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78
78화
신도시에 새로 단장한, 이름만 대도 알 만한 유명 백화점.
멀리서 보이는 그 전경만으로도 아무나 섣불리 드나들 곳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보게, 용하. 자꾸 어딜 가는 거야?”
수차례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인공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용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가던 길을 묵묵히 걷고만 있었다.
‘참 이상하네! 이대로 쭉 가면 바로 저 백화점 정문인데.’
인공은 용하의 눈치를 살피느라 두어 차례 핼끔거렸지만, 더는 궁금증을 해소하려 들지 않았다.
정면을 주시한 채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용하의 표정으로 보아, 궁금증을 푼다는 건 에너지 낭비요, 부질없는 짓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용하라는 녀석이 겉보기에는 철없고 단순 무식해 보여도, 간혹 무섭게 고집을 부릴 때가 있었잖아. 그런데 녀석이 고집을 부릴 때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 그렇다면 지금은 무슨 이유로 저렇게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걸까?’
인공의 궁금증은 봇물이라도 터지듯 한꺼번에 증폭했지만, 다 그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조금 전 백화점으로 들어선 용하와 인공.
밖에서 봤던 건 그냥 맛보기였다는 듯 로비 중앙을 밝힌 샹들리에가 보는 사람을 위축시켰다.
로비 중앙에 코끼리 코를 연상시키듯 길게 늘어진 에스컬레이터가 보였다. 용하는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나름의 쇼핑 계획을 세웠다.
‘우선 도복 차림의 인공 형님, 환복부터 시켜드리자. 지금은 다들 백화점의 신비감에 시선이 집중돼 인공 형님이 눈에 들지 않겠지만, 곧 흥미를 잃고 다른 재밋거리를 찾을 게 분명하다. 만약 형님 복장을 저대로 둔다면, 그들의 시선은 곧 형님에게로 집중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형님은 이렇게 많은 속물로부터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용하는 중장년의 평상복으로 어울릴 만한 매장을 찾아 빠르게 눈을 움직였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가 중간쯤을 지나고 있을 무렵, 골프웨어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 찾았다!’
중장년의 나이에 추레하지 않으려면, 골프웨어 정도는 입어 줘야 한다는 생각에 발길이 더욱 빨라졌다. 인공은 영문도 모른 채 용하 뒤를 쫄래쫄래 따라 걸었다. 바로 그때였다. 용하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저기요! 이분에게 어울릴 만한 디자인으로 추천 좀 부탁합니다.”
골프웨어 전문점의 매니저에게 일단 선택권을 일임했다. 매니저는 크게 고민하는 기색 없이 붉은색 티셔츠와 베이지 톤의 체크무늬 팬츠를 권했다.
“형님, 입어보세요.”
“내, 내가 이걸……?”
인공은 자기 때문에 백화점에 왔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사람 같았다.
“고객님, 피팅룸으로 가셔서 갈아입어 보시겠습니까?”
매니저의 권유로 인공은 어리둥절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용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매장을 둘러보며 몇 개의 옷에 눈도장을 찍었다.
‘지금 갈아입는 옷이 형님에게 어울린다면, 비슷한 디자인으로 몇 벌 더 사드려야지.’
아닌 체하면서도 내심 골프웨어로 갈아입은 인공의 몰골이 궁금했던지, 피팅룸 쪽에 잦은 시선이 머물렀다.
그때였다.
―짜잔~
레드카펫의 주인공이 탄 차의 문이 열리듯 피팅룸 도어가 열리며 골프웨어로 환복한 인공이 모습을 내비치었다. 피팅룸이라는 한정 공간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용하는 분명 인공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형님!”
용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었다면 다름 아닌, 인공의 구릿빛 피부였다. 워낙 오랜 세월 깊은 산속의 사찰에 머문 탓에 거칠 대로 거칠어진 살갗.
용하는 빠른 걸음으로 매장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곧 액세서리 매장에서 모자와 선글라스를 주워들었다. 그 광경을 본 매니저는, 그렇지 않아도 권하려던 참이었는데, 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용하가 권해주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쓴 인공의 외모는, 이제 막 화룡점정을 찍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형님!”
순간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감동이라기보다는 저렇게 좋아하는데, 왜 그동안 해주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별것도 아닌걸.
‘저렇게 좋아하는데.’
피팅룸에서 나온 인공은 어린아이가 명절에 때때옷을 입은 것처럼 천진스러운 모습이었다. 누구를 찾는지 매장을 두리번거리던 해맑은 표정의 인공이 용하와 눈이 마주쳤을 때였다.
