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86
86화
보살은 여보라는듯 인공 앞에다 보자기를 던져놓았다.
‘보나마나 가사와 장삼일 텐데, 뭘 저렇게 우쭐대는 걸까?’
인공은 아무런 기대감 없이 보자기를 흘깃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용하는 달랐다. 뭔가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으로 보자기를 주시했다.
보살은 먹잇감을 덮치는 들짐승처럼, 거칠게 보자기 앞에 앉았다. 그리고 꽁꽁 묶은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엇을 저리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을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인공.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의 시선이 보자기에 머물러 있었다. 용하는 아까부터 초조하게 보자기가 펼쳐지기만을 기다렸다.
‘대체 저 보자기에 뭐가 들어 있을까? 보살에게 무엇이 그리도 소중했던 걸까?’
그 순간 용하의 뇌리에, 14세기 무림에서 보았던 남채화의 행색이 떠올랐다. 진한 감색의 도포 차림에, 한쪽 발은 버선을, 다른 한쪽 발은 맨발이었던.
용하는 일순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설마 아니겠지?’
고개를 내저어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
‘아닐 거야. 아니, 아니어야 해.’
머릿속을 채우는 단 하나, 남색 도포!
바로 그때였다. 펼쳐진 보자기에는 뜻밖에 명품 양장 한 벌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휴우!”
용하의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이 새 나왔다.
“뭐야, 이게? 이렇게 비싼 옷이 어디서 난 거야?”
대체 무슨 생각에서인지, 인공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스님,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네 녀석은 나서지 말거라.”
“보기 민망해서 그럽니다. 보살님도 부처를 섬기는 몸 아닙니까? 불제자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게 어떻다는 것이냐?”
“존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앞에선 스님이나 보살님이나 똑같은 불제자 아닙니까?”
노기에 차 있던 인공의 입이 쑥 들어갔다.
“그리 성낼 만한 옷 아닙니다, 스님.”
평소와는 달리 차분하고 온화한 목소리였다.
“성내서 미안하오.”
인공도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경솔함을 인정했다.
“말해 줄 수 있겠소? 따지려는 게 아니고, 궁금해서.”
“속세를 버리고 사바로 들어올 때,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 미련이 남더군요.”
“어디? 속세에?”
“네.”
“그래서?”
“속세의 마지막 생일에 받았던 이 옷 한 벌은 고이 간직하고 싶어서…….”
보살은 말꼬리를 흐렸다. 더는 토를 달 이유가 없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나 간직하고 싶은 것 하나쯤 있지 않은가.
“알았으니, 어서 내려갈 준비를 하시오.”
보살은 간결하게 예를 갖추고 세로로 쳐진 거적 뒤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거적이 몇 차례 꿈틀거리며 보살이 옷을 갈아입는 게 느껴졌다.
옷 한 벌 갈아입는 시간치고는 좀 긴 시간이 흘렀다.
“무슨 옷 한 벌 갈아입는 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려.”
급기야 인내의 한계에 이르렀던지, 마침내 인공은 불만을 토로했다.
“스님, 쉿!”
그때였다. 마침내 옷을 다 갈아입은 보살이 거적을 들치며 모습을 나타냈다.
“와우!”
“헉!”
용하와 인공의 입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새 나온 감탄사였다.
두 사람 앞에 서 있는 보살은 아직 머리는 물론 어떤 치장도 하지 않았음에도 놀랄 만큼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보는 용하와 인공. 두 사람은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말로만 듣던 환골탈태!”
“번데기가 나비로 환생이라도 한 것이오?”
“으이그!”
말을 해도 꼭.
“우선 돌아가면 뷰티샵부터 들러야겠습니다.”
“뷰티샵?”
“아, 미용실.”
“미용실?”
“아, 아, 아니, 아니, 음… 이발소.”
“아하, 이발소!”
그제야 인공은 용하의 말을 알아들었다.
“이발소 들른 다음엔 백화점으로 갈 겁니다.”
“백화점엔 왜?”
“보살님, 옷 몇 벌 더 사드리려고요. 명품으로…….”
“아이, 됐어. 뭘 그렇게까지. 저 할망구는 저 옷도 과분해.”
바로 그 순간 보살의 눈길이 인공을 매섭게 흘겼다.
“스님! 스님답지 않게 왜 자꾸 매를 버십니까?”
