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79
79화
“아, 오늘 산 신상 명품들!”
“아, 내 가사와 장삼!”
목청을 쥐어짜는 듯 들려오는 애석한 목소리.
신도시 부동산 사무실 문이 닫힌 걸 보고, 용하와 인공이 거의 동시에 한 말이다.
인공은 용하를 바라보며 울상지었다.
“거봐, 내가 뭐라 그랬어.”
“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동선이 어떻고 하면서, 부동산 사무실에 맡기는 게 좋겠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
“누군데? 그게 대체 누구야? 누구냐고?”
숨 막히게 다그치는 인공. 웬일인지 적잖이 흥분돼 있었다.
“형님! 하루 새 노망이라도 나신 겁니까?”
“뭐, 노, 노망!”
인공의 흥분은 한층 더해만 갔다.
“누가 그랬는지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겁니까?”
“너 방금 노망이라고 했니? 아니, 인석이 터진 입이라고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있네!”
“형님, 진정하시고 잘 생각 좀 해 보세요. 정말 누가 그랬는지.”
분노가 분노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제안을 했던 사람이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달은 인공.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노기가 극에 달했던 그가, 서서히 숨을 고르며 차분하게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러고는 곧 말했다.
“오, 미안하게 됐구나.”
“휴우~”
인공이 진정세를 보이자, 용하는 안도하며 말을 이어갔다.
“다행입니다. 지금이라도 생각해 냈으니.”
“김 관장. 나 며칠만 산에 가서 있었으면 하는데.”
“네에?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그런 말씀을. 안 됩니다.”
단호했다. 아니, 야멸찼다.
“아니, 너는 어떻게 된 놈이 이유도 묻지 않고, 그렇게 매정하게 사람 말을 묵살하려는 것이냐?”
“묵살하지 않으면요. 제가 모를 줄 알아요? 형님 지금, 그렇게 핑계를 대놓고 주금산으로 도망가려는 거잖아요.”
“도망? 아니, 내가 왜? 내가 어디가 꿀려서 도망을 가? 도망을 가길.”
그런데 사실 그러고 싶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갑자기 신도시가 지긋지긋해진 탓이었다. 아니, 어쩌면 시대를 거슬러 살아온 인공에게 현대문명이란 알레르기 같은 것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이보게, 김 관장. 실은 진작 얘기하려고 했던 건데,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것뿐이야.”
“그런데 갑자기 왜 산엘 가겠다는 건데요?”
“사찰을 너무 오래 비워 걱정도 되고 이참에 머리도 좀 식히고…….”
“머리를 식히다니요? 언제 머리 쓸 일 있었어요?”
언제 머리 쓸 일 있었냐고? 그 말이 가슴을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야속하게 들렸다.
“아무튼, 여러모로 좀 다녀왔으면 하니까, 더 이상 말리지 말게.”
인공은 냉정하게 말을 끝냈다.
“형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가사와 장삼 그리고 오늘 쇼핑했던 물건들은 내일 와서 찾아가면 되잖아요.”
“물건을 잃어버려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너도 알지 않으냐? 그런데 어찌하여.”
“그럼 함께 가요. 사실 지금 벌려놓은 일이 너무 많아 그럴 시간이 없지만, 형님이 정 그리하셔야 한다면,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수련생들은 어떻게 하고? 그 사람들 하루라도 빼먹으면 난리가 날 텐데.”
“네, 저도 잘 압니다. 수련생들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래서 만약 형님이 뜻을 굽히지 않는다면 당분간 수련장을 인공사로 옮길 생각입니다.”
“아, 그걸 미리 공지해야지. 갑자기 수련장을 인공사로 바꿔버리면, 그 사람들이 좋아하겠느냐?”
“그 문제는 걱정 안 합니다. 형님이 다 알아서 하실 거잖아요.”
모든 걸 인공에게 미루는 전략. 인공은 그제야 자기가 신경전에 밀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결국 녀석이 이렇게 또 내 발목을 잡는구나. 영악한 것 같으니…….’
인공은 크게 보폭을 벌렸다.
“형님, 천천히 가세요. 그런다고 더 빨리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용하의 보폭도 덩달아 빨라졌다. 두 사람은 마치 경보라도 하듯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갔다.
