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ne Deliver RAW novel - Chapter (33)
신들의 배달기사(33)
“아흐, 피곤해 죽겠네.”
돌아오는 길.
어느덧 캄캄한 밤을 넘어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숲에 다다른 하준은, 밤샌 주행에 연신 하품을 해대며 자리에 멈춰 섰다.
“야, 야. 일어나.”
“으응… 벌써 도착한 겁니깟?”
벌써는 무슨.
자는 새에 한참을 달렸구만.
저벅-
이윽고 제 등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던 루시오를 깨워 스쿠터에서 내린 그는, 먼저 수풀을 헤치고 숲 안쪽으로 들어서는 케이론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게, 이게 증말 가능한 일인감? 어떻게 한낱 인간이 히드라를.”
히드라가 있던 동굴에서부터 제가 은거하는 오두막이 있는 숲까지.
반나절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계속해서 멍한 얼굴로 전날 있었던 일을 떠올리던 케이론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제 손에 쥔 시험관과 하준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왜 그러세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아녀, 아무것두.”
그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부담스러운 시선에 슬쩍 말을 붙인 하준은, 잠시 발을 멈추고 빤히 저를 바라보다 다시금 몸을 돌리는 노인을 보고선 머리를 긁적였다.
뭐야, 아까부터.
설마 이제와서 배달 팁 주기가 아까워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혹시, 하준이 못 생겨서 그러시는 거 아닙니깟?”
“…뭐라고?”
“히야악! 장난, 장난인 겁니닷!”
괜히 불안한 마음으로 케이론을 뒤쫓던 하준은, 옆에서 시답잖은 소리를 내뱉으며 날아다니는 루시오를 잡아 머리를 꾹꾹 누르고선 나지막이 침음을 삼켰다.
진짜 안 주면 어떡하지.
이거, 떼먹히면 어디 신고는 할 수 있나?
“뭐혀? 어여 들어오지 않고.”
“…예? 아, 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미심쩍은 눈빛으로 케이론을 살피며 속으로 의구심을 쌓아가던 하준은, 언제 도착했는지 오두막 문을 활짝 열어놓고선 저를 기다리는 그를 보며 조심스레 현관에 들어섰다.
“너, 이름이 뭐라고? 하순?”
“하준입니다. 이하준.”
뒤이어 집주인을 따라 거실에 자리를 잡고 앉은 하준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물어오는 노인을 보고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배달도 끝났겠다.
사실 진즉에 동굴 앞에서 헤어졌어도 이상할 게 없었는데.
도대체 여기까지 돌아와서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는 거지?
“…하준. 응, 그려.”
이하준.
걱정과 달리 빤히 눈앞의 젊은이를 바라보던 케이론은, 이내 조용히 그의 이름을 되뇌며 몸을 일으켰다.
“여서 좀만 기둘리고 있어. 금방 어디 좀 다녀오려니깐.”
뒤이어 절뚝이는 다리를 이끌고 오두막을 나선 노인은, 뒤뜰에 놓인 그루터기를 지나 낡은 창고에 다다라선 그 옆에 있는 화분을 들어 올렸다.
‘헤파이스토스 그눔이 괴물을 보냈구먼.’
애당초 그 전쟁의 신 아레스의 뚝배기도 망치로 깨버린 괴짜가 보증한 놈이니만큼, 무언가 끼가 있으리라고는 짐작했지만.
그게 히드라의 잠을 깨우고도 무사히 빠져나오는 수준이 아닌, 아예 녀석의 등에 올라타다 못해 비늘에 독까지 얻어올 정도였을 줄은 몰랐다.
‘이아손도, 테세우스도, 아킬레우스 그 천치도 못 헌 일을 그 평범한 아이가 해내다니. 헤라클레스 그 염병헐 눔의 자식도 혼자서는 어림두 없을 텐디.’
달칵-
“…여기두 오랜만이구먼. 다신 올 일 없을 줄 알았는디.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여.”
곧 화분 아래에서 꺼내든 열쇠로 문을 연 케이론은, 걸쭉한 보라색 액체가 찰랑거리는 시험관을 들고선 천천히 안쪽에 들어섰다.
“콜록, 콜록! 육시럴! 종종 먼지라두 좀 털어놓을 걸 그랬구먼.”
대체 얼마나 안 쓴 건지 사방에 아주 먼지가 가득 찬 창고 안.