“매를 벌다니,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바로 그 순간 보살의 매서운 손이 인공의 뒤통수로 날아들었다.
―철썩!
소리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매서운 손매였다.
“아니, 이 할망구가 미쳤나!”
“미치다니요? 어차피 일이 이리되었으니, 이제 주지 스님도 아니잖습니까?”
“뭐, 뭐야?”
“그러게 왜 자기 맘대로 그런 결정을 해?”
울화가 치밀었지만, 더는 항변할 수 없는 상황임을 곧 깨달은 인공.
‘그래, 차라리 잘된 일이다. 할망구가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어쩌나 했는데, 알아서 척척 마음의 준비를 해 주니,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일 아닌가.’
* * *
용하가 운전하는 셰어링카는 구리포천고속도로 위를 달렸다.
“세상 참 좋아졌네, 그려. 이렇게 달리면 금방 도착하겠어. 예전 같으면 포천에서 서울이나 경기 남부지역으로 가려면 반나절이나 걸렸는데 말이야.”
“이 도로공사가 끝나면 세종시까지 이 속도로 쭉 달려갈 수 있게 될 겁니다.”
“공사 중이라고? 그럼 우리가 다 만들어지지도 않은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거야?”
“그렇죠.”
“공사 중인 도로를 달리는 건 위험한 거 아닌가? 아니, 그보다 법에 저촉되는 건 아니고?”
“네, 아닙니다. 구리까지 공사가 끝나서 정식으로 개통한 도로예요.”
“아, 그래? 세상 참,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아닐 수 없네, 그려. 포천에서 남양주까지 걸어 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포천에서 남양주까지 걸어 다녔다고요?”
용하가 놀란 눈으로 물었을 때였다.
“뭘 그런 걸 가지고 놀래? 전국을 돌며 시주에 나서야 할 때도 있었는데.”
“걸어서 전국을요?”
“물론이지.”
“에이… 형님! 이번엔 좀 쎈 것 같은데요.”
“쎄다니, 뭐가? 너도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해 봐라. 승용차 타고 다니면서 시주가 될 것 같으냐?”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말이 좋아 시주지, 실상은 구걸이 아닌가.
“형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래도 예전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우길 때보다는 낫구나. 금방 시인하는 걸 보니.”
“인정합니다. 제가 생각해 봐도 예전엔 참 어리석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으로 세상을 살았는지, 원.”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구나.”
뒷자리의 보살은 잠자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바로 그때였다.
“보살님! 보살님은 법명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건 알아서 뭐 하시게요?”
“앞으로 속세에서 살게 될 텐데,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요.”
“어차피 사바를 떠나 속세로 돌아왔는데, 법명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냥 속세에 있을 때 남들이 부르던 이름 그대로 사용할까 하는데요.”
“남들이 뭐라고 불렀습니까?”
“채화!”
“채화? 꽃 이름 같고 좋은데요. 성은요?”
“아버지가 남씨였으니, 저 또한 남씨겠지요.”
남채화!
그 순간 용하는 머리칼 다 쭈뼛해지는 것 같았다.
등골이 오싹해지도록 경악한 사람은 용하뿐 아니었다.
“남채화!”
인공 또한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뒷자리 보살을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놀라세요?”
보살의 표정이나 말투는 천연덕스러웠다. 그 모습을 본 인공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천만다행이군. 우연치고는 소름이 돋는 일이지만, 다행스럽게도 뭘 알고 한 소리는 아닌 것 같으니 말이야.’
룸미러에 비친 용하의 미간이 심하게 좁아졌다 서서히 펴졌다.
“보살님! 말씀드리기 외람되지만, 요즘 속세에서는 그런 촌스러운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그럼요?”
“대부분 닉네임을 사용합니다.”
“닉네임? 그게 뭔데요?”
“음, 그게 뭐냐 하면요… 음, 가수나 배우들이 예명을 사용하듯이 요즘은 유명인이 아니어도 예명을 사용합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첫인상이거든요.”
“아, 그래요? 부모가 지어 준 이름을 버리고 예명을 쓴다니 듣기 좀 불편하긴 해도, 이름이 그 사람의 첫인상이라는 말은 공감할 수밖에 없네요. 그래 뭐, 좋은 이름이라도 있어요?”
보살의 물음에 용하는 얼른 장학재단 총무와 어울리는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남주리!
“보살님, 남주리 어때요?”
