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ne Deliver RAW novel - Chapter (114)
신들의 배달기사(114)
“……악마.”
촉수들에게 둘러싸여 눈앞의 인어를 마주한 하준은.
여유로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는 녀석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주룩 흘렸다.
“악마? 지금 악마라고 했습니깟?”
“……그렇다네. 이름은 베파르라는 모양이야.”
“베, 베파르? 부패의 악마, 베파르 말입니깟!”
“뭐야, 루시오. 누군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
자그맣게 읊조린 말에 덩달아 놀란 루시오를 돌아본 하준은.
제법 유명한 놈인지 말하지도 않은 이명을 대는 님프를 보고선,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녀석이 알아본다는 건, 어딘가엔 이름이 적혀 있는 악마란 뜻이고.
하물며 저리 목소리가 커지는 건, 그게 어디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란 얘기였으니까.
“……칠죄종이 부리는 괴물 중에 어떤 놈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악마 베파르라고 하면 들어본 적이 있는 겁니닷. 왜냐면 그 유명한 그리무아르, 레메게톤에도 나오는 녀석이니까 말입니닷.”
“레메게톤?”
하준의 물음에 가만히 고개를 주억인 루시오는.
대학 시절, 학과 자료실에서 홀로 책장을 뒤적이다 우연히 발견한 금서를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왕, 솔로몬이 기술했다 알려진 마도서.
솔로몬의 작은 열쇠, 레메게톤.
그리고 그 레메게톤에 등장하는 72명의 강대한 악마 중 하나.
“제42위계. 바다와 부패의 악마 베파르.”
“뭐? 42위계? 그 정도면 할 만한…….”
철퍽-
돌아온 답에 42위라는 낮은 등수를 보며 의외라는 듯 눈을 끔뻑인 하준은.
그 순간 저들을 향해 내려온 손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 촉수들을 보고선, 황급히 퀴네에를 향해 손을 올렸다.
“아, 알베르토 씨, 그…….”
그리곤 평소처럼 곧바로 퀴네에의 능력을 발동시키려던 찰나.
그는 제 옆에 대검을 빼 들고 선 알베르토를 발견하곤, 우물쭈물 손을 멈추었다.
이대로 그냥 기척을 숨기고 자리를 빠져나갔다간, 저쪽한테 모두 타깃이 쏠려버릴 텐데.
“흡!”
콰가가각-
하나 고민도 잠시.
짧은 기합과 함께 가볍게 휘두른 대검 한 방에 우수수 썰려나가는 촉수들을 본 하준은.
괜한 걱정을 내려놓곤 곧장 퀴네에를 사용해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뭣? 큭!”
부웅-
동시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알베르토가 조금 전까지 자신이 있던 자리를 돌아보곤, 당황한 듯 탄성을 내뱉었지만.
아랑곳 않고 조심조심 포위망을 빠져나왔다.
졸지에 혼자서 저 많은 촉수들을 감당하게 된 그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기껏해야 3분밖에 전력을 낼 수 없는 제 입장에선, 그 귀한 시간을 고작 촉수들한테 낭비할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더구나 상대가 촉수들뿐이라면 얼추 버틸 만해 보이기도 하고.
“헤, 제법 신기한 장비를 가지고 있네.”
그에 갑자기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하준과 루시오를 보며 나지막이 감탄을 흘린 베파르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흘기곤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과연, 애들이 애를 먹을 만해.”
당장 눈에 보이는 모습뿐만이 아닌, 제 기감으로도 둘 다 통 어디 있는지 모를 만큼 기척까지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이것만 해도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닐 텐데, 거기에 그 크라켄을 잡을 정도의 한 방까지 갖췄으니.
기껏 미노타우로스에게 기생한 녀석이나, 덩치만 키운 촉수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져나간 것도 이해가 갔다.
스르륵-
이윽고 조용히 손을 들어 올린 악마의 위로, 꾸물거리는 촉수들이 마치 벽을 이루듯 그녀를 감쌌다.
