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ne Deliver RAW novel - Chapter (15)
신들의 배달기사(15)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놀라고 그래. 말하는 원숭이 처음 봐?”
말하는 원숭이.
그 능글맞은 반응에 뻘쭘하니 삿대질하던 손가락을 내린 하준은, 혹시 몰라 자세를 낮춘 그대로 주변을 살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저기. 혹시 콜 부르신 분 맞나요?”
신이라기엔 생긴 것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뭔가 다 장난스럽게 느껴져서 긴가민가했다.
하다못해 지금은 옆집 아저씨처럼 느껴지는 헤파이스토스조차, 처음 마주쳤을 때는 위압감에 온몸이 떨릴 정도였건만.
원숭이라 그런가, 아니면 행색이 바위 밑에 깔려 있어서 그런가.
위엄이라곤 하나도 없이 그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콜? 아, 도움 말이야? 맞아! 내가 불렀어. 오늘 아침에 웬 날개 달린 모자를 쓴 꼬마가 지나가면서 얘기해주더라고. 간절히 바라면, 누군가 꼭 내 부탁을 들어주러 올 거라고!”
하준은 머리만 빼꼼 나와 있는 상황에서도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말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기가 불렀다는 걸 보면 이쪽이 맞는 거 같긴 한데.
‘그런데 날개 달린 모자를 쓴 꼬마라니. 설마 헤르메스를 말하는 건가?’
헤르메스.
하준은 원숭이의 말에 문득 누군가를 떠올리며 나지막이 침음을 삼켰다.
헤파이스토스와 같은 올림포스의 12 주신 중 한 명이자, 전령의 신.
그는 최근 그리스 신화의 신들로부터 자주 콜이 들어오는 것 때문에 따로 인터넷을 통해 조사해뒀던 내용을 상기하며, 짧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러고 보니 헤베도 그때 헤르메스가 어쩌고 했던 거 같은데.’
역시 제가 신들의 배달을 맡게 된 건 헤르메스와 관련이 있는 걸까.
하지만 왜 하필 자신을…
“원래는 그 꼬마보고 도와 달라 할 생각이었는데, 무언가 바쁜 일이 있었던 모양이야. 매정하게도 쌩하고 사라져버렸지 뭐야?”
고민도 잠시.
계속되는 얘기에 정신을 차린 하준은, 잡념을 털어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유야 어쨌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덕분에 지난 며칠 동안만 해도, 평생 못 쥐어봤을 소득을 올릴 수 있었는데.
물론 그중 대부분은 슈트 값에 써먹어 버리긴 했지만, 그거야 금방 다시 벌면 되는 거고.
“아무튼. 괜찮으면 이 근처에서 뭐 하나만 구해다 줬으면 하는데.”
“아, 네! 물론이죠. 맡겨만 주세요, 고객님!”
이윽고 아래에서 은근하게 올려다보는 눈빛에,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애당초 그러려고 굳이 던전까지 들어온 거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헌데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하준은 말하는 원숭이라고 하니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 한 그의 정체에,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우물거렸다.
“미후왕(美猴王), 투전승불(鬪戰勝佛). 편한 대로 아무렇게나 불러. 이왕이면 제천대성(齊天大聖)이라고 불러주면 더 좋고.”
뒤이어 어색하니 줄어든 뒷말에, 대충 눈치를 챈 원숭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천대성.
설화 서유기의 주인공이자, 용궁과 저승 그리고 천계에서까지 난동을 부린 희대의 악동이며.
끝내 삼장법사를 따라 서천으로 가는 고행길에 올라, 부처가 된 돌원숭이.
“…제천대성? 아! 손오공!”
그제야 그의 정체를 눈치챈 하준은, 놀란 듯 눈을 깜빡이며 나지막이 감탄을 터트렸다.
이 바위에 깔려서 아무것도 못 하는 원숭이가, 바로 그 손오공이었다니.
“오, 내가 누군지 아는 거야?”
“그럼요! 만화로 유명하시잖아요.”
“…만화?”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날아다닌다던가, 손에서 파란색 빔 같은 걸 모아서 쏜다던가.
그는 한때 재미있게 봤던 만화들을 떠올리며 눈을 반짝였다.
