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95
95화
“조광연 박사님.”
“네, 말씀하십시오.”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네~에.”
조광연 박사는 마른침을 삼켜가며 용하가 말을 이어 가 주기만을 기다렸다.
“만약에 말입니다. 그 방송보다…….”
또다시 뜸을 들이자 마침내 조광연이 짜증을 냈다.
“방송이 뭐 어쨌다는 거요? 사람이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방송국 근무하면 그렇게 유세 떨어도 되는 겁니까?”
여기까지가 조광연 박사가 보여 줄 수 있는 인내심의 한계였나 보다. 용하는 그의 태도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무슨 말인가 하려다 말고 하려다 말기를 수차례나 반복하며 더욱 그를 자극했다.
‘대체 이 작자가 왜 이리도 나를 시험하려 드는 걸까?’
조바심을 견뎌 내야 하는 건, 순전히 조광연 박사의 몫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세상에 펼쳐 보일 게 많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만.”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압니다. 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주십시오.”
“기다리라면 저야 뭐 기다리겠지만, 그래도 혹시 무슨 계획인지 알고서 기다립시다.”
“조 박사님! 정말 세상 사람들에게 조 박사님의 가설을 보여주고 싶은 거라면, 방송보다 더 확실한 다른 걸 보여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방송보다 더 확실한 다른 거?”
“네.”
용하의 대답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게 뭡니까?”
“…….”
이번에도 조광연이 조바심을 내며 덤비자, 용하는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후―
조광연 박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자기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리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또 실수를 저질렀네요. 제 가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이라면 저도 모르게 그만, 어쩔 수가 없네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가 계획하고 있는 일을 무사히 해내려면, 필요한 게 두 가지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또, 또!”
“아, 죄송합니다.”
조광연 박사는 용하의 의도대로 적당히 길들고 있었다.
‘많이 배운 사람이라 긴장했는데, 의외로 쉬운 사람이었어.’
용하는 내심 안도하며 다음 단계를 착실하게 밟아 나갔다.
“저는 말입니다, 입이 무거운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 말씀은…….”
“아시다시피 방송이란 게 중요하잖아요. 이를테면 방송 나가기 전에 시청자들이 그날 나갈 방송을 미리 안다고 생각해 보세요. 시청률이 나오겠습니까?”
“아, 그래서 입이 무거워야 한다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방송에서 절대 언급해서도 안 됩니다.”
“네?”
조광연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용하를 바라보았다.
“이봐, 이봐. 이러니 내가 뭘 믿고 일을 진행하겠습니까?”
“또 왜요?”
“지금 그 표정! 그거 방송에서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말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용하의 말에 조광연 박사는 입이 쑥 들어갔다.
“조 박사님, 그렇다고 뭘 그렇게까지 주눅이 들어서 그럽니까?”
“글쎄요, 저도 모르게 그만…….”
“저와 함께했던 일들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길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 영상은 편집과정을 거쳐서 다큐멘터리로 방송될 겁니다.”
“그럼 저는요?”
“거, 인내심 좀 갖고 기다리십시오. 제가 두 가지 꼭 필요한 게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두 가지 중 나머지 하나가 바로 인내심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아, 네. 그러니까 우리가 함께 일하려면 입이 무거워야 하고,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네, 바로 그겁니다. 그 두 가지는 정말 명심해야 합니다.”
조광연을 입을 굳게 다물며 어금니를 깨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 그럼. 하던 말 계속하겠습니다. 정규방송이 나가고 나면, 한동안 인류는 타임머신이니 차원 이동이니 하는 말로 떠들썩할 겁니다. 물론 조광연 박사님의 이름도 심심찮게 세간에 오르내릴 테고요.”
“아아…….”
조광연은 벌써 적잖이 들떠 있었다.
“그러면 박사님은 못 이기는 척하면서 가끔 방송에 출연하는 겁니다.”
“아니, 왜요? 왜 가끔입니까?”
“아이참! 또, 또!”