자그마한 틈새로 잠시 허공을 살핀 베파르는.
우선 찾을 수 없는 하준과 루시오를 제쳐두곤, 홀로 파도처럼 밀려드는 촉수들을 상대로 분전하고 있는 기사를 돌아봤다.
“루시오!”
그러는 사이.
질척이는 촉수들을 밟고서 포위망을 빠져나온 하준은.
조금 전, 땅이 갈라지며 무너져 내린 성벽 위에 올라 루시오를 찾았다.
“아까 그 얘기, 좀 더 자세히 해줄 수 있어?”
“그 얘기라니, 베파르 말입니깟?”
“응. 그 레메게톤인가 뭔가에 무슨 약점이라든가 그런 건 없었어? 이를테면 인어니까 크라켄처럼 전기에 약하다든가. 아니면 그때 세이렌들처럼…….”
그리곤 곧장 베파르에 대해 물은 그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 미리 상점을 열어놓고선, 문득 머리를 스치는 기억에 눈을 번뜩였다.
그러고 보니 손에 달린 물갈퀴가 좀 요상하긴 해도, 같은 인어라면…….
“……혹시 이아손 님 때처럼 황금 빗으로 어떻게 해볼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을 겁니닷. 베파르는 어디까지나 인어를 닮은 모습으로 출현하는 악마지, 인어가 아니니깟.”
그에 어딘가 달라진 눈빛을 보며 하준의 꿍꿍이를 눈치챈 루시오는.
레메게톤에 적혀 있던 내용을 떠올리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눈에 보이는 형상이 인어라 한들, 악마는 악마.
그 본질은 한낱 암초 위에 걸터앉아 지나가는 선원들이나 낚아 먹는 녀석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애당초 그 모습 또한 인어가 아닌, 평범한 미녀로 나타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고 말이다.
“그리고 크라켄을 쓰러트렸을 때처럼 제우스 님의 번개를 가져오는 것도 안 되는 겁니닷! 그렇게 강력한 신기를 여기서 터트렸다가 요르문간드가 몸부림치기라도 하면, 하준도 루시오도 전부 치이익 하고 녹아내릴 테니깟.”
덧붙여 바로 뒤편에 쩍 갈라진 바닥을 가리킨 님프는.
그 아래 부글부글 끓으며 두꺼운 지층을 야금야금 녹여가고 있을 누런 위액을 기억하고선,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강대한 티탄들도 버티지 못한 제우스의 번개만 있다면야, 제대로 맞힐 수만 있다는 가정하에 베파르고 뭐고 흔적도 없이 태워버릴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런 짓을 벌였다간 사방으로 튀는 전기에, 요르문간드 또한 필히 반응하곤 속이 뒤집어지게 될 터.
“으음, 그러면 어떻게 해야…….”
뒤이은 답에 난감한 얼굴로 입술을 저민 하준은.
지금 이 순간에도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는 알베르토를 내려다보며 상점을 슥 훑었다.
마침 아틀란티스에서 받은 보물로 허공에 물도 쏟아낼 수 있겠다, 적당히 흠뻑 적셔버리곤 아스트라페로 다 지져버리면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된 이상 좀 더 얌전한 놈으로 찾아야…….
콰아아아앙-!
그러나 근심도 잠시.
거대한 폭음에 흠칫 고개를 들어 올린 그는.
어느새 촉수들의 사체로 쌓아 올린 조그마한 언덕 위에서, 덩어리진 녀석을 상대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기사를 보며 가만히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젠장. 루시오! 일단 여기서 계속 고민 좀 하고 있어 봐! 혹시 약점이나 놈한테 쓸 만한 신기가 생각나면 와서 귀띔해주고!”
“자, 잠…… 하준! 그냥 그렇게 말하고 가면 어떡하란 겁니깟! 루시오는 그 상점이란 곳에 어떤 어떤 신기가 있는지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닷!”
황급히 루시오를 두고 자리를 박찬 하준은.
슈트의 능력을 발동시키며 몽둥이를 꾹 쥐었다.