“그런데 왜 이런데 깔려계시는 거예요?”
헌데 그렇게 유명한 손오공이 어째서 이러고 있는 걸까.
하준은 문득 떠오른 궁금증에,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굳이 만화가 아니더라도 여태껏 만나본 신들과 별 다를 바 없을 인물이, 무엇 때문에 던전 안에서 요런 꼴을 당하고 있단 말인가.
“이거? 벌이야, 벌. 옥황상제 그 늙은이, 완전 좀생이라니까? 거 일하다 보면 복숭아 좀 몇 개 따먹을 수도 있는 거지. 과일이 잘 익었는지 보려면 당연히 먹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에 손오공은 손가락으로 구름 위를 가리키며, 잔뜩 불만 섞인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물론 그 복숭아라는 게 평범한 복숭아가 아닌, 무려 익는 데만 9000년이 걸린다는 귀하디귀한 천도복숭아였지만 말이다.
“하하… 여튼, 제가 뭘 구해다 드리면 될까요?”
이후, 마치 동의를 구하듯 조용히 저를 바라보는 그를 보며.
하준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
아무리 맞장구만 치는 일이라 한들, 실제로 신이 존재하는데 뒷담을 까기에는 천벌이 두려웠으니까.
“아, 맞다! 원래 그 얘기 중이었지? 별건 아니고, 이 뒤편으로 쭉 가다 보면 커다란 고물 같은 게 하나 있을 거야. 거기서 상자 좀 꺼내다 줄래?”
“커다란 고물이요?”
“그래, 고물.”
고물이라.
무슨 고철폐기장이라도 있는 건가.
하준은 내비 위로 새로이 찍히는 목적지를 보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15km라. 그렇게 멀진 않네. 그럼 금방 다녀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언덕이라 중간중간 초목이 우거져 있어서 속도가 나진 않긴 해도, 왕복 30km 정도면 그 상자라는 걸 찾는 데까지 한 시간이면 돌아올 수 있을 터.
“아. 저기, 제천대성님. 괜찮으면 출발하기 전에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뭔데? 아무거나 물어봐!”
곧장 스쿠터에 올라탄 그는, 아까부터 속으로 궁금해했던 얘기를 꺼내며 시동을 걸었다.
“혹시, 진짜로 보름달 보면 막 원숭이로 변하고 그러나요?”
이내 별생각 없이 내뱉은 질문에 멍하니 눈을 꿈뻑인 오공은, 천천히 제 얼굴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지금 내가 뭐로 보여?”
“아.”
이미 원숭이구나.
* * *
“저게, 화과산의 보스…”
언덕 위.
아름드리 커다란 나무들이 우거진 장소 가운데, 이상하리만치 탁 트여 있는 공터.
입구를 통제하고 저들끼리만 던전 안으로 들어선 흑룡의 길드원들은, 공터 구석에 가만히 웅크려 있는 무언가를 보고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길드장님, 이제 와서 이런 말씀 드리기도 뭐하지만. 저거, 정말로 잡을 수 있는 겁니까?”
척 보기에도 거대한 사이즈.
겉으로는 그저 쓸데없이 덩치만 큰 녹슨 고철로만 보일지 몰라도, 녀석은 한때 그 ‘영원’조차 공략을 포기하고 물러났을 만큼 강력한 보스몬스터였다.
팔괘로.
단순히 강함으로 치자면 제우스나 오딘 같은 각 신화의 주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손오공, 자그마치 그 제천대성을 불태워 죽일 뻔했던 천계의 비밀병기.
비록 실제로는 서유기 속 그 전승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괴물 같은 난이도를 자랑하는 녀석이었다.
“후후. 걱정하지 마세요. 다 방법이 있으니깐.”
한주아.
흑룡의 길드장이자 랭킹 60위에 달하는 신화 계열의 헌터.
그녀는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제 쪽을 돌아보는 팀장들을 보고선, 새카만 깃털을 모아서 만든 부채인 흑우선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여유로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운이 좋았어. 설마 영원이 그렇게 원정에 실패하고, 하도윤까지 구설수에 오를 줄이야.’