과거 수많은 아이를 제자로 받아 영웅으로 기르는데 썼던 도구들과 온갖 장비가 늘어진 선반들을 훑으며 무언가를 찾던 그는, 금세 거무죽죽한 내용물이 들어찬 플라스크를 발견하곤 잘 챙겨 들었다.
‘평생을 포기하고 살아야 할 줄 알았는디.’
앙상하게 뼈만 남다 못해, 반쯤 썩어버린 제 왼 뒷다리.
과거, 헤라클레스가 제게 주어진 열두 과업을 해결하던 중에 벌어진 참사를 상기한 케이론은.
아릿하다 못해 거칠게 쑤셔오는 상처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사고였지. 암, 그건 사고였어.’
복잡한 사정으로 헤라클레스가 쏜 화살에 맞아 불구가 되어버린 다리.
하필이면 그때 화살촉에 발려있던 히드라의 독 때문에 어찌 한 번 치료도 못 해보고, 얼마나 긴 세월을 고통 속에서 씨름해야 했던가.
불사의 몸으로 죽지도 못한 채, 매일매일 생살이 썩어가는 아픔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제 스승의 아들인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도움을 받아, 언젠간 해독제를 찾으리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머잖아 픽 수그러들고 말았지만.
‘해독제를 만들기 위해선 히드라의 독이 필요하다니. 참 말두 안 되는 얘기지. 어느 멍청한 눔이 그걸 구하러 나서겠다고. 그려, 분명 그랬는디.’
그렇게 아무도 찾아오지 못하는 물건에 좌절을 겪은 이후, 홀로 이 숲을 찾아 은거를 시작한 지도 어언 천년 남짓.
이제는 고통조차 무뎌져 반쯤 송장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하루하루를 멍하니 흘려보내던 와중.
웬 헤파이스토스의 소개로 저를 찾아왔다던 극히 평범해 보이는 인간이, 수많은 영웅과 신들조차 엄두도 못 낸 재료를 얻어온 것이었다.
그것도 본디 우스갯소리로나마 부탁한, 안에 소량의 독이 섞여 있는 침이 아닌.
아예 히드라의 독 그 자체를 말이다.
뽕-
곧 거세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서 두 마개를 딴 케이론은, 애지중지 손에 쥔 시험관을 기울이며 플라스크 속으로 독을 흘려 넣었다.
화아악-
“콜록, 콜록!”
안쪽의 액체와 히드라의 독이 맞닿기 무섭게 뭉게뭉게 뿜어져 나오는 시커먼 무언가.
먼지 쌓인 창고를 꺼멓게 채운 연기에 주변을 부채질하며 연신 기침하던 그는, 이내 마지막 재료를 만나 황금색으로 완성되어가는 해독제를 보고선 떨리는 손으로 병을 집어 들었다.
꿀꺽- 꿀꺽-
꿀렁이는 울대를 타고 식도를 넘어가는 미적지근한 액체.
이윽고 텅 빈 플라스크를 앞에 내려놓은 노인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레 썩어 문드러진 다리에 힘을 주었다.
툭-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크게 부들거리지만, 분명하게 바닥을 딛고 선 두 뒷다리.
저벅-
쿠당탕-!
내친김에 한 발짝 내밀어본 걸음에, 무너지듯 책상과 함께 옆으로 쓰러진 그는.
그대로 양 주먹을 꾸욱 쥔 채, 북받쳐 오르는 감동에 뜨거운 눈물을 터트렸다.
“크흡, 흑…”
움직였다.
평생 남은 셋에 의지해 질질 끌고 다녀야만 할 줄 알았던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다리 위로, 서서히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비록 당장은 몇 초도 안 되는 시간이나마 자리에 서는 게 고작이었지만.
앞으로 꾸준히 재활을 거친다면, 언젠간 예전처럼 네 발로 달릴 수 있을 날이 올 터.
“크흥! 나두 참, 지금 바보같이 울고만 있을 때가 아닌디.”
부스럭-
그렇게 한참을 흐느끼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케이론은, 붉어진 눈시울을 닦으며.
옛적에 창고 깊숙이 숨겨놓았던 물건을 찾았다.
“좋아. 여기 있었구먼.”
주변에 널브러진 것들과 마찬가지로 뿌옇게 먼지가 내려앉은 상자.
