉켜서 아예, 꼼짝도 못 했으니까요.”
이것은 우리나라 신도시 개발 초창기, 한꺼번에 높아진 인구밀도 대비 기반 시설 부족으로 흔히 볼 수 있었던 사회현상 가운데 하나였다.
“용하야, 당분간 우리 기동력을 생각해서라도 차를 하나 사는 게 어떻겠느냐?”
“차를요? 형님, 차나 버스나 뭐가 달라요?”
“그럼 오토바이라도.”
“저 오토바이 탈 줄 모르는데요.”
“내가 탈 줄 아니까 오토바이를 하나 사자꾸나.”
“아닙니다. 제가 사찰에서만 산 형님 말을 믿을 것 같습니까? 소달구지를 좀 몰아 봤다면 모를까.”
“그럼 어떡하자고?”
“일단 오늘은 조용히 신도시로 가서 건축사님에게 평당 건축비 견적이나 받아 봅시다. 그런 다음 이동 수단에 대해선 깊이 의논해 보도록 하죠?”
“그러자꾸나.”
그러는 사이 어느새 버스는 신도시 초입을 지나고 있었다. 창밖으로 거래하기로 한 공인중개사 사무실이 흘렀다. 하지만 크게 마음이 가지는 않았다. 지금은 건축비 마련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너 정거장 지났을 때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예술적 감각이 엿보이는 작은 건물이 보였다.
“버스 기사님, 저기 보이는 건물 가려면 어디서 내려야 합니까?”
“저기 가시려고요?”
“네.”
“자리에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세요. 저 건물하고 가장 가까운 정거장에서 말씀드릴게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두어 정거장이 지났을 때였다.
“손님, 이번 정거장에 내리세요.”
“네, 감사합니다.”
이윽고 버스가 멈췄다. 서서히 멈추는 버스 움직임에서 기사의 배려가 느껴졌다.
버스 기사의 말대로 버스에서 내리자 코앞에 건축사 사무실이 보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건축사와 마주 보고 비장하게 앉아 있었다.
“모레쯤이나 오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어쩐 일이십니까?”
“부지는 어차피 지급보증만 받으면 되는 거고, 건축비가 궁금해서 여기부터 왔습니다.”
“아, 제가 그러잖아도 견적을 뽑고 있었습니다. 대충 부지 300평에 놀이터를 만들고 싶다고 하셔서 연면적은 100평으로 잡았습니다.”
“연면적이요?”
용하가 의아해서 물었다.
“아, 연면적이 궁금하셨군요? 연면적이란 실제 건물과 지면이 맞닿는 면적입니다. 그러니까 연면적 100평에 5층 건물을 지으시겠다고 하셨으니까, 건평은 500평이 되는 거죠.”
“아, 그렇군요. 그럼 평당 건축비는 얼마나 나올까요?”
“평당 건축비는 800 잡으시면 됩니다.”
“800이라면 800만 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지요. 그러니까 800에 500평을 곱하니까, 40억이라고 보시면 되겠네요.”
40억! 용하는 빠르게 속으로 부지 대금과 건축비를 셈해 보았다.
‘땅값이 평당 5,000에 300평이니까 150억에, 건축비가 40억이라…….’
마치 짜 맞춘 듯 딱 맞아떨어졌다.
‘그래도 10억이나 남네, 홋.’
갑작스럽게 새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때였다.
“음, 거기에 놀이터 견적은 업체에 의뢰해 따로 뽑아봐야 알겠지만, 대략 10억 정도는 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놀이터!”
그때 잠자코 있던 인공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좋습니다, 좋아요. 그럼 총공사비 50억으로 견적서에 도장 찍읍시다.”
“그렇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우린 총공사비 50억에 건축사님께 일임하는 거니까, 나머지는 건축사님이 알아서 해 주십시오. 준공검사부터 등기까지.”
“그건 염려 마십시오. 신용과 정직 없이 이 신도시에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겠습니까.”
옆에서 듣고 있는 용하는 내심 가슴이 벅찼다. 은행 빚을 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일들이 일사천리로 해결돼서였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놀이터 시설 비용까지 첨부해서 견적서를 뽑겠습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건축사는 컴퓨터 앞에 앉아 부지런히 견적을 뽑았다.
―다다다다다다!!
몹시도 서두르는 기색이 자판 두들기는 소리에서 여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륵, 드륵, 드륵!!
프린터가 돌기 시작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용하에게는 길게만 느껴졌다.
이윽고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가 멈췄을 때였다. 건축사가 견적서 두 장을 들고 용하 앞에 앉았다.
“여기 있습니다. 꼼꼼하게 읽어보시고 서명하시면 됩니다. 놀이터에 대한 부분은 특약란에 명시해 두었으니, 확인하시고요.”
건축사가 내민 견적서의 내용은, 그의 외모와는 달리 꼼꼼하고 치밀했다.
‘음, 더 입을 댈 곳이 없군. 완벽해.’
용하는 거침없이 견적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건축사는 마치 선언이라도 하듯 한마디를 던졌다.
“이렇게 해서 건축주 김용하 님과의 건축 계약이 성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바로 그 순간 용하와 인공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표정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원래 이렇게 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