용하는 인공을 향해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 엄지를 들어 그를 응원했다. 엄지척!
“어머나~ 오빠 몰라~ 나 처음에 깜짝 놀랐잖아. 이렇게 멋진 분이 왜 저런 누더기를 걸치고 다니나 했더니. 흥!”
골프샵 매니저의 호들갑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곧 용하와 인공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매니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뽜, 우리 사진 한 장~”
매니저는 거침없이 인공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스마트폰을 카메라 모드로 돌려 들이댔다.
―찰칵! 찰칵!
셔터를 누를 때마다 얼짱 각도와 브이를 그려 보이는 인공은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형님, 적당히 하시죠? 스님이 그게 뭡니까? 채신머리없이.”
“그런 소리 말거라. 내가 어디 그냥 스님이더냐?”
“그냥 스님이 아니면요?”
“다 알면서 새삼스럽게 왜 그러는 것이냐? ‘최강땡추인공’하면,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셀럽 아니냐, 셀럽!”
“아 눼, 운동만 해서 무식한 제가 셀럽을 몰라봤네요.”
“빈정거리는 것이냐?”
인공이 정색하자 용하는 얼른 둘러댔다.
“형님, 그게 아니고 질투가 나서 그랬습니다.”
“질투?”
“네, 너무 잘 어울려요. 형님 말씀대로 누가 봐도 셀럽입니다. 셀럽.”
정색했던 인공의 입가에 불현듯 미소가 번졌다.
“형님, 오늘도 기대가 큽니다.”
“기대! 무슨 기대?”
“은행 업무 말입니다. 제가 나름 준비는 했는데, 혹시 부족한 구석이 있는 건 아닐까, 우려돼서요.”
“그 문제라면 염려 말거라. 나 또한 나름 준비한 게 있으니.”
“감사합니다. 역시 형님은 형님이십니다.”
“형님은 형님이라니, 그런 말이 어디 있느냐?”
“세상에 그런 말은 당연히 없습니다. 형님은 형님이십니다. 이 말은 오직 저만 쓸 수 있는 형님을 존경하는 제 마음이 담긴 말입니다.”
용하의 입에서 구구절절 새 나오는 훈훈한 말에 인공은 흐뭇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녀석이 대체 뭘 기대하고 저러는 걸까? 이깟 옷 몇 벌 사주고 대체 얼마나 봉을 뽑으려고 마음에도 없는 말까지.’
인공의 속내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용하는 정장 두어 벌과 신사화 두어 켤레 그리고 머스크향이 짙은 남성 화장품 세트를 구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금 전 백화점을 나온 용하와 인공은 은행으로 향하는 보도블록 위를 걷고 있었다.
양손에 들린 쇼핑백이 두 사람의 어깨를 짓눌러 걸음걸이가 점차 흐트러졌다.
“이보게, 용하!”
“네, 형님.”
“이거 이렇게 들고 은행으로 갈 거야?”
사실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인공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가 생겼다.
“글쎄요, 돈 빌리러 가는 놈이 이렇게 명품을 사 들고 간다는 건 좀 아니겠죠?”
“아닐 뿐 아니라, 이걸 들고 은행까지 간다는 것도 전투력을 낭비하는 거야.”
“그럼요, 형님. 어디다 좀 맡기고 가죠.”
“맡기긴 어디다 맡겨? 그랬다가 혹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달리 방법도 없잖아요. 시간이 없어 체육관까지 갔다 오기도 그렇고.”
“이렇게 하자꾸나. 우리 동선을 참작해 은행으로 가는 길에 있는 부동산 사무실에 맡기고, 은행 볼일 보고 버스 정류장으로 오는 길에 찾아서 돌아가는 게 여러모로 효율적이지 않겠느냐.”
“좋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부동산 업자를 믿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오늘 산 이 물건들이 얼마인 줄은 잘 아시죠?”
“그래도 지금으로선 그 방법이 가장 좋은 것 같구나. 그리고 부동산 업자 말이다. 너무 색안경 끼고 보지 않았으면 한다. 그 사람,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
“알겠습니다. 형님이 그리 생각하신다면, 그 말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부동산 사무실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두 사람은, 조금 전보다 훨씬 가벼운 걸음을 내디뎌 예상보다 빨리 은행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약속 시간에 정확히 맞춰 오셨네요.”