가능한 한 알베르토가 버티는 사이에, 방법을 찾아 베파르를 노리려 했건만.
돌아가는 꼴을 보니 그냥 촉수들은 몰라도, 악마를 상대로는 역시 역부족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몇 분 정도는 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치이이익-
촉수 두셋을 꼬아 둔기처럼 내려친 일격을 막아선 대검 위로, 불길한 소리와 동시에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뚝- 뚝-
붉은 안개.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베파르를 둘러싸고 있는 촉수들한테서만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무언가가 수증기처럼 응어리져 떨어져 내릴 때마다.
지독한 악취와 함께 바닥과 대검의 날을 부식시키고 있었다.
‘……부패의 악마.’
“큿! 하준 씨! 도대체 어딜 가신 겁니까!”
그에 주문 내용에도 떠올라 있던 베파르의 이명을 떠올린 하준은.
다급히 저를 찾는 목소리에 악마의 뒤를 잡고선, 있는 힘껏 몽둥이를 휘둘렀다.
“흐읍!”
쩌어어억-!
이윽고 몇 겹으로 둘러싸였는지 모를 촉수 한편이 움푹 찌그러지며, 흡사 배트에 맞은 야구공처럼 저 멀리 쏘아졌다.
“무, 무슨……. 하준 씨? 거기 계시는 겁니까?”
난데없이 저와 힘을 겨루고 있던 덩어리가 눈앞에서 혼자 날아가는 광경을 마주한 알베르토는.
당황한 눈빛으로 조금 전 찌그러진 부분 근처를 둘러보며, 조심스레 하준을 찾았다.
툭-
“앗 차가!”
치이이익-
그리곤 순간 손등 위로 떨어진 물에 놀라, 흠칫 몸을 뺀 그는.
무언가 식는 소리와 함께, 방금까지만 해도 날을 부식시키던 이물질을 씻어 내리는 물을 보고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알베르토 씨. 혹시 저 촉수, 어떻게든 한쪽에라도 틈 좀 만들어볼 수 있겠어요?”
“예? 아니, 그보다 지금까지 도대체 어디서…….”
“틈, 만들 수 있겠어요?”
그러건 말건.
저 멀리 베파르가 날아간 곳을 흘긴 하준은.
아까 그 한 방에 찌르르 떨림이 멈추지 않는 손을 보고선, 잠깐 헬멧을 들추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분명 막 알베르토와 힘 대결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에 정확히 옆구리를 때렸건만, 손맛이 영 좋지 않았다.
마치 단단하고 탄력 있는 벽을 때려, 제 쪽이 튕겨 나온 듯한 느낌이랄까.
“……무슨 틈을 말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저 촉수를 비집고 열어달란 얘기라면 혼자선 무리예요.”
하준의 물음에 조용히 답을 마친 알베르토는.
이미 한참 상해버린 날과, 아직도 덜덜 떨리는 팔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분하지만 혼자서는 오래 버티는 것조차 불가능한 적이었다.
방금 고작 촉수 두어 개를 십여 초간 상대한 것만으로도 이 정돈데, 거기서 녀석이 한두 개라도 더 꺼내 들었다간…….
“무리……. 그럼 아래 이놈들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돌아온 답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인 하준은.
꾸물꾸물 사체 위로 기어오르고 있는 촉수들을 보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
가능하면 이건 될 때까지 아끼고 싶었지만, 그러다 써보지도 못하고 죽기라도 하면 말짱 꽝이니까.
“자, 잠깐만요! 설마 녀석을 혼자 상대하실 생각입니까? 차라리 같이…….”
“아뇨. 괜찮아요.”
이윽고 경악한 얼굴로 저를 말리는 알베르토를 보고선 지그시 고개를 저은 하준은.
주섬주섬 스마트폰을 꺼내 들며, 걱정 말라는 듯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딱히, 혼자는 아니니까.”
손에 쥔 스마트폰 뒤쪽.
케이스 안, 두꺼운 털이 어둠 속에서 황금색으로 번쩍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