* * *
다음 날 오전 수련에 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수련생들 가운데 간혹 인공을 찾는 눈길이 이리저리 빗발치고는 했지만, 용하는 별 개의치 않는 기색으로 무덤덤하게 수련을 이끌었다.
“이보시오, 정 관장. 거, 자꾸 두리번거리지 말고 수련에 집중 좀 하셔.”
“이보시오, 주 관장. 사범님이 안 보이는데 걱정되지도 않으시오?”
“나도 처음엔 걱정했는데, 관장님 표정을 좀 보시오.”
“관장님 표정?! 관장님 표정이 뭐가 어떻다는 것이오?”
“얼굴이 편안하잖아요. 근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엿보이지 않아요. 만약 사범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가정해 보세요. 관장님 얼굴이 저리 담담할 수는 없을 것 아니오.”
정 관장의 말에 주 관장은 물론 주변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다른 체육관 관장들도 수긍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시각 인공은, 빠르게 부동산 사무실을 향해 걸음 내디뎠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부동산 사무실 간판이 보였다. 그리고 부동산 사무실 앞에 가지런히 놓인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 부동산 업자가 보였다. 한눈에 봐도 매일 있는 일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인공의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여보시오, 공인중개사 양반!”
목청껏 불러보았지만, 하던 일에만 열중인 부동산 업자. 아마도 듣지 못한 게 분명했다.
“여보시오, 공인중개사 양반!”
인공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한층 커졌다. 어찌나 목에 힘을 줬던지, 쥐어짜고 긁어내는 목소리가 탁하게 새 나왔다. 그제야 부동산 업자는 고개를 돌려 인공을 바라보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표정은 정반대였다. 인공은 세상 둘도 없이 반가운 표정이었고, 부동산 업자는 의아한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저 표정!’
웬일인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동산 업자가 저런 표정을 짓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대체 저 표정 뭐냐고? 저런 표정을 지을 만한 일이…….’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의 거리는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아니, 이렇게 일찍 무슨 일이십니까?”
“어허, 신경이 쓰여서 밤새 잠도 못 이루었습니다.”
부동산 업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어제 좀 중요한 자리가 있어서 좀 늦은 시각에야 이곳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잖아도 문 닫을 시간이 다 되도록 안 오시길래, 얘기가 길어지는가 싶어서, 맡기신 물건은 가게 문 앞에 내놓고 들어갔습니다.”
“네? 가게 문 앞! 무슨 가게 문 앞?”
“아, 우리 사무실이요. 여기, 부동산 사무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부동산 업자. 그를 넋 나간 듯 바라보던 인공의 시선이 어느 순간, 가사와 장삼 그리고 명품 의류가 담긴 쇼핑백이 놓여있었을, 문 앞으로 떨어지듯 옮겨졌다.
‘아뿔싸!’
그 순간 인공의 머릿속에 스치는 건 오직 하나, 분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평생을 함께해 온 내 가사와 장삼…….’
눈물이 핑 고이더니,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인공의 심경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극도의 허탈감이었다. 그리고 곧 전신에서 느껴지는 허탈감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대체 왜 그러십니까?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인공을 부축하며 부동산 업자가 급히 물었다.
“이를 어쩐다! 119라도 불러야 하나?”
안절부절못하는 부동산 업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인공.
“그러실 필요 없소이다. 내 병은 내가 더 잘 알고 있소.”
“혹시, 무슨 지병이라도…….”
“그렇소, 오랜 고질병이라오.”
“아무튼, 119를 부르지 않아도 된다니 다행입니다. 일단 안으로 좀 들어갑시다.”
인공은 부동산 업자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은 인공의 허탈감은 좀처럼 가실 줄을 몰랐다.
그때 인공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휴대전화를 핼끔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에, 누가 전화했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기색이 얼핏 엿보였다.
인공은 조금 전까지 보였던 극도의 허탈감을 감추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시게, 김 관장. 그러잖아도 전화하려던 참이었소.”
인공의 말투에서 미안하다는 기색이 느껴지자, 용하는 목청을 가다듬어 말을 이어갔다.