조광연은 뒤늦게 각성하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명심하라고 한 말 그새 잊은 겁니까? 일단 저와 함께한 모든 건 무덤까지 가져간다고 생각하십시오. 그것만 지켜 준다면 나머지는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가끔 출연한다!”
“백 마디 말과 한마디 말이 가치가 같다면, 박사님은 어떤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 그야 물론 전자죠.”
“그럼 저만 믿으세요. 매일 방송하느라 자기 일도 못 하고 쥐꼬리만 한 출연료 받느니, 나가고 싶을 때 가끔 얼굴 내비치고 그보다 열 배 백 배 더 받을 수 있게 해드릴 테니까.”
바로 그 순간 조광연은 무릎을 꿇으며 납작 조아렸다.
‘뭐야? 고작 이만한 일로 사람이 이렇게까지 비굴해지는 거야?’
그의 뜻밖의 태도에 오히려 용하가 안절부절못했다.
‘듣던 대로 방송에 목메는 인간이었군!’
용하는 내심 승리의 쾌재를 질렀다.
그날 용하는 웬일인지 든든한 조수를 하나 둔 기분이었다. 이를테면 창의부흥원에서 소희를 만나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날을 계산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처럼 든든한. 게다가 조광연이라는 자는 천체물리학계에서는 그와 견줄 경쟁자가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존재다.
‘보자, 내 주변에 방송 쪽에 종사하는 인간이 있던가.’
유사시를 대비해 방송국에서 영향력 좀 있는 인물 중 아는 사람이 있는지 떠올려 보았다.
이런!
아무리 떠올려도 검색이 되지 않는다.
‘이를 어쩌지? 혹시 인공 형님은…….’
용하는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용하는 지금까지 보인 적 없는 눈빛으로 조광연을 바라보았다.
“휴우!”
‘저 인간, 다행히도 아직 내 표정이나 눈빛을 읽을 줄 모른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안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분명 인공 형님은 왜? 라고 물을 것이다. 왜 갑자기 방송국에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 것인지.’
정말이지 산 넘어 산이었다.
인공에게 작은 단서라도 남긴다는 건 공들인 계획이 양파껍질 벗겨지듯 한 겹 한 겹 벗겨지고 말 하찮은 비밀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혹시 건축사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그래, 유명세를 치르는 사람이니 방송국에 아는 사람 한둘 정도는 있을 거야.’
자기 자신의 생각을 확신했던 용하가 불현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아냐. 그 인간도 무림의 세계에 출연했던 인물이잖아.’
이번 계획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 가운데 제외해야 할 0순위는 무림에 등장했던 인물들이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남다른 촉을 가졌기 때문에 용하의 계획이 금세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 건축사, 남 총무 그리고 미숙이!’
바로 그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부동산 업자.
이후에도 몇몇 프로그램에 잠깐씩 얼굴을 비쳤으니, 아마도 연락이 닿는 방송국 직원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쯤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래, 공인중개사라면 부담 없이 물어볼 수 있다.’
그제야 용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아무튼 비밀 지켜야 합니다. 입방아에 먼저 오르내린 스토리를 굳이 방송으로 제작할 이유는 없는 거니까.”
“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참! 그리고 시간 여행에 관한 이론을 알기 쉽게 좀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를 찾아왔을 땐 그 정도는 알고 왔을 것 같은데.”
“그런 가설 말고요. 상상력만으로 가설이 나오지는 않았을 거 아닙니까?”
“시간 여행을 가장 쉽게 설명한 사람은 세계적인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입니다.”
“아인슈타인? 그 세계적인 물리학계의 전설?”
“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뒤엎을 설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상대성이론?”
“왜요? 왠지 제 눈에는 모른다는 기색이…….”
“아이, 모르다니요.”
아는 체는 했지만, 실은 용하의 머릿속에는 우주 팽이나 블랙홀 같은 현대과학의 영상들만 스쳤다.
“알고 계신다니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기차를 타고 가면서 창밖으로 교행하는 걸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어떻게 보이든가요?”
조광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용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아, 그게…….”
