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87
87화
쑥쑥 유치원 건물 8층에 장학재단 사무실이 꾸려졌다.
흔히 상류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 나오는 임원실을 연상시키는 사무실이었다.
창을 등지고 그 앞에 커다란 책상이 놓여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품격이 느껴졌다. 책상 위에 놓인 명패에, 작은 글씨로 [어린이 장학재단 총무], 그리고 그 옆에 좀 큰 글씨로 [남주리]라는 이름이 보였다.
보살, 그러니까 남주리 총무는 어린이 장학재단을 총괄하는 1인이 되었다.
“비록 파계했으나, 이렇게 어엿하게 속세로 돌아왔으니, 죄의식 갖지 마시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주시오. 나 같은 땡추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소.”
인공의 말에 남주리는 깊이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금까지 남주리라는 여자가 인공에게 이보다 더 예의를 갖춘 적은 없었다.
‘돈과 문명 앞에 저리도 나약해지는 것인가?’
자칫 비리의 온상이 될 수도 있는 장학재단. 하지만 남주리 총무 같은 인물이 재단을 총괄해 준다면, 비리나 부정부패 같은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용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자네도 고집 그만 부리고, 어린이 장학재단 건물로 세 들어와. 특별히 싸게 줄게.”
“형님, 그건 좀 곤란합니다.”
“곤란하다니, 왜?”
“생각해 보십시오. 신도시로 옮기려면 지금 내는 월세보다 백 배는 더 들어갈 텐데, 그걸 무슨 수로 감당합니까?”
“자네는 수련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그것만 고민해. 돈 문제는 내가 알아서 다 해결할 테니까.”
예전 같으면 의심이 앞섰겠지만, 그동안 인공이 보여 준 것들을 생각하면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습관처럼 입에서 새 나오는 말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요? 정말 돈 문제는 형님이 책임지실 겁니까?”
“그걸 뭘 자꾸 입을 대!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잖아. 기수별로 억대 수익 올리는 거, 누구 덕인지 그새 잊은 거야?”
용하의 입이 쑥 들어갔다.
“재단 사무실 꾸리느라 나머지 공간이 자투리가 돼 버렸으니, 8층은 온전히 임대 내기가 어려울 거야. 그러니 내친김에 싸게 줄 테니, 여기로 이사해.”
“형님, 나머지를 다요?”
“왜, 뭐가 문젠데?”
“아니, 나머지라면…….”
용하는 하던 말을 잠시 멈추고 사무실 문을 열고 나머지 공간을 크게 둘러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형님,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라는 거야, 자꾸?”
“제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일입니다. 지금 변두리 검도 체육관에 비하면, 스무 배가 넘는 공간입니다. 여길 다 무슨 수로 채우려고 그러십니까?”
“스무 배라… 음, 그래 봤자 천 명도 안 되네.”
천 명!
용하에게는 꿈만 같은 그 말을, 인공은 너무 쉽게 내뱉었다.
“형님!”
용하는 쥐어짜는 목소리로 인공을 불렀다. 분명 질책하는 말투였다. 그뿐 아니라 이맛살을 찌푸리며 미간까지 좁혔다.
용하가 온몸에 배어있던 짜증을 한꺼번에 분출하는 반면, 인공은 처연하게 되물었다.
“왜, 못 할 것 같으냐?”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수련생을 둔 체육관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해 볼 만하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최초라는 말은 사람을 적잖이 설레게 하지 않더냐?”
“그러니까요, 그 최초라는 말을 어떻게 만드실 건데요?”
“왜, 불가능할 거로 생각하느냐? 난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다고요?”
용하가 이처럼 기함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수련생 모집이었으니까.
“그래. 자네가 한 가지만 약속해준다면 지금 수련하고 있는 기수는 수료와 동시에 재입관 할 테고, 그렇게 몇 번만 회전시키면, 그깟 천 명! 금방 채워지지 않겠느냐?”
“재입관 하지 않으면요?”
“그걸 자네가 왜 걱정해? 내가 한다면 하는 거야.”
“형님이 알아서 해주신다면 한번 생각해 보죠.”
“아니,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까, 재입관 하게 만드는 건 내가 아니고, 김 관장이 해야 할 일이야.”
“제, 제가요?”
“왜, 싫어?”
