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ne Deliver RAW novel - Chapter (31)
신들의 배달기사(31)
“으으읍!”
탁- 탁-
스마트폰 불빛에 희미하게 비치는 한 몸뚱아리에, 머리가 아홉이나 달린 어마무시한 크기의 거대 뱀 앞.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 잠시 얼어붙어 있던 하준은, 조금 전 가로막은 입에 답답한지 제 손을 떼어내는 루시오를 보며 정신을 차렸다.
“히, 히드라…”
겁에 질린 듯, 벌벌 떨며 조용하게 내뱉는 목소리.
살금살금 녀석을 챙겨 뒷걸음친 하준은, 무슨 연유에선지는 몰라도 저들을 쫓아오지는 않는 괴물을 보고선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놀래라.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이윽고 자리에서 한참을 멀어지고 나서야 겨우 긴장의 끈을 푼 하준은, 쓰러지듯 벽에 몸을 기대고선 꼭 붙잡고 있던 루시오를 놔주었다.
“…하준. 도대체 케이론 님한테서 뭘 맡아온 겁니깟?”
“낸들 아냐? 고작 동굴에 들어가서 침 하나 받아오라는 게 이렇게 터무니없는 일일 줄 알았으면, 애초에 받질 않았겠지.”
사기도 이런 사기가 어디 있나.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지그시 저를 올려다보는 루시오를 마주한 그는, 무심하게 툭 시험관을 건네주던 케이론을 떠올리며 입술을 꾹 씹었다.
어쩐지, 생긴 것부터 영 심술에 고집이 달라붙었더라니.
“아무튼. 빨리 동굴을 벗어나야 하는 겁니닷. 여기서 계속 밍기적거리고 있다간, 언제 녀석이 쫓아올지 모르는 것입니닷!”
이내 고개를 돌려 지나온 길을 돌아본 루시오는, 녹초가 된 하준을 일으켜 세우며 동굴 밖으로 나서길 재촉했다.
방금 제가 본 게 정말로 그 전설 속의 히드라라면, 당장 도망쳐온 거리쯤이야 녀석에겐 코앞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아니, 잠깐만 있어 봐.”
그에 엉거주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난 하준은, 여전히 고요한 동굴에 나지막이 침음을 흘리며 지난 광경을 되새겼다.
‘그거, 정말로 깨어있었긴 한 건가?’
당시엔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눈동자에, 무얼 살펴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서로 눈을 마주치긴 한 건지부터가 의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은 저들이 천천히 물러서는 와중에도 끝까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었으니까.
‘상식적으로 이 깜깜한 곳에서 갑자기 눈뽕을 맞았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을 리가.’
보통은 놀라서라도 흠칫 몸을 빼든지 할 텐데.
애당초 케이론도 동굴 안에 누군가 퍼질러 자고 있으리라 했던 걸 생각하면, 그냥 거기서 눈을 뜬 채로 자고 있던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러면 이거, 어쩜 가능할지도?’
마침 퀴네에도 챙겨왔겠다.
싸우는 것도 아니고 몰래 다가가서 침만 받아오는 것쯤이야 해 볼 만하다고 느낀 하준은, 힐끔 도망쳐온 안쪽을 바라보며 주먹을 꾹 쥐었다.
‘그래. 성공하면 앞으로 따라붙을 콜이랑 팁들이 얼만데. 까짓것 한 번 해보지 뭐. 여차하면 손오공이라도 부르면 그만이니까.’
짧은 고민 끝에 각오를 다잡고서 헬멧을 고쳐 쓴 그는, 이제 슬슬 나가려는 줄 알고 입구 쪽으로 뽈뽈뽈 날아가는 루시오를 뒤로하고선 몸을 돌렸다.
저벅-
“하준, 뭐 하는 겁니깟? 입구는 이쪽인 것입니닷!”
“알아. 알고 가는 거야, 지금.”
이어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서기 무섭게,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제 옆에 다가와 반대로 팔을 잡아끄는 녀석을 보며.
그는 제 소매를 꼭 붙든 손을 살포시 떼어내고선, 비장한 얼굴로 마저 발을 옮겼다.
“미, 미쳤습니깟? 히드랍니닷, 히드라! 대괴수 튀폰의 딸이자, 엄청엄청 대단한 신님들조차 두려워하는 맹독을 가진 놈이란 말입니닷!”
사람이 무모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그 무지막지한 괴물을 직접 눈으로 보고서도 다시 사지로 기어들어 가는 모습에 기겁한 루시오는, 여태껏 들킬까 봐 소리를 죽였던 것도 잊고선 전력으로 그를 막아섰다.
그래도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한 정이 있는데, 이렇게 자살하러 가는 걸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더구나, 그랬다간 더 이상 헤파이스토스 님을 뵐 낯도 없어질 테고.