“아마 확 짧아진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잘 생각해 보면 실제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게 상대성이론입니다. 반대편 기차에서도 같은 광경을 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찰나에 불과한 기차가 짧게 보이는 현상은 기차의 속도와 정비례하죠.”
“아, 그래서 빛의 속도만큼 빠른 이동체가 있다면 시간 여행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가설을 세운 거로군요. 속도와 정비례하니까.”
“그렇지요.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빛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물체를 타고 지구가 도는 반대 방향으로 날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이동체 안에서 지구를 보면 이 지구는 어떻게 보일까요?”
“모든 게 짧아 보일 겁니다. 기차처럼 말이죠.”
“맞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건 이동체의 속도만큼 짧아집니다. 그럼 시간은 어떤 변화를 일으킬까요?”
“짧아지겠죠. 물론 추상적인 개념이라 실제로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확실치는 않지만.”
“기대 이상으로 이해력이 빠르시군요. 역시 방송국 사람답습니다.”
그날 조광연의 가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용하. 무림으로 돌아가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어쩌면 그것을 실현에 옮길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섰다.
* * *
그날 밤 검도 체육관으로 돌아온 용하는 왠지 든든했다.
자기 자신이 겪은 경험과 조광연 박사의 이론이 잘 조화를 이룬다면 못 할 게 없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어딜 그리 은밀하게 다녀온 것이오?”
오늘따라 인공의 목소리가 저승사자의 속삭임으로 들렸다.
“형님! 지금 은밀하게, 라고 했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저의가 뭐죠?”
용하는 본능적으로 날을 세웠다.
‘녀석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확실하군.’
뜻밖의 반응을 보이는 용하의 태도에서 인공은 순식간에 뭔가 감지해냈다. 하지만 티 내지는 않았다.
“아, 미안하네. 평소 언어습관이 더럽다 보니, 본의 아니게 자네 기분을 상하게 했구먼.”
“그러게, 평소 고운 말 바른말 좀 쓰면서 살지 그러셨어요.”
용하는 여전히 시니컬했다.
“참, 그리고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요. 형님 숙소 하나 마련하시죠? 불편하게 사무실에서 주무시지 말고요.”
아무렇지 않은 듯 돌아섰지만, 그 순간 인공의 눈이 예사롭지 않게 빛났다.
‘내가 거슬리는 게 분명해.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
“허허허!”
인공은 보란 듯 껄껄거리며 말했다.
“숙소라. 이보시게, 김 관장. 내 걱정은 말게. 내가 체육관에 얼쩡거리는 게 불편한 거라면 지금 당장 사라져주겠네.”
“형님! 대체 왜 이러십니까? 제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사라지면 어디로 가시게요? 어디! 주금산에라도 가시겠다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이제 주금산은 물 건너갔고, 남주리 총무 숙소가 있지 않으냐.”
“뭐라고요? 남 총무 숙소로 가시겠다고요?”
“왜, 뭐가 잘못되기라도 한 것이냐?”
“잘못됐죠. 아무리 불자라고 해도 남 총무님은 여자고, 형님은 남자 아닙니까?”
“아니, 남 총무는 할망구고, 나는 할아버지야. 그리고 미안하게도 내가 땡추 소리 듣는 건 막걸리와 고기를 즐겨서이지 여자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
“형님…….”
“만약 내가 여자를 여자로 보는 땡추였다면, 그 긴 세월은 인공사 한 움막에서 남 총무와 어찌 함께 살았겠느냐.”
“죄송합니다, 형님.”
“아니! 자네는 아직 나한테 미안함을 느끼지 않아.”
“형님, 그건 또 무슨…….”
“정말 미안하다면 그만 털어놔 보거라.”
“털어놓다니, 뭘요?”
“네 녀석이 지금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 털어놔 보란 말이다.”
“형님! 수작이라뇨? 저 그런 거 없습니다.”
“펄쩍 뛰는 걸 보니, 내 생각이 더 확실해지는구나.”
점점 고조되는 인공의 근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