“중요하잖아요, 신용사회에서. 약속은 서로를 신뢰하게 만드는 첫걸음이기도 하고요.”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컨설팅 팀장이 지금 상담 중이어서.”
“알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부동산 신탁 팀장과 컨설팅 팀장에게 거는 기대가 컸기에, 그깟 기다리는 것쯤 아무렇지도 않았다.
지점장의 잦은 눈길이 아까부터 인공을 향했다.
“뭘 그렇게 봅니까?”
“아, 죄송합니다. 지난번에 오셨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어서.”
“전혀 다른 모습이라면…….”
“아 네, 말씀드리기 좀 그렇지만 지난번에 비하면 오늘은 회장님 포스입니다.”
“회장님 포스?”
숨기려 했지만 숨길 수 없는 이 감정. 인공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럼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잠시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지점장이 VIP 접견실을 나가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 여직원이 차와 다과를 든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적당할 만큼의 예의와 보기 좋은 미소로 두 사람을 대하는 여직원을 보는 순간, 개방의 용두방주 궁에서 보았던 연회장의 하녀들이 떠올랐다.
돌이켜 보면 그들이 딱 그랬던 것 같다. 무엇이든 지나치지 않고 적당한.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지점장이 다시 모습을 보였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눈 한 번 감았다 뜬 것 같은데요 뭘.”
지점장이 예의상 던진 말에 인공이 너스레를 떨었다.
“어이구, 말씀도 어쩜 이렇게…….”
이번에도 지점장은 구색 같은 말로 예를 갖추고는 문 쪽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들어들 오시게!”
지점장의 지시에 모습을 보이는 두 명의 팀장은 젊고 건장했을 뿐 아니라 훤칠하고 잘생긴 외모를 자랑했다.
‘뭔 은행원이 저렇게 잘생겼담. 외모로 사람 기죽일 작정인가?’
그뿐 아니었다. 예를 갖춰 사람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선남선녀를 매료하기에 충분했다.
비록 협상의 자리는 아니었지만, 마음의 각오는 단단히 하고 왔는데. 그토록 단단히 조였던 마음가짐이 한꺼번에 풀려버리고 말았다.
“고객님, 제가 검토한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용하는 달리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귀 기울여 들을 자세를 취했다.
“우선 페이퍼컴퍼니를 하나 만들 겁니다. 그리고…….”
역시 예상대로였다. 그들은 그동안 해 온 관행처럼 비정상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장학재단을 만들 생각입니다.”
굳게 다문 용하의 입에서 새 나온 말은 무엇보다 확고했다.
“장, 장학재단이요?”
두 명의 팀장은 적잖이 놀라는 기색이었다. 장학재단이라면 멀리 보고 가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두 사람보다 더 놀란 사람은 인공이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보게, 김 관장. 정말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인가?”
“그럼요. 그렇다고 뭐 생각하시는 것처럼 대단한 건 아니고요. 작은 장학재단으로 시작해 볼 생각입니다.”
바로 그때 컨설팅 팀장이 물었다.
“작은 장학재단이라면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우선 앞으로 운영하게 될 유치원과 어린이집 원생들 가운데 도움이 필요한 사람부터 시작해서 차차 늘려나갈 생각입니다.”
“아, 좋은 생각입니다. 그럼 저희는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두 분께서는 말 그대로, 부동산 신탁과 건물 임대차 관리를 도와주시면 되겠습니다.”
“아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 문제라면 고객님의 뜻을 따라 신경 쓰실 일 없도록 잘 처리하겠습니다. 그런데 자금 관리는…….”
“아, 그건 은행에 일임할 생각입니다.”
“저희 은행에다 말씀입니까?”
“물론입니다.”
그제야 두 명의 팀장은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비록 지금은 구두로 간략하게 의사를 표했지만, 이 모든 건 하나하나 법적 절차를 밟아 분명하게 진행해 주십시오. 앞으로도 마찬가지고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외부감사를 통해 한 치의 의구심도 남지 않도록 처리될 겁니다.”
일종의 협약이었다. 지점장은 은행을 대신해 협약서에 서명했다.
저녁이 다 돼서야 은행을 나온 용하와 인공은 서둘러 부동산 사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말이야. 경영에서부터 관리까지, 다 은행에서 해준다 해도 누군가 한 사람은 재단을 대표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면 총무랄까, 뭐 그런.”
“그것도 다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
“아, 그래? 그럼 다행이고.”
인공은 용하가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멀리서 보이는 부동산 사무실에 웬일인지 빛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벌써 문 닫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