‘…아니, 그게 딸이었다고?’
그런 녀석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준은 헤파이스토스가 헤베의 친오빠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만큼이나 충격적인 이야기에 멍하니 두 눈을 꿈뻑이며, 도저히 암컷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던 그 무시무시한 히드라의 생김새를 떠올렸다.
‘분명, 저번에 스핑크스도 튀폰의 핏줄이라고 하지 않았나.’
모르긴 몰라도 그 집안, 쉽지 않네.
“그 대영웅 헤라클레스 님조차 혼자선 이길 수 없어서, 조카를 불러 다구리친 것입니닷! 그리고 그마저도 죽이진 못해서 진짜진짜 커다란 바위로 간신히 봉인시켰다는 괴물을, 하준이 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깟!”
뒤이어, 이제는 거의 글썽이는 듯한 목소리에 잠시 자리에 멈춰 선 하준은.
자기도 무서운지 몸을 덜덜덜 떨면서도, 오로지 저를 말리기 위해 따라온 루시오를 돌아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괜찮으니까. 이만 입구로 돌아가.”
“하준!”
곧 있으면 히드라가 있던 곳에 도착할 터였다.
이 이상 데려가기엔 녀석이 너무 위험했다.
퀴네에는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죽을 겁니닷. 맹독에 치이익 하고 녹아서, 뼈도 안 남을 것입니닷!”
“야 임마! 말이 씨가 된다고, 불길한 소리 좀 하지 마라. 게다가 누가 그놈이랑 싸운대? 가서 침만 받고 바로 튈 거라니까?”
이내 가지 말라고 아주 악담을 퍼붓는 루시오를 보며 눈을 맞춘 그는, 울먹거리는 녀석을 진정시키고선 자그마한 손에 스마트폰을 꼭 쥐여주었다.
“금방 나올 테니까,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무서우면 그걸로 라이트라도 켜고.”
그 말을 끝으로 더 달라붙기 전에 빨리 걸음을 옮긴 하준은, 퀴네에를 사용해 기척을 숨기며 서서히 모습을 감췄다.
뚝- 뚝-
‘…잘 거면 좀 곱게 자지. 뭐 이리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어, 헷갈리게.’
머잖아 물 떨어지는 소리에 고개를 올려다본 그는, 조금 전에 봤던 그대로 벌겋게 빛나고 있는 안광들을 보고선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이 생김새는 영 다시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네.’
한 몸뚱이에 대가리가 아홉이나 달리다니.
저러면 몸은 누가 조종하는 거래.
‘그러고 보니 전에도 이런 놈이 하나 더 있었지.’
케르베로스였던가.
하준은 데메테르의 부탁으로 페르세포네에게 도시락을 건네주러 갔을 적에 봤던 삼두견을 떠올리며, 굳게 닫힌 마개를 쑥 뽑았다.
뽕-
‘좋아. 이제 여기다 침을 담아가기만 하면은 된다는 거지?’
이윽고 땅에 고인 보라색 웅덩이를 향해 다가간 그는, 고약한 악취를 뿜어대며 천천히 주변을 부식시키고 있는 침을 보고선 떨리는 손으로 시험관을 내밀었다.
혹시나 잘못해서 저런 게 몸에 튀기라도 한다면, 그냥 아픈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터였으니까.
‘그래도 이놈이 자면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어서 다행이네, 안 그랬으면 저 몸뚱이를 타고 올라가서…’
쿠구구구-
“…어, 어어? 뭐야, 갑자기!”
그렇게 조심조심 히드라의 침을 담아가기도 잠시.
하준은 지진이라도 난 듯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는 동굴에, 깜짝 놀라 휘청거리는 몸을 겨우 붙들었다.
콱-
“와, 씨. 큰일 날 뻔했네.”
동시에 하마터면 놓칠 뻔한 시험관을 꽉 붙잡은 그는, 안쪽에서 넘칠 듯 찰랑거리고 있는 침을 보고선 식은땀을 주륵 흘렸다.
“밖에 뭔 산사태라도 났나, 웬…”
어찌 됐든, 무사히 물건도 구했겠다.
이만 웅덩이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고서 뻐근해진 허리를 쭉 편 하준은, 순간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목도하고선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아.”
어둠 속에서 말없이 저를 지켜보고 있는 아홉 쌍의 눈동자.
전과 달리 보란 듯이 데구르르 굴러가는 시선을 마주한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툭 욕을 내뱉었다.
“좆됐네.”
* * *
“흐억, 허억… 결국 여까지 와버렸구먼!”
늦은 밤.
성치 못한 다리를 이끌고 쉼 없이 달려, 끝내 히드라가 있는 절벽 아래 도착한 케이론은.
무리해서 오느라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저 멀리 주차된 스쿠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가 한 천년만 젊었어두 진즉에 따라잡았을 텐디.”
