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ne Deliver RAW novel - Chapter (105)
신들의 배달기사(105)
“마을이닷!”
“드디어 도착한 겁니닷!”
“하마터면 밖에서 잘 뻔한 것입니닷!”
늦은 밤.
해가 다 떨어지다 못해, 달님이 하늘 높이 걸리고 나서야 겨우 마을 앞에 도착한 하준은.
어느새 눈물을 뚝 그치고선 씩씩하게 애들과 어울리는 펠루스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혹시나 트라우마라도 걸리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천만다행이네.
“자, 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들, 오면서 내가 뭐라고 했지?”
“오늘 일은 전부 비밀이라고 한 겁니닷!”
“오르부스도, 펠루스도, 비르고도, 꽃밭에서만 재밌게 논 것입니닷!”
마을에 들어가기 앞서, 마지막으로 세 님프와 나눈 약속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빠딱빠딱 튀어나오는 대답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주억였다.
괜히 보육원에서 또 저들끼리 떠들다가 곰 얘기라도 원장 귀에 들어가게 되면.
철석같이 자신을 믿고 애들을 맡겨준 그녀를 볼 낯이 없어졌으니까.
앞으로 며칠이나 더 여기 묵어야 될지 모르는데.
계속 그렇게 찝찝한 상태로 지내야 하는 건 좀.
“음, 사나이들끼리의 약속이야. 셋 다 전부 지켜야 해, 알았지?”
“그야 물론인 것입니닷!”
“절대 절대 걱정 마는 겁니닷!
슈트의 힘을 빌려 맨손으로 곰을 잡아 던지는 모습을 본 덕일까.
그때 이후로 어째 보다 더 제 말을 잘 따르게 된 것 같은 녀석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하준은.
이내 이만하면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문지기들을 지나, 대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비르고는 사나이가 아닌 것입니닷?”
끼이익-
“다녀왔습니닷!”
“오늘 엄청 엄청 재밌었던 겁니닷!”
“또 나가서 놀고 싶은 겁니닷!”
지친 몸을 이끌고 보육원에 들어선 그는.
와아아 소리를 지르며 각자 방으로 향하는 애들을 뒤로한 채, 축 늘어진 몸을 벽에 기댔다.
그래도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놀이방에서 또 놀아달라는 소리는 안 하겠지?
“오르부스, 펠루스, 비르고! 돌아왔으면 우선 손하고 발부터 씻는 겁니닷!”
“앗! 원장님인 것입니닷!”
“원장님! 이거 보는 겁니닷! 오르부스가 네잎클로버를 가져온 것입니닷!”
곧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에 원장실에서 나온 마트리나를 마주한 하준은.
순식간에 애들한테 둘러싸여 조잘조잘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원장을 보고선, 새삼 대단하단 눈빛으로 그녀를 흘겼다.
여태 보니까 따로 직원도 없는 거 같던데.
매일 저렇게 혼자 녀석들을 돌보고 있었던 건가.
“하준 님,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닷. 덕분에 요즘 애들이 정말로 행복해하는 겁니닷.”
이내 아이들을 씻으라고 들여보내고 꾸벅 고개를 숙여오는 마트리나를 바라본 그는.
어딘가 못내 아쉬워 보이는 얼굴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기, 루시오는 돌아왔나요?”
그리곤 말없이 돌아온 미소에, 천천히 그녀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옮긴 하준은.
저 멀리 보육원 뒷마당에 봉긋하게 솟은 언덕을 보며, 복도를 지나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사박-
언덕 위.
그 끝에 조그맣게 세워진 비석 옆에 앉은 님프를 발견한 그는.
가만히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녀석을 향해 한 발짝 걸음을 떼었다.
“루시오.”
굳이 묻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만 같은 비석의 주인에, 조심스레 입을 연 하준은.
복잡한 눈으로 조용히 뒤를 돌아보는 루시오를 마주하곤, 어색하니 손을 들어 보였다.
“앗, 하준! 돌아왔습니깟? 먼저 와서 기다리다 목이 빠지는 줄 알았던 겁니닷!”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반가운 얼굴로 저를 반기는 녀석을 보며, 살며시 그 앞에 선 하준은.