아직 ‘영원’이 대한민국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긴 했지만, 최근 반년 가까이 타르타로스 공략에 연달아 실패하면서 이렇다 할 실적이 없는 상태였다.
아무리 튼튼한 갑옷이라도,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으면 녹이 슬어 무뎌지는 법.
어떻게든 세계 1위가 되겠다는 집념 하에 무리해서 공략을 밀어붙이는 동안, 과거 찬란했던 명성은 점점 빛을 바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요번 서리 갱도 사건으로 인해, 제대로 흠집까지 나버린 것이었고 말이다.
‘잘하면 이번에 아예 순위를 뒤집어버릴 수도 있겠어.’
‘영원’이 지금처럼 휘청거리고 있는 사이, ‘흑룡’이 과거 그들이 포기했던 보스 몬스터를 당당히 공략해버린다면?
주아는 넓은 공터를 빙 둘러싼 채, 어서 제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길드원들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와 함께 조용히 입술을 핥았다.
“자, 시작하세요.”
탁-
이내 흑우선을 접은 그녀는, 팔괘로를 향해 팔을 쭉 뻗으며 개전을 알렸다.
“예, 길드장님. 탱커들 앞으로!”
“태, 탱커들 앞으로!”
곧 신호에 맞춰 고철의 정면에서 대기하고 있던 길드원들이, 엉거주춤 방패를 치켜들고서 앞으로 나섰다.
쿠구구구-
“우와아악!”
“뭐, 뭐야? 갑자기 땅이…”
이윽고 그들이 공터 안쪽으로 발을 들인 그때.
언덕 전체가 뒤흔들리는 듯한 진동과 동시에, 쥐죽은 듯 웅크려 있던 팔괘로의 몸체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웅-!
치이익- 치이익-
완전히 일어서, 족히 15m는 넘어 보이는 거대한 덩치.
등 뒤에 솟은 두 배관 위로 울컥울컥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
녹슬어 끼익거리는 기계음 뒤로, 시뻘건 빛을 발하는 안광.
“지, 지금 우리더러 저런 걸 상대하라는 거야?”
“말도 안 돼! 애초에 보스몬스터를 잡으러 간다는 얘기도 못 들었었다고! 난 길드도 어제 들어왔단 말이야!”
길드원들 중, 그 압도적인 광경에 잔뜩 움츠러들어 웅성거림이 커져가는 신입들을 보며.
한주아는 말없이 양옆으로 눈짓을 보냈다.
“소란피우지 말고 대열 유지해!”
“멋대로 도망치는 새끼들 있으면 다 죽을 줄 알아!”
채챙-!
그에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인 간부들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녀석들을 향해 무기를 뽑아 들었다.
“이, 이 미친놈들! 처음부터 이러려고…”
직전에 설명은커녕, 제대로 된 훈련조차 없이.
아침에 길드로부터 지급받은 방패 하나를 달랑 쥐고서 보스 앞에 던져진 신입들은, 햇빛을 받아 시퍼렇게 빛나는 날 끝을 발견하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젠장!”
“일단 다들 모여! 조금이라도 가망이 있는 곳에 기대보자고!”
도망치고 싶어도 전부터 공터를 빙 둘러싸고 있었던 터라, 도무지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엉성하게나마 대열을 갖춘 그들은, 어느덧 휘두를 준비를 마치고 팔이 돌아가 있는 고철 덩어리를 보고선 방패를 세웠다.
“길드장님, 혹시라도 정말로 버티면 어떡합니까?”
예상외로 빠르게 정신을 다잡고, 팔괘로의 공격을 받을 준비를 마친 신입들을 보며.
주아는 조금은 상황이 우려스럽다는 듯 뒷일을 물어오는 간부를 향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괜찮아요.”
이건 기회였다.
‘흑룡’이 ‘영원’을 제치고, 국내 최고의 길드로서 자리매김할 기회.
그런데 이쪽에서 마구잡이로 신입들을 뽑아다가, 방패막이로 세웠다는 오명이 남아서야 쓰나.
“애당초 그러라고 넉넉히 인원을 채워온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도록.
이미 대책을 다 세워놓은 상태였다.
“금방, 또 써먹을 때가 올 테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