의구심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공이, 자기 입 밖으로 내뱉은 말에 대해 단 한 번도 책임 못 질 행동을 한 적 없기에, 한번 믿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자네가 다들 입이 벌어질 만한 이벤트가 될 만한 기운을 만들어낸다면 충분히 해 볼 만할 것 같은데. 천 명!”
“천 명……!”
용하의 두 눈에 불꽃이 튀는 듯했다.
“뭐가 좋을까요? 불꽃이 식상하다면 이번에 얼음은 어떨까요. 남극의 빙산처럼 서늘한.”
“그건 순전히 김 관장 몫이고. 어떻게 체육관 옮겨 볼 마음이 생기시오?”
“수련생 천 명이라면 못 옮길 이유가 없습니다.”
“단, 한 가지는 분명히 해 줘야 할 게 있어.”
용하는 입을 굳게 다물고 인공을 직시했다. 더는 가볍게 들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인지 눈빛은 물론, 심장박동도 달라졌다.
―쿵쿵! 콩닥콩닥!
“방금 김 관장이 한 말! 반드시 실천에 옮겨야 하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얼음 말씀입니까?”
“얼음덩어리가 됐든 용암 덩어리가 됐든, 그건 김 관장이 알아서 하고.”
“…….”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지금까지 해 온 그 불꽃놀이 같은 수련 말이야. 그건 이제 식상하다는 거야. 너무 많이 알려졌다는 뜻이지.”
용하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제가 개인 수련에 들어가면, 수련생들은요?”
“당분간 수련생들 지도는 내가 책임지겠네.”
“말씀은 고맙습니다. 그런데 뭘, 어떻게 증폭시키죠?”
“음, 그건… 공부를 해야지, 공부를!”
“공부를요……? 이 나이에……? 학교 다닐 때도 안 했던 공부를요?”
“공부에 나이가 어딨어. 공부가 싫으면 수련을 하든 수양을 쌓든, 그건 알아서 하고.”
용하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내키지 않는 것이오?”
용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결연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해 보겠습니다. 아니, 죽을 각오로 해내겠습니다.”
“체육관 안에 김 관장이 수련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만들 것이니, 이제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수련에만 매진하도록 하시오.”
* * *
쑥쑥 유치원을 둘러싼 일상은 모든 게 원활하게 돌아갔다. 미숙이 간혹 면접 때 본 원장에 관해 묻는 것 빼고는.
“이보시오, 김 관장.”
“네, 말씀하십시오.”
“수련은 잘돼 가시오?”
“네. 조만간 달라진 저를 보게 될 겁니다.”
“기대되는군.”
“…….”
“그리고 참!”
인공의 말에 톤이 달라졌다. 화제를 바꾸려는 의도가 다분히 엿보이는 대목이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걸까. 용하는 기대감 반, 두려움 반으로 인공을 직시했다. 그때였다. 마침내 인공이 입을 뗐다.
“유치원 원장 자리 말이오. 언제까지 공석으로 내버려 둘 작정이시오?”
“글쎄요, 그 문제를 거론하기엔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이르다니, 김미숙 선생이 자기 자리에서 자기 맡은 바 일을 저렇게 잘하고 있는데, 대체 무엇을 망설이는 것이오?”
“망설이는 게 아니고, 보기 좋아서 좀 더 지켜보고 싶습니다.”
“…….”
“괜히 잘못 얘기했다가 또 잘못되는 날엔…….”
두 사람의 얼굴에 불현듯 걱정이 앞섰다.
“알겠소. 그렇게 깊은 뜻이 있는지는 몰랐소. 됐다 싶을 때 다시 거론하도록 합시다.”
“알겠습니다, 사범님. 어리석은 저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김 관장 말하는 것 좀 보시오. 이제 제법 어른이 다 되었소.”
“어른은 진작 됐습니다. 어른 노릇 못해서 그렇지.”
“그걸 알고는 있었소?”
“그럼요. 어른 구실 못하는 저 때문에 그동안 사범님이 얼마나 속을 끓이셨습니까. 이 모든 걸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입으로만?”
“아닙니다. 때가 되면 사범님의 의중을 토대로 어떻게든 보답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흠흠! 뭐, 인사받을 처지는 아닌 것 같고, 관장님이 우리 남주리 총무를 그 자리까지 끌어올렸는데, 저는 뭐 특별히 김미숙 선생을 위해 해드린 게 없는 것 같아서…….”
“괘념치 마십시오. 때 되면 물 흐르듯 잘 처리하겠습니다.”