잠시 무어라 얘기를 해야 할지 머리를 긁적이다, 비석 앞에 가지런히 놓인 꽃을 보고선 입을 떼었다.
“이건…….”
도대체 언제 올려놓았던 건지 말라비틀어진 줄기와 노란 꽃봉오리.
그러면서도 자못 익숙한 자태에 나지막이 침음을 흘린 그는, 곧 옆에서 씁쓸한 미소와 함께 말을 잇는 루시오를 돌아보았다.
“아, 이거 말입니깟? 엄마가 좋아하던 꽃이라고 들었습니닷.”
벌써 몇 년 전.
마지막으로 마을을 찾았을 때 어렵사리 구했던 꽃을 내려다본 님프는.
새로 갈고 싶어도 워낙에 희귀한 터라,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녀석을 보고선 안타까운 눈빛으로 마른 줄기를 훑었다.
그나마 부스러지지도 썩지도 않고 형태나마 유지하고 있는 건, 아마 마트리나가 정성스레 관리해주고 있는 거겠지.
“루시오는 모르지만, 생전에 진짜 진짜 유명한 님프셨다던 모양입니닷. 막, 엄마 때문에 제우스 님이 직접 마을에 들르기도 하셨다고 그랬습니닷.”
이윽고 어릴 때부터 밥 먹듯이 들어왔던 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터놓은 루시오는.
마을의 어른들은 물론,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 대부분의 교수님들조차 저를 보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족이냐 물어왔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던 그녀의 존재감을 떠올렸다.
“정말 정말 대단한 님프였는데, 몸이 많이 약하셨다던 모양입니닷. 그런데 루시오를 낳고 나서, 건강이 더 안 좋아졌다고 했습니닷.”
비록 자신은 그녀의 얼굴 한번 본 기억이 없었지만.
누군가 어머니를 알고 있던 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매번 영문 모를 눈초리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불쌍함, 안타까움, 그리고 막연한 기대.
“어쩌면, 루시오만 없었다면, 마을이 좀 더 커졌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닷. 이따금 좋은 님프를 데려가기 위해, 대학이나 그 고향에 기부를 하는 신님들도 계신다고 했으니깟.”
가끔은 생판 모르는 남으로부터 원망 어린 시선이 날아와 꽂힐 때도 있었다.
그렇기에 한때는 저를 낳고 죽은 어머니를 잠시나마 원망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래서 루시오는 엘리트 님프가 되기로 한 겁니닷. 다른 님프들하고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 엄청 유명해져서, 무척이나 대단한 신님 아래로 들어가고 싶었던 것입니닷. 도랑물에도, 시냇물에도, 개울물에도, 저 넓은 바다에도. 루시오라는 이름을 모르는 님프가 아무도 없게끔 말입니닷!”
이제는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은 모두 털어낸 지 오래였다.
다만 바라는 게 있다면 더 이상 남들에게 그녀의 자식이 아닌, 저라는 님프 자체로 기억에 남고 싶다는 것.
그러기 위해 지난 이십여 년간을 죽어라 달려온 거였다.
유능하고 더 유능해져서, 제 어머니가 못다 이룬 꿈도 대신 이루어드리고. 또 미련처럼 남은 이들의 기억을 풀어주기 위해.
“……너, 그런 꿈이 있으면서 이렇게 나랑 있어도 되는 거야?”
가만히 루시오의 옆에 앉아 얘기를 듣고 있던 하준은.
당찬 포부에 꽤나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녀석을 흘겼다.
어쩐지 처음 오두막에서 헤파이스토스의 소개로 만났을 때.
그가 아닌 저를 도와야 한단 이야기에, 그 자리에서 억장이 무너져 내리더니만.
그런 이유가 있었던 건가.
‘이렇게 된 이상 지금이라도 따로…….’
“그게 아닙니닷.”
이내 복잡한 심정으로 루시오를 바라보며, 녀석의 꿈을 위해서라도 헤파이스토스에게 부탁해 이만 놓아줘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지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며 지그시 고개를 젓는 님프를 마주한 그는.
곧 살포시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잇는 녀석을 보고는, 멍하니 입을 다물었다.
“그런 꿈이 있으니깟, 계속 하준 곁에 있고 싶은 겁니닷.”
