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99
99화
공부도 하던 사람이 한다고, 도서관에서 본 조광연은 학구열에 불타고 있는 멋진 모습이었다.
검도 체육관으로 돌아온 용하는 벽에 걸린 도복과 죽도를 훑어보며 잠깐 추억에 잠겼다.
“역시 공부한 사람은 도서관이 어울리고, 운동한 사람은 체육관이 어울리는 거지.”
그동안 나름 열정을 가지고 주말마다 도서관에 갔던 게 민망했다.
“이제 남은 건 조 박사에게 맡기고 수련에 매진하자.”
수련에 매진하고자 다짐하는 이유는 조바심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손에 닿을 듯 가까워진 그 날을 향해 달려가는 시곗바늘은 여느 때보다 훨씬 느릴 뿐 아니라 지루하기까지 했다.
인공에게도 미안함이 없지 않았지만, 따로 사과할 생각은 없었다. 이유는 의형제로서 서로 공동체라는 의식에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장설이 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용하는 숙연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형님, 그동안 엉덩이에 뿔이 나서 경거망동하는 아우를 지켜보며 잘 견뎌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근심하는 일 없도록 제가 잘하겠습니다.’
가끔 야단을 치고는 했지만, 묵묵히 곁에서 도와준 인공을 생각하니 왈칵 울음이 차올랐다.
다음 날 오전 수련부터 용하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런 용하를 지켜보던 인공은 생각했다.
‘이상하네. 오늘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일을 척척 해내네, 그려.’
달라진 용하를 보며 신통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인공뿐 아니었다.
대치동 관장의 눈에도 용하의 달라진 모습이 두드러져 보였다.
‘심경에 무슨 변화라도 생긴 걸까? 관장님의 움직임이 놀랍도록 민첩해졌어.’
인공과 대치동 관장, 다들 고수여서였을까? 보는 눈이 똑같았다.
劍의 끝으로 氣를 전하는 용하의 눈빛에서 그의 집중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수련이 끝나자, 인공은 용하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수고하셨소, 김 관장.”
“사범님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인공은 대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극복해 주어서 고맙소.”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녁 시간 비었으면 나와 탁배기 한잔하는 건 어떻겠소?”
“탁배기요? 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용하는 인공의 말투를 흉내까지 내가며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날 저녁, 용하와 인공은 음식점 대신 남 총무의 숙소로 향했다.
인공의 손에는 안줏거리로 먹을 고깃덩어리가 든 봉투가 들려 있었고, 용하의 손에는 얼핏 무게감이 느껴지는 봉투가 들려 있었다.
“겨우 다섯 병이 뭐야, 다섯 병이! 그거 가지고 어디 회포가 풀리겠어?”
“몇 병 더 사서 갈까요?”
“그럴 거면서 왜 고집을 부렸어? 아까 마트에서 한꺼번에 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니죠. 여기까지 그 무거운 걸 들고 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다섯 병도 무거운데.”
“남 총무 숙소 근처에 작은 편의점이 있거든. 거기 가서 대여섯 병 더 사서 들어가자고.”
“네, 형님.”
용하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넙죽 받아들이자 인공은 혀를 끌끌 차며 구시렁거렸다.
“사람 말을 귓등으로 듣더니, 결국 비싼 데서 사게 만들고 지랄이야, 지랄이.”
“아네, 동생이 죽일 죄를 지었습니다. 형님.”
“아, 어서 가서 막걸리 사 들고 기다려. 나이 든 늙은이 편의점 앞에서 궁상떨게 하지 말고.”
인공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용하는 편의점을 향해 줄달음치며 외쳤다.
“형님, 그럼 천천히 오십시오. 제가 먼저 가서 탁배기 사 들고 형님 걸음에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돌이켜보면 항상 대립과 파당을 일삼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지금처럼 흐뭇하게 호흡이 맞는다는 것엔 다른 이유가 없었다.
이제 막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남 총무의 숙소인 오피스텔 복도를 걷는 용하와 인공.
“형님, 약주 드시는 건 좋은데, 절대 실수하시면 안 됩니다.”
용하가 낮은 목소리로 말해서인지 인공도 속삭이듯 말을 되받았다.
“실수? 그게 다 무슨 소리야? 어떤 이유로 네 녀석이 그런 걸 다 걱정하는 것이냐?”
“다름이 아니라, 혹시라도 남 총무님이 전생을 기억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내가 그런 실수를 할 것 같으냐?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우리보다 남 총무에게 더 큰 불행일 게야.”
아, 역시 인공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괜한 염려를 했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때였다.
―쉿!
인공이 걸음을 멈추고 주의시켰다.
용하는 입 모양으로 물었다.
“왜요?”
인공이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남 총무의 숙소 앞이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이번에도 입 모양이었다.