“어련하시겠습니까.”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간결한 예를 갖추고 각자의 길로 돌아섰다. 용하는 자기 개인 수련실 쪽으로, 인공은 수련생들의 공간인 체육관 공식 수련장 쪽으로.
한편 유치원 행정실에는 선생님 채용 면접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미숙이 면접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미 선발된 교무행정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준 덕분에, 그 많은 선생님 면접을 치르는 데 차질을 빚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체 원장님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시길래, 나한테 이런 일을 하게 만드시는 거냐고. 능력도 안 되면서 말이야. 쳇, 연차도 안 되면서 원장 대행 업무까지 봐줘야 한다니.”
미숙은 입엣말로 한 명, 한 명, 면접이 끝날 때마다 하염없이 구시렁거렸다.
“오전에 열 명, 오후에 열 명! 하루 스무 명을 면접 치른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
오늘 하루 이런 넋두리는, 잠꼬대를 할 만큼 수없이 반복되었다.
“처음 하는 일이니 당연히 힘들 겁니다. 하지만 하십시오. 김미숙 선생님과 코드를 맞출 수 있는 선생님들로 채용하십시오.”
인공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을 맴도는 듯하다.
“하, 대체 왜? 왜, 나하고 코드가 맞는 선생을 채용하라는 건지. 원장님하고 맞아야 하는 거 아냐? 아니지. 유치원, 우리 쑥쑥 유치원하고 맞는 선생님으로 채용해야 하는 거잖아.”
혼잣말은 어느새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우리 유치원 이념도 모르고 일했네.”
미숙은 스마트폰을 꺼내 용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띠링띠링띠링~
―띠링띠링띠링~
여러 차례 신호음이 전해졌지만 받지 않았다.
“아직 수련 중인가?”
용하와의 통화를 포기한 미숙은 인공에게 전화를 걸었다.
―띠링띠링띠링~
―띠링띠링띠링~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제발 컬러링 좀 바꾸면 안 될까? 웃기잖아! 별로 좋지도 않은데, 왜 이걸 굳이 공유하는 건지.”
그때였다.
―여보세요?
“네, 사범님. 저 김미숙입니다.”
―아, 김미숙 선생님? 김미숙 선생님께서 저한테 무슨 일로 전화를…….
“아 네, 오빠가 전화를 안 받아서요.”
―아, 안 받는 게 아니고, 못 받을 겁니다.
“아직 수련 중이신가요?”
―당분간 집중 수련 기간이 될 것 같습니다.
“아 네, 그럼… 사범님께 한 가지 여쭤도 될까요?”
―뭐, 얼마든지요. 제가 아는 건 뭐든 말씀드리겠습니다. 원장… 아니, 김미숙 선생님.
“우리 쑥쑥 유치원 설립 이념을 좀 알고 싶은데요.”
―설립 이념?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이를테면 회사를 창립할 때 창업주의 경영철학이 담긴 슬로건 같은 거 말입니다.”
―아, 그거요? 그거라면 원장… 아니, 김미숙 선생님께서 하셔야죠. 지금 수련 시간이라, 전 이만 끊습니다.
인공은 급히 전화를 끊었다.
“뭐야? 아무렇지 않은 것 같더니, 갑자기 왜 바빠진 거야?”
전화를 끊은 미숙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왜 자꾸 원장, 하다가 김미숙 선생님이라고 급히 말을 바꾸는 거야?”
또 한 차례 고개를 갸웃했다.
“그놈에 원장이란 말이 입에 밴 건가?”
그때였다.
“김미숙 선생님! 다음 면접자 어떻게 할까요?”
문밖에서 교무행정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여보내세요.”
조금 전 구시렁거리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대기 중이던 면접자가 다소곳하게 들어왔다. 유치원 선생을 하겠다고 온 사람치고는 어딘지 조화롭지 못한. 다시 말해 지금 면접을 치르는 면접자는 어디다 내놔도 눈에 띌 만큼 빼어난 미모였다.
면접자를 보는 순간 미숙은, 이미 속으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죄송하지만 다른 곳을 알아보세요.’
미숙은 어느새 원장 대행이란 사실을 망각한 채 선을 넘고 있었다.
사실 미숙은 원장 대행 자격으로 면접에 임하면서 결심했던 바가 있었다. 자신은 면접자들 평가만 하고, 결정은 지난번 면접 본 원장이 내리도록 하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