또랑또랑하게 저를 쳐다보는 맑은 하늘색 눈동자.
뒤이어 흙 묻은 바지를 탁탁 털고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루시오를 올려다본 하준은.
금방 장난스러운 미소과 함께 슬그머니 돌아서는 님프를 보곤, 조용히 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유명한 신님을 모시는 것보단, 하준같이 평범한 인간이 엄청 엄청 대단한 영웅이 되기까지 함께하는 게 더 멋지지 않겠습니깟?”
짜식.
그냥 정들었다고 하면 될 것이지, 괜히 부끄러워하기는.
“자.”
마찬가지로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 그는.
망가지지 않게 잘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무언가를 꺼내며, 루시오에게 건네주었다.
“하, 하준? 이건…….”
“애들 보면서도 생각보다 시간이 좀 남더라고.”
달맞이꽃.
펠루스가 있던 동굴에서 조심스레 캐 온 노란 꽃을 녀석의 손에 쥐여 준 하준은.
제 부탁을 잊은 건지, 아니면 정말로 구해 올 줄은 몰랐던 건지.
놀란 얼굴로 꽃과 자신을 번갈아 보는 님프를 보고선, 비석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뭐 해? 빨리 갈아주지 않고. 저 말라비틀어진 것 좀 봐라. 꽃 좋아하는 사람이 보면 이게 무슨 학대냐고 노발대발하겠구만.”
그의 말마따나 용케 썩지 않고 버텨준 녀석을 조심스레 치우곤, 새로이 달맞이꽃을 비석 앞에 올린 루시오는.
이내 살며시 눈을 감곤 기도를 올리며, 천천히 하준을 돌아보았다.
“……고마운 겁니닷.”
“고맙긴 뭘.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배달 한 건 뛴 건데.”
감사는 됐다는 듯 휘휘 손을 내저은 하준은.
대신 여태 궁금했던 이야기 하나를 떠올리며, 나지막이 말을 물었다.
“근데 왜 하필 저 꽃이었던 거야? 혼자 밤에 피는 게 특이해서?”
생긴 것만 보면 그보다 예쁘고 화려한 꽃들이 꽃밭에 널려 있었건만.
혹시 꽃말에 뭔가 의미가 있는 건가.
“그런 건 아니고, 달맞이꽃엔 따로 설화가 있는 것입니닷.”
“설화?”
“그렇습니닷. 그러니까…….”
설화.
이어진 답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던 하준은.
개중 마음에 걸리는 얘기를 딱 듣고선, 설마 하는 눈빛으로 루시오를 바라보았다.
옛날 옛적, 별을 사랑하는 님프들 중에 유독 혼자서만 달을 사랑했다던 특이한 님프.
세상의 별이 모두 없어지면 매일매일 달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에, 화가 난 제우스로부터 천벌을 받았다던 그녀와.
훗날 자신이 너무 심했음을 깨닫곤, 그 님프의 영혼을 달맞이꽃으로 환생시켜 주었다는 이야기.
“아닙니닷. 그냥 엄마가 좋아하던 꽃이라고 해서 올려드리고 있는 것뿐입니닷.”
그에 무슨 오해를 하냐는 듯, 붕붕 고개를 저은 루시오는.
별로 그렇게 대단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었다며, 머쓱하니 머리를 긁적였다.
“게다가, 마침 꽃말도 마음에 들었고 말입니닷.”
저벅-
“갑시닷.”
이윽고 비석을 뒤로한 채 돌아선 루시오는.
지난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자료실을 뒤적이느라 쌓인 피로감에 기지개를 켜며, 빠르게 언덕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뭐? 아니, 잠깐. 그래서 그 꽃말이 대체 뭔데?”
그러고는 진짜로 그냥 보육원까지 내려가는 녀석을 따라, 황급히 뒤에 따라붙은 하준은.
잔뜩 궁금하게 해놓고선 말도 안 해주고 튀는 님프를 불만 어린 눈초리로 슥 흘겼다.
“까먹었습니닷. 궁금하면 하준이 알아서 찾아보는 겁니닷.”
그 모습에 피식하곤 웃음을 터트린 루시오는.
일부러 모르쇠로 고개를 돌리며, 마을을 빠져나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