달칵-
곧바로 잠겨 있던 녀석을 열어 아련한 눈빛으로 내용물을 내려다본 노인은, 말없이 물건을 들어 올리며 흐뭇하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요게 마음에 들었으믄 좋겠구먼.”
창가로 햇빛이 스며들어오고 있는 창고 속에서, 스스로 은은한 달빛을 내뿜고 있는 신비한 활.
자신이 아직 미숙한 어린 켄타우로스였을 적에, 제 스승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로부터 전해 받은 귀중한 무구.
언젠가 자신이 은퇴할 때가 되면, 가장 아끼는 제자에게 물려주리라 생각하고 남겨두었던 놈이었건만.
‘원래는 헤라클레스, 그눔한테 줄 작정이었는디.’
덜컹-
이만 하준에게 줄 보상을 챙기고선 창고를 나선 케이론은, 한 기다리고 있을 인간과 님프를 떠올리며 한껏 가벼워진 걸음으로 오두막에 들어섰다.
“미안허이. 오래 기다렸쟈?”
“뭐, 생각보다 조금 오래 걸리시긴…”
“아닙니닷! 하나도 안 기다린 것입니닷!”
그새 또 서로 투닥이기라도 했는지 흐트러진 방석을 본 노인은, 전과 달리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며 주섬주섬 챙겨온 활을 꺼내 들었다.
“내 안에서 물건값허구, 요 활까지 챙기느라…”
쾅-!
“뭐여! 언눔이여! 언눔이 허락두 읎이 멋대로 남의 집에 들어오고 그러는 겨?”
이어서 하준에게 포인트와 함께 활을 건네주려던 찰나.
케이론은 부른 손님도 없는데 밖에서 누군가 문을 여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곤 현관으로 몸을 돌렸다.
“…아레스? 네눔이 웬일루 여길.”
“죄송합니다, 케이론.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어, 어엉? 그, 그랴.”
근육질의 튼튼한 몸에 붉은색 머리.
근처에 무슨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님에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갑옷으로 무장하고 선 아레스를 마주한 노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슬쩍 자리를 비켰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이게 무슨 무례냐고 면전에 따지기엔, 평소 그 철없는 녀석이 퍽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나왔으니까.
“아, 아레스!”
그러는 사이.
거실에 앉아 귀를 쫑긋거리고 있던 루시오는, 당황한 듯한 케이론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곧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아레스면, 저 재수 없게 생긴 사람이 그 양아치인가?”
“야, 양아치? 하준, 미쳤습니깟?”
“아니, 전에 알아봤을 때 워낙 그런 쪽으로 유명해서…”
뒤이어 옆에서 귓속말로 참 겁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하준을 돌아본 님프는, 짐짓 화가 난 목소리로 그에게 경고를 늘어놓았다.
“그게 무슨 불경한 소립니깟! 아레스 님은 제우스 님이랑 헤라 님 사이에서 태어난 현 올림포스의 직계 중의 직계. 위대한 열두 주신 중 한 분이자, 전쟁과 투쟁의 신! 먼 훗날 차기 올림포스의 최고신이 될 자리에 서 있는, 이른바 신들의 왕자인 것입니닷!”
이어진 설명에 조용히 고개를 주억인 하준은, 슬쩍 눈앞의 신을 쳐다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구나.
전에 알아봤을 때 같은 전쟁의 신인 아테나에 비해 취급이 별로 안 좋기에 몰랐는데.
보기보다 엄청 대단한 위치에 서 있는 신이었단 말이지.
‘그런데, 그런 신들의 왕자님이 대체 왜 여기에?’
보아하니 케이론을 만나러 온 것도 아닌 거 같은데.
궁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하준은, 이내 빤히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를 보고선 식은땀을 주륵 흘렸다.
“네가 이하준이냐?”
“저, 저요? …예, 맞긴 맞는데요.”
설마, 들은 건가?
개미 기어들어 가듯 작은 목소리로 나눈 얘기건만.
그는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하, 하하. 그게, 그러니까…”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빌면 봐주려나.
그리 자연스레 양반다리를 풀고 일어서려던 찰나.
하준은 금세 눈앞에서 일어난 이변에, 엉거주춤하게 선 자세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쿵-
그도 그럴 것이.
“부탁하마! 제발 나 좀 도와다오!”
그 신들의 왕자라는 아레스가, 제게 무릎을 꿇고 있었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