본래대로라면 제가 천천히 주변을 맴돌면서, 실력도 좀 보고.
중간중간 수많은 갈래길을 지나면서, 제대로 길을 찾아갈 줄 아는 녀석인지만 확인하고 끝내려 했건만.
뭔 놈의 말이 그렇게 빠르고, 어떻게 그리 맞는 길만 쏙쏙 골라갔는지.
숲에서부터 죽어라 달렸음에도 계속 흔적을 쫓아 따라가는 게 고작이었다.
“육시럴, 이건 또 어찌 올라간 거여?”
이내 혼자서 덩그러니 놓여 있는 스쿠터 앞에 도착한 케이론은, 그 위로 절벽에 보란 듯이 숭숭 파여 있는 구멍들을 보고선 도통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다지 힘이 세거나 별다른 재주가 있어 보이진 않았는데.
“아주 미치겠구먼. 제발 늦지 않았어야 하는디.”
다그닥- 다그닥-
아무튼, 혹시라도 정말 히드라한테 간 건 아닐까.
그는 무슨 사달이 나기 전에 절벽 사이사이 나 있는 돌부리들을 밟으며, 훌쩍훌쩍 절벽을 뛰어올랐다.
물론 제정신인 이상, 안에서 자고 있는 녀석을 보자마자 바로 도망쳐 나왔을 테니, 죽지는 않았겠지만.
“흐윽… 하준은 바보인 것입니닷!”
탁-
“뭐여. 한 눔은 어디 간 겨? 왜 너밖에 읎어?”
“핫! 이 목소린… 케이론 님? 진짜 케이론 님이십니깟? 부디 하준 좀 살려주시는 겁니닷!”
허나 금세 동굴 입구에 다다른 케이론은,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도 밖에서 혼자 요상한 전등을 들고 훌쩍이고 있는 님프를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참말루 그걸 다시 들어갔단 말이여?”
이윽고 루시오로부터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그는, 도무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이거 완전 도라이 아니여?’
아무리 싸우는 게 아니고 침만 받아오라는 거라지만, 반신도 영웅도 아닌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녀석의 기감을 속이고 갔다 오겠다는 건지.
난다긴다하는 영웅들은 물론 그 콧대 높은 올림포스의 주신들조차 치를 떠는 히드라를 상대로, 참 겁대가리가 없는 놈이었다.
“서, 설마. 못 구하는 겁니깟?”
“…나 참 돌아버리겠구먼. 하여간, 요놈의 입이 웬수지 웬수.”
이럴 줄 알았으면 시험이고 뭐고 그냥 돌려보내는 거였는데.
예전에 하도 너도나도 가르쳐달라고 찾아와서, 다 떨어트릴 생각으로 만들었던 것이 인제 와서 발목을 잡게 될 줄이야.
“에잉, 쯧. 뭐 혀? 어여 따라와.”
“엣? 루, 루시오도 말입니깟?”
“그러믄, 이 무서운 곳에 늙은이 혼자 보낼 생각이여? 옆에서 그걸로 길이라도 비추든가 혀야지!”
“아, 알겠습니닷!”
하는 수 없이 두려운 마음을 다잡고 안쪽으로 들어선 케이론은, 황급히 제 곁에 붙어 앞길을 밝혀주는 빛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움직였다.
녀석이 헤파이스토스의 소개를 받고 찾아왔던 손님이라는 것도 문제였지만, 어쨌든 제가 부탁한 일 때문에 일어난 사고이니만큼 마냥 좌시할 수만은 없었으니까.
‘빌어먹을, 다리가 쑤시는구먼.’
점점 깊숙이 들어갈 때마다, 시큰거려오는 다친 뒷다리.
마치 그날의 사고를 기억하듯 갈수록 선명해지는 고통에 이를 악문 그는, 슬슬 느껴지는 거대한 기척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쿠구구구-
“히야악! 뭐, 뭡니깟?”
“이, 이건… 염병헐, 야단났구먼!”
곧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하는 동굴에 얼굴이 사색이 되어버린 케이론은, 더 늦기 전에 서둘러 지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준! 괜찮습니깟!”
“이 망할 눔아! 거기 젊은 건 내비두고, 차라리 이 늙은이를… 으응?”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머잖아 널따란 통로를 꽉 들어 채운 대 괴수를 눈앞에 마주한 그는, 순간 이해할 수 없는 풍경에 무어라 외치던 말도 잊고선 멍하니 입을 쩍 벌렸다.
“아이고, 아닙니다! 감사는 무슨.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죠!”
그도 그럴 것이.
튀폰의 자손이자, 그 신들의 왕 제우스조차 피한다는 악명높은 괴물인 히드라가.
“하하하! 응?”
한낱 인간에게 제 등을 내어주고 있었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