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92
92화
조금 전 새하얀 광채를 지났다. 예전처럼 눈이 부셔 앞을 볼 수 없지는 않았다. 그새 빛에 익숙해진 걸까? 그리고 지금 걷고 있는 이곳은 코발트 빛의 고색창연하고 산새가 험난한 곳이다.
‘어떻게 된 걸까?’
예전에 무림으로 가는 길엔 이런 데가 없었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면, 광채를 지나 광야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낮은 바위산이었다.
‘사패산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곳…….’
그런데 용하가 걷고 있는 이곳은 물안개가 자욱하다. 음산한 기운이 엄습해 오래 있고 싶지 않다. 게다가 이곳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산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주상절리라 해야 옳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곳은 무림으로 통하는 길이 아니란 말인가.
―콩닥콩닥!
갑자기 심장박동 달아졌다.
‘낯선 곳으로의 새로운 여정이란 말인가?’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진 달무리를 부표 삼아 이곳을 걸으면서 신비감을 느끼거나 기대감에 부풀기보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지금은 혼자 가야 하는 고독한 여정이다.
“형님…….”
인공에 대한 그리움이 물밀듯 다가온다.
정상 보행이 어려워졌다. 언제부터인가 엉금엉금 기어서 산을 오르고 있다. 악산의 정상을 향해 굽이치는 오솔길. 오르면 오를수록 죽음을 재촉하는 듯하다.
‘다음을 보려면 목숨을 담보하고서라도 정상에 올라야 한다.’
오직 다음을 경험해 보겠다는 일념으로 정상에 올랐을 때였다.
누군가의 근엄한 목소리가 산세를 타고 메아리쳤다.
[흠, 이 정도 높이였던가?]“그대는 누구시오?”
[내 목소리를 벌써 잊었다니, 이거 너무 서운한걸. 아니, 원통해서 못 견디겠어.]어금니를 깨물어 내는 소리였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내가 뭘 잘못했다고.’
“큼큼!”
용하는 두어 차례 헛기침하고는 용기를 내어 호령했다.
“사람이면 모습을 보일 것이며, 만약 귀신이거든 썩 물러가거라!”
바로 그 순간, 악마의 손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손이 물안개를 비집고 불쑥 튀어나와 용하를 가차 없이 악산 아래로 밀어 버렸다.
“으아아아아악~”
용하의 비명은 메아리가 되어 악산 전역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위로.
“악몽을 꾼 모양이구나.”
인공의 목소리가 메아리와 뒤섞여 들렸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이유라도 알아야 했다. 왜 이런 죽음을 맞아야 하는지.
‘정신 차리자! 정신이라도 온전해야 뭘 알아보든 할 것 아닌가.’
서서히 정신이 혼미해지던 용하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떴다.
번쩍 열린 용하의 눈앞에 인공이 보였다.
“형님…….”
용하의 목소리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 같았다. 그는 아직 자기가 산 사람인지, 죽은 사람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대체 얼마나 깊은 악몽을 꾸었기에, 얼굴이 그 모양이냐?”
인공의 목소리가 조금 전 평온했던 것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무엇인가 심상찮음을 감지한 사람 같다고나 할까.
용하는 손을 뻗어 인공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더듬어보았다. 인공의 구릿빛 얼굴이 생생하게 손끝에서 느껴졌다. 잠깐이었지만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형님, 지금이 언제입니까?”
“언제라니? 자네 혹시…….”
“네, 형님. 21세기로 돌아와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습니다.”
“대체 어떤 꿈을 꾸었기에 얼굴이 그 모양이 됐던 것이냐?”
“무림으로 가는 길을 헤매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잠에서 깼습니다.”
“에효!”
인공은 옅은 한숨을 토했다.
“개인 수련실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왔더니, 자네가 이 지경이었어.”
“이상한 기운이라니, 대체 어떤……?”
“풀 수 없는 원한에 사로잡힌 사특한 기운이었어.”
“형님.”
용하는 섬뜩하다는 표정으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그러느냐?”
“제 꿈의 느낌을 요약하라면, 저 또한 그리 말했을 겁니다.”
“그 말은…….”
“네. 아마도 깊은 원한을 풀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제가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나락으로 버려졌습니다.”