“남주리?”
“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버릴 순 없으니, 성은 그대로 사용하시고, 앞으로 어린이 장학재단 총무로 일하게 되실 테니, 세상 모든 어린이에게 사랑을 듬뿍 나눠 주자는 의미에서 한번 지어봤습니다.”
“아, 괜찮은 이름이네요. 세상의 모든 어린이에게 사랑을 듬뿍 나눠 주자!”
나름 흡족해하고 있을 때였다.
“주리 씨~”
인공이 코 먹은 소리를 내며 짓궂게 보살의 새로 지어진 이름을 불렀다.
“네~ 인공 씨~”
보살은 넉살 좋게 맞장구를 쳤다.
그러는 사이 고속도로를 벗어난 셰어링카는 강변북로를 달렸다. 도로 사정이 좋아서인지, 10분도 채 안 돼 영동대교를 눈앞에 둘 수 있었다.
용하가 영동대교 위로 차를 올리자, 한동안 잠자코 있던 인공이 입을 뗐다.
“왜, 더 안 올라가고?”
“남 총무님, 이발 좀 하고 가야죠.”
“고작 그것 때문에 귀한 시간을 낭비하자는 거야? 그냥 동네 이발소 가서 바리깡으로 확……!”
“형님! 그냥 잠자코 계시지요. 제가 다 알아서 합니다.”
“알아서 하다니, 대체 뭘 알아서 한다는 게야?”
목소리에서 심사가 뒤틀렸음이 느껴졌다.
“미용하면 뷰티샵! 뷰티샵하면 청담동! 신도시에 걸맞은 이미지 변신을 위해 선택한 것이니, 더는 토를 안 다셨으면 좋겠습니다.”
토를 달지 말라고? 말투나 내용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반박할 이유는 없었다.
“알았다. 속세를 떠나 산속에 파묻혀 살아온 나보다는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
좀 이상했다. 결코 이렇게 빨리 인정할 인공이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심사인지, 의아하게 생각될 만큼 쉽게 인정했다.
그러는 사이 용하가 운전해 온 셰어링카는 영동대교를 빠져나와 청담사거리에서 좌회전해 뷰티샵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와~ 여긴 도대체 어디길래 이렇게 아름다움이 물씬 풍기는 것이냐?”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곧 우리 남 총무님의 환골탈태가 시작될 것이니.”
“환골탈태?”
“네.”
“지금도 충분히 환골탈태한 것 같은데, 또 뭘?”
용하는 더는 입을 떼지 않고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윽고 어느 뷰티샵 앞에 차를 세운 용하 일행은 뷰티샵 안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뷰티샵 원장과 종업원들은 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셰어링카를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찌푸렸던 인상을 펴며 화사하게 용하 일행을 맞이했다.
용하 일행이 입고 있는 의상 때문이었다. 최소 한 벌에 1,000만 원이 넘는 명품들.
“어서 오세요~ 어느 분 시술 도와드릴까요~”
코 먹은 소리를 남발하며 용하 일행을 맞이하는 뷰티샵 종업원들. 그들이 보여주는 행위는 퍼포먼스를 방불케 했다.
그리고.
보살이 미용 의자에 앉아 준비를 끝냈을 때였다.
뷰티샵 원장이 우아한 걸음으로 거리를 좁혀 왔다.
“원하는 스타일 있으세요?”
우리 말을 영어처럼 하는 원장의 목소리는 버터를 두른 듯 느끼했다.
원장의 질문에 용하 일행 누구도 대답을 못 했다. 그러자 원장이 입을 뗐다.
“직업이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
질문이 금세 달라졌다.
‘뭐야, 직업은 왜 묻는 거람! 아, 그럼 혹시 하는 일에 걸맞게 이미지 변신이라도 시키겠다는 건가?’
용하는 얼른 대답했다.
“네, 어린이 장학재단 총무님이십니다.”
원장은 용하를 흘깃 보고는 대답했다.
“아, 그러세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원장의 우아한 손동작이나 목소리는 딱 여기까지였다. 척! 미용 앞치마를 몸에 두른 원장의 손놀림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이를테면 「가위손」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에드워드가 언덕 위 자신의 성에 있는 정원을 가위손으로 빠르게 손질하는 것처럼.
거울에 비친 보살의 헤어스타일이 마치, 오버랩되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빠르게 변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