―아,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었는데요. 음, 그래서 좀 더 기다려 볼까 하다가… 아시잖아요. 제가 성격이 좀 급한 사람이라는 거.
웬일인지 용하는, 띄엄띄엄 넘겨짚어 말했다. 그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인공은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이거 아침부터 미안한데, 비보부터 전해야겠어.”
―비보?! 바보가 아니고 비보, 맞습니까?
“그래, 비보(悲報)! 슬픈 소식, sad news!”
―아, 네. 그… 비보~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인공이 입을 뗐다.
“아, 그게 말이야…….”
―편하게 말씀하세요.
용하는 인공이 딸막거리는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음, 그게 말이야… 훌쩍!”
―그냥 말씀하시라니까요. 형님과 제가 그런 일로 서먹서먹해질 사이는 아니잖습니까?
인공이 훌쩍거리는 이유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너그러운 용하의 말에, 인공은 참고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큭큭, 큭큭큭! 흐흑!
또 한 번의 정적이 흘렀다. 영문을 모르는 부동산 업자의 표정도 불현듯 숙연했다. 이윽고 용하가 말했다.
―형님, 그만 울고 어서 돌아오세요. 오후 수련 준비해야 하잖아요.
휴대전화 속에서 용하의 목소리가 흘렀다.
그리고 한 시간 남짓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검도 체육관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더니 인공이 힘없이 들어왔다.
“형님, 퐈이팅 좀 합시다.”
용하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분위기를 살려보려 했지만, 축 처진 인공의 기분을 끌어올릴 수는 없었다.
“이를 어쩐다. 어떡하면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떨어져 버린 우리 형님 기운을 끌어올릴 수 있을까?”
웬일인지 용하의 말투에 얼핏 장난기가 엿보였다.
“형님!”
새삼스럽게 애교가 느껴지는 용하의 부름에, 인공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눈에 해맑게 미소 짓고 있는 용하의 모습이 가득 들어왔다.
“…….”
그리고 곧 눈물이 앞을 가려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형님!”
용하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 마치 사우나에서 듣는 것처럼 메아리가 되어.
그리고.
용하가 옆으로 한 걸음 옮겼을 때였다. 눈물로 용하를 바라보고 있던 인공의 두 눈이 돌연 휘둥그레졌다. 그런 인공의 시야에 어렴풋이 보이는 무엇인가…….
“용하야… 김 관장… 김용하 관장…….”
대체 무엇을 봤길래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인공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벽에 걸린 도복들 사이에 가지런히 걸린 그것은 다름 아닌, 가사와 장삼이었다.
인공은 떨리는 가슴을 달래며 용하에게 다가갔다.
“이보게, 김 관장… 이게 다 어찌 된 일이오?”
“수련생 중의 하나가, 어제 신도시 부동산 사무실 앞을 지나다가 쇼핑백 몇 개가 놓여있어 이상히 여기고 살펴봤더니, 형님의 가사와 장삼이 들어 있기에 챙겨왔다고 합니다.”
“누가? 대체 누가 그런 예쁜 짓을 했다는 것이오? 말씀해 보시오. 상이라도 주어야겠소.”
“…불광동 체육관 관장님이요.”
“불광동 체육관이면… 아, 오후 수련생 고 관장님!”
“후사는 형님이 알아서 하세요.”
“알았어. 내 취향대로 알아서 할게.”
비로소 인공의 얼굴에 가득했던 근심이 걷혔다.
“형님, 그만 오후 수련 준비 좀 할까요?”
“미안한데, 오후 수련도 김 관장이 좀 해주면 안 될까? 당직이라 생각하고.”
“당직이요? 사범님하고 저하고 달랑 두 명밖에 없는데 당직이라고요?”
“없으란 법 있나? 내일은 내가 당직을 서면 되잖아.”
“음, 좋아요. 어차피 오늘 수련 절반은 저 혼자 했으니까. 나머지도 뭐.”
인공의 제안을 시원스럽게 받아들이는 용하, 그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형님,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예의 결연했다.
‘형님의 지울 수 없는 깊은 근심…….’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야무지게 다짐했다.
‘제가 다 풀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