용하의 말에 인공은 피식 웃으면 말했다. 아마도 위로를 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고작 그런 꿈을 꾸며 그리도 생생하게 비명을 질렀던 것이냐?”
“네?”
“개꿈이야. 나처럼 나이 좀 지긋하고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그런 꿈을 꿨다면 굿이라도 해서 깊은 원한을 풀라는 개시지만, 자네처럼 어떤 고생도 한 적 없는 젊은 사람이 꾼 꿈은 개꿈이야, 개꿈!”
“개…꿈……! 정말 개꿈인 거죠?”
그제야 용하는 한시름 놓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정말 개꿈이라고 믿고 싶었다.
* * *
그날 이후.
“사범님, 만약 제가 없으면 우리 체육관 수련생들 말입니다. 다들 그만둘까요?”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인 게요? 김 관장이 없으면 이라니.”
“아, 만약 제가 저만의 시간을 갖고자 한다면 말입니다. 예를 들어 재충전을 위해 여행을 간다거나 휴가를 갈 수도 있잖아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라면 다들 이해하겠죠. 수련생들도 우리 체육관 문을 나가는 순간 다들 관장님들이신데, 그 심정 모르겠어요?”
“만약 그 기간이 길어진다면요?”
“길어진다는 게 얼마나 긴 시간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길어진다면 신뢰를 잃게 되지 않겠소?”
신뢰라는 말에 용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신뢰를 잃는다는 건 곧, 죽음이다.’
잠시 말문이 막혔다. 잠시 뒤 용하는 다시 입을 뗐다.
“아무래도 좀 무리겠죠?”
“뭐, 그야 당연한 얘기고. 일단 그 말을 꺼냈으니, 대답은 해야 할 것 같소이다.”
“대답요? 무슨 대답!”
“괜히 꺼낸 말은 아닐 테고, 그렇다고 해서 뭐, 심심풀이로 한 말은 더더욱 아닐 테고.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질문을 한 것이오?”
“심심풀이로 한 얘기입니다. 네, 심심풀이 맞아요.”
누가 봐도 대충 넘기려는 수작임이 틀림없다.
“뭐, 심심풀이?”
얼핏 별일 아닐 수 있어 보이지만, 실은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대충 얼버무리는 용하의 행태에 인공은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지금 나하고 말장난하자는 것이냐?”
“그럴 리가요, 형님!”
“그럼 무엇이냐?”
일순 두 사람 사이에, 시간이 멎은 듯한 냉기가 흘렀다. 잠깐의 침묵 후 용하가 말했다.
“수양이 필요합니다. 아니, 기(氣)를 개발하기 위해 연구가 필요합니다.”
제법 묵직한 목소리였다. 뭐랄까, 무엇인가 작심한 사람처럼 결연했다고나 할까.
“기를 개발하기 위한 연구라면?”
“네. 책도 좀 보고 학계 전문가들을 만나 자문도 좀 구하고 뭐, 기타 등등.”
그 순간 용하를 바라보는 인공의 표정을 한마디로 말하면, ‘뿌듯하다’ 바로 그것이었다.
“진작 이야기를 할 것이지, 그런 일로 혼자 전전긍긍했던 것이냐? 수련생들도 두 손 들어 환영할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들도 기대가 적지 않을 것이다.”
“정말 그럴까요?”
“당연한 이치(理致) 아니겠느냐? 그들도 무엇인가 새로운 것에 목말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소식을 접하면 되레 좋아하지 않겠느냐? 기대감이 큰 만큼 좀 길어진다 해도 크게 문제로 삼지는 않을 것 같구나.”
“아무리 그래도 형님! 그렇게 하는 건 수련생들과의 약속을 어기는 겁니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게 맞다. 하나 깨질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하는 게 약속이다. 만약 깨질 리 없다면 약속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
“형님의 철학을 깊이 새기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일단 수련생들 지도는 하던 대로 하겠습니다. 단, 주말에는 저만의 시간을 좀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난 우리 김 관장이 뭘 하고 다니든 적극적으로 지지할 걸세.”
“그리고 말입니다. 아마도 제가 주말에 안 보이면 김미숙 원장이 제일 먼저 형님을 찾아올 겁니다.”
“당연히 그리할 것이다. 혹여 지난번처럼 또 어디론가 기약 없이 사라져버리는 건 아닐까, 염려되어서라도 말이야.”