인공은 됐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 보이는가 싶더니 곧 휴대전화를 꺼냈다.
“뭐 하시게요?”
이번에도 입 모양으로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인공은 별다른 대답 없이 전화를 걸었다.
―띠링띠링띠링!
어디에선가 들릴 듯 말 듯 한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어디에선가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왔으면 들어올 것이지 웬 전화질이에요, 전화질이!”
전화기 속에서 들려오는 건지, 오피스텔에서 새 나오는 건지 모를 남 총무의 성화가 복도에 난무했다.
용하의 시선이 빠르게 오피스텔 문을 향했고, 그제야 내막을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문 좀 열어주시오.”
흔한 말이었지만 어색했다. 왜 인공이 이런 어설픈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제집 드나들 듯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려니 왠지 꼭지가 당겼겠지.’
용하는 헛기침으로 위장하며 모르는 체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문이 열렸고, 남 총무는 평소처럼 안부를 물었다.
“밥은 먹었어요?”
눈길도 주지 않는 게, 안부라고 하기엔 퉁명스러웠다. 하지만 곧 용하에게 시선을 건넸다.
“어머나, 관장님도 오셨어요? 진작 전화라도 좀 주시지 그러셨어요.”
갑자기 달라진 목소리에 용하는 물론 인공도 어리둥절했다.
“남 총무님. 고기 구워서 다 같이 막걸리 한잔하려고 왔는데, 괜찮을까요?”
용하는 인공의 손에 들린 고기 봉지를 빼앗다시피 해서 남 총무에게 건넸다.
“그럼요, 괜찮고 말고요. 관장님께서 함께 오시는 줄 알았으면 제가 마트에 다녀왔어야 할 판인데. 이렇게 친절하게 고기에 막걸리까지 사 오셨는데 구워드리는 것도 못 한다는 건 도리가 아니죠.”
인공은 입을 삐죽 내밀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용하는 수차례나 예를 갖추며 따라 들어갔다.
처음 와보는 곳이었지만 남의 집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진작 찾아뵀어야 했는데, 제가 너무 무심했습니다.”
“관장님도 참, 별말씀을요. 임시로 얻은 거라 아무도 초대하지 못했습니다. 머지않아 제대로 주거지를 마련해서 정식으로 집들이할게요.”
“불러만 주십시오. 제가 두루마리 휴지 사 들고 오겠습니다.”
“고작 두루마리 휴지예요? 돈도 많으시면서.”
“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요.”
“헉, 정말이죠? 약속하는 겁니다.”
분위기 맞추려고 한 말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이 되어버렸다.
가운데 불판을 놓고 둘러앉으니 학창 시절 MT 갔을 때가 떠오를 만큼 괜찮은 분위기였다.
“형님, 한잔 받으세요.”
“좋지! 그런데 잔이 종이컵이 뭐야, 종이컵이. 남 총무님! 집에 그릇 좀 있습니까? 국그릇.”
“어이구! 사람 사는 집에 국그릇이 없을까 봐. 아무튼 사발에 따라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그 술버릇은 어디를 가나 여전하시오.”
남 총무는 싱크대 쪽으로 종종걸음치며 용하에게 물었다.
“관장님도 사발에다 드실 거예요?”
“아닙니다. 저는 종이컵이 취향입니다.”
“그래요? 저하고 코드가 맞네요. 그럼 사범님 혼자 사발로 드시고, 고주망태기가 되든 말든 내버려 두고 우리는 종이컵으로 오붓하게 마십시다.”
그리고 그날의 분위기는 향수를 불러일으킬 또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늦은 시각.
채 막걸리 두 병도 안 마신 남 총무는 고주망태가 되었다. 반면 인공은 거의 여덟 병이나 마시고도 아직 술이 부족했던지, 빈 병들을 만지작거렸다.
“형님! 내일 수련 지도를 하셔야 하니, 오늘은 이만 주무십시오.”
“왜, 벌써 일어나게?”
“형님도 참, 오늘만 날이 아니잖습니까? 주말에 체육관에서 거창하게 한판 벌이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알았어. 그만 일어나자고.”
두 사람은 노란색 가로등이 내려다보는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그만 들어가세요, 형님. 이러다 체육관까지 함께 가겠어요.”
“가면 좀 어떠냐?”
“네-에?”
“이제 자네와 갈등도 풀렸는데, 성질 더러운 할망구 성화를 더 들을 이유는 없지 않으냐?”
“체육관으로 돌아오시겠다는 말씀인가요?”
“한 가지만 더 말해 주면.”
“더 알고 싶은 게 있으세요?”
“그래, 이번에는 어떤 방법으로 무림으로 갈 생각인 게냐?”
인공의 물음에 용하는 입을 굳게 다문 채 한동안 걷기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형님, 혹시 바람찬을 기억하십니까?”