“바로 그 점입니다. 이미 한 번 겪었기 때문에 조금만 이상해도 심각하게 반응할 수 있다는 거죠. 괜히 지나치게 염려하다 다시 병이라도 도지는 날엔…….”
목이 메어서인지, 용하는 잠시 하던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그게 걱정입니다.”
마지막 말은 결국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음, 그 문제는 뭐라 단정 지어 대답하기가 좀 그렇구나. 일단 장학재단 남 총무와 묘안을 좀 찾아보도록 하마.”
“부탁드립니다.”
“평일에는 자네가 알아서 잘 처신해야 해.”
“알겠습니다. 적어도 형님 난처하게 만드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난 자네만 믿어.”
“저도요, 형님. 전 형님만 믿습니다.”
두 사람은 흐뭇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 순간.
‘형님… 죄송합니다.’
웬일인지 용하의 가슴 속에서 사과하는 듯한 음성이 들렸다.
그날 이후.
용하는 시간을 쪼개가며 세상 누구보다 바삐 살았다.
하루 두 타임의 수련생 지도를 뺀 나머지 시간을 최대한 아끼고 또 아꼈다. 마치 개방에서 개기일식의 날을 기다리며 21세기로 돌아오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준비하던 그때처럼.
창의부흥원. 왠지 그리운 이름이 되었다. 그리고 잊으려 애썼던 무림 속의 기억 맨 뒤에서 스멀거리는 얼굴. 용하는 고개를 크게 내저어 기억을 뒤흔들어 놓았다.
지우려 하면 더욱 생생해지는 그 모습. 그것은 다름 아닌 소희였다.
‘왜, 하필 지금…….’
용하는 참담한 표정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날 용하는 잡념을 떨쳐내기 위해 영화 한 편을 내려받았다.
「백 투 더 퓨처 Back to the Future」!!
용하는 영화를 보는 동안 에메트 브라운 박사의 대사와 그의 스포츠카를 개조한 타임머신 드로리언에 온통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지금 용하의 바람은 결코 ‘백 투더 퓨처’가 아니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과거로의 긴 여정이었다.
용하는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타임머신의 원리와 시간의 계산법과 상대성 이론에 관한 부분들은 영상을 되감아 보며 하나도 놓치지 않고 메모했다.
그렇게 영화에 몰입하고 있을 때였다.
“김 관장! 김 관장!”
목이 터져라, 용하를 부르며 호들갑을 떠는 인공. 그의 목소리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졌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용하는 영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바로 그때.
“이보게, 김 관장!”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인공은 사무실 문이 부서지라 열어젖히며 들이닥쳤다.
“네, 형님.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지금 원생들이 다 빠져나가고 있어.”
“네에?”
용하가 토끼 눈으로 되물었지만, 인공은 더 다급하게 대답할 뿐이다. 마치 물에 빠져 질식 직전인 사람처럼.
“원생들이 다 빠져나가고 있다고.”
“대체 왜요? 왜 갑자기 원생들이 빠져나간다는 겁니까?”
“신도시 유치원에 다니는 원생은 정부 지원금을 받을 수 없어서 그렇다는구나.”
“왜요? 왜 지원을 안 한다는 거냐고요?”
“적어도 신도시 유치원을 보낼 수 있는 집은, 그래도 먹고살 만하다는 거겠지, 뭐겠느냐?”
“그게 이유랍니까? 그런 이유라면 제가 나서서 싸우겠습니다.”
“싸워? 어떻게? 무슨 수로 정부를 상대로 싸우겠다는 것이냐?”
“우선, 장학재단을 움직여 원생들 빠져나가는 것부터 막아주세요.”
“장학재단에 무슨 돈이 있다고? 아직 건물 임대가 완료되지도 않았는데.”
“그게 무슨 상관있습니까?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원생들에게 회비 부과를 안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 같구나.”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 같다니,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원생들 교육비 말고 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건가요?”
“원생들 교육비야 우리가 받지 않으면 된다지만, 선생님들 월급은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냐?”
“그거만 해결되면 되는 겁니까?”
“일단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것 같다.”
“유치원, 어린이집 선생님들 월급 말입니다. 그거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이 자리를 좀 잡을 때까지 우리가 책임집시다. 우리 검도 체육관이.”
“이보게, 김 관장! 그 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