그 순간 인공의 시선이 빠르게 용하에게 흘렀다. 그리고는.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자네를 개방의 넘버3까지 끌어올려 주고, 우리가 21세기로 돌아올 수 있게 해준 서역의 신물 아닌가.”
“서역의 신물.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군요.”
“나는 말이다. 서역의 신물,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따로 있어.”
“혹시 장설 형님입니까?”
인공은 묵묵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요?”
일순 정적이 흘렀다.
지금 인공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이 선뜻 대답하기엔 망설여지는 그런 인물이란 말인가.
용하는 강한 호기심으로 인공을 직시했다. 인공 또한 묵묵히 용하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을 때였다. 용하의 두 눈이 가늘게 떨렸다. 그리고 마침내.
“혹시 소희라는 이름을 기억하시겠소?”
갑자기 울음이 차오르며 가슴이 짓눌렸다. 소희!
“아직도 소희 낭자를 기억하십니까?”
“그 이름 어찌 잊겠느냐?”
“…….”
“그 아이의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나를 괴롭히는구나.”
인공의 말에 공감이라도 하듯 용하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형님! 제가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궁금하시다고 했죠?”
인공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건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타임머신인가 뭔가 만들려다가 갑자기 로켓 발사체로 바꿨다며?”
“제가 거기까지 말씀드렸단 말입니까?”
“네 녀석 입도 썩 남자답지는 못한 게야.”
“아, 그러게 왜 자꾸 물어보셔서 사람을 가벼운 남자로 만드십니까?”
“또 내 탓을 하는 것이냐?”
“그럼 제 탓입니까?”
“알았다. 다 이 늙은이가 부족해서 전도유망한 네 녀석을 몹쓸 인간으로 만들었다.”
“알았으면 됐어요. 그런데 뭘 그렇게까지 자책하고 그러세요? 미안하게.”
어김없이 삼천포로 빠지고 마는 용하였다. 그런 용하를 바라보는 인공은 자기도 모르는 새 혀를 차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서역의 신물과 그동안 네 녀석이 하고 다닌 짓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서역의 신물과 비슷한 걸 만들었습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혓바닥을 느물거리면 목에 힘을 주는 것이냐?”
“네? 그럼 형님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어리석기는, 14세기 무림에서 바람찬을 만든다는 건 대단한 발상이며 기네스에 오를 만한 획기적인 추진력이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에서 바람찬을 만든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 아니더냐?”
“아니, 왜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거 몇 푼이나 한다고, 그냥 돈 주고 사면 되는 걸, 그 요란을 떨고 지랄을 떤 것이냐?”
그 순간 용하의 머릿속에 은은한 종소리가 들렸다. 마치 성탄절을 알리는 듯한.
아직 성탄절을 맞이하려면 한참 남았는데 말이다.
“뭘 그렇게 넋 놓고 서 있는 것이냐? 하나를 배웠으면 보답을 하는 게 사람의 도리라 생각한다. 자네는 어찌 생각해?”
“형님, 그게 무슨 말씀…….”
“아, 어서 가서 막걸리 사 오라고.”
“막걸리요? 그렇게 드시고 또 드시게요?”
“안주는 됐고, 편의점 가서 막걸리나 서너 병 사 와봐.”
“꼭 드셔야겠습니까?”
“이 사나이 인공, 한 입으로 두말할 리가 있겠느냐.”
“그럼 형님! 이건 어때요?”
“네 녀석 목소리로 보아하니, 무슨 거래할 게 생긴 모양이구나!”
“네, 정확히 맞추셨습니다.”
“어디 말해 보아라.”
“형님이 굳이 막걸리를 드시겠다면 저는 막걸리를 사러 편의점으로 달려갈 것이고…….”
“달려갈 것이고!”
인공은 흥미롭다는 듯 인공을 직시하며 그의 말에 추임새를 달았다.
“오늘은 그만 드시겠다고 약속한다면…….”
“약속한다면!”
“제가 이번에 만든 새로운 바람찬이 무엇인지 말하려고요.”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공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알았다. 오늘은 막걸리를 그만 마실 것이다.”
“정말이죠?”
“아, 그렇다니까!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겠느냐?”
“두고 보겠습니다. 정말 사나이가 맞는지.”
“군소리 말고 어서 말하거라.”
인공이 아무리 다짐하듯 말해도 용하는 그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 이 녀석이! 어서 말해 보라는 데도.”
용하의 입술이 그의 속내를 대변이라도 하듯 말을 할까 말까 꼼지락거렸다.
“끝내 말을 안 하겠다는 것이냐?”
“아닙니다. 지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
“그건 다름 아닌…….”
“…….”
“그건 다름 아닌, 바로! 시공간 이동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