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ne Deliver RAW novel - Chapter (34)
신들의 배달기사(34)
이른 아침.
무사히 케이론의 부탁을 들어주고 거진 하루 만에 지상으로 내려온 하준은.
곧바로 KTX에 올라 피곤한 몸을 좌석에 뉘며, 오두막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비겁한 놈. 거기서 가불기를 쓰다니.’
슬슬 케이론에게서 보상을 건네받을 타이밍에,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온 적발의 남자.
아레스라고 했던가.
마음 같아선 신이고 뭐고 빨리 돌아가서 잠이나 자버리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무어라 거절할 새도 없이 바로 무릎을 꿇어버린 게 문제였다.
‘신이라는 놈이 그렇게 무릎이 가벼워도 되는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제우스의 적장자라는 신들의 왕자.
그쯤 되는 거물이 자존심도 다 내려놓고 그리 부탁을 해오는데, 그 누가 거기서 안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결국 떠밀리듯 배달을 맡은 그는, 매트리스에 몸 한 번 눕혀볼 시간도 없이 곧장 목적지가 있는 부산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스쿠터라 고속도로도 못 타겠다, 가는 길에 쪽잠도 좀 잘 겸 열차에 오른 거고.
‘뭐, 사정을 보면 영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만.’
듣기로는 신들이 존립하고 더욱 강해지기 위해선, 저한테 주는 것과 똑같은 포인트가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그 포인트를 버는 방법 중 하나가, 많은 사람에게 숭배받고 제 설화가 널리 퍼지는 거라는 모양이었다.
‘지금 신화 계열로 활약하고 있는 헌터들이 바로, 그 대리로 선택된 이들이랬지.’
자신이 성좌로 있는 헌터가 여기저기 이름을 날리고 사람들의 찬사를 받게 되면, 그게 고스란히 포인트로 쌓이게 된댔나.
물론 계약하고 권능을 내려주는 데 포인트가 필요하긴 하지만, 보통은 몇 년 지나면 대부분 흑자로 돌아간다는 듯했다.
그러다 흔히 랭커라고 불리는 수준의 헌터라도 나온다면, 수십에서 수백 년에 걸쳐 모을 포인트를 다달이 벌 수도 있다는 모양이었고.
‘그래서 몇몇은 아예 시작부터 투자금을 세게 때려 박는 경우도 있는데, 자기가 그중 하나라고 했었지. 그것도 아주 한 명한테 몰빵을 해버렸다고.’
그런 헌터가 당장 위험에 처해서 죽게 생겼는데, 자존심이고 뭐고 남아날 리가 있나.
하물며 그 포인트 중에 제 아버지, 제우스의 지갑에서 몰래 빼 온 것도 끼어있었다고 하니.
어떻게든 살리고 싶을 수밖에.
‘…이거, 이렇게 보니까 양아치 정도가 아닌 거 같은데.’
끼익-
아무튼, 서울에서 부산까지 남은 세 시간 남짓.
등받이를 슬쩍 젖히고 편히 머리를 기댄 하준은, 솔솔 잠이 오는 가운데 조용히 눈앞에 뜬 메시지를 훑었다.
[배달 팁으로 ‘100,000p’를 획득하셨습니다.] [영웅들의 대 스승 ‘케이론’님으로부터 추가로 ‘100,000p’를 획득하셨습니다.] [잔여 포인트 : 388,700p]“흐흐.”
기본 팁에 추가로 받은 보상까지, 다해서 20만 포인트.
보기만 해도 밤샘 피로가 싹 날아가 버린 듯한 느낌에 실실거리던 그는, 거기에 더해 배달통에 놓고 나온 비늘과 활을 되새기며 주먹을 꾹 쥐었다.
‘배달 한 번에 20억. 거기에 따로 받은 두 개까지 합치면 도대체 얼마나 번 건지.’
이걸로 당분간 콜이 없더라도, 더는 잔금 내고 빈털터리가 될 걱정은 안 해도 될 거 같았다.
다만, 그 아래 이것도 없었더라면 더욱 마음이 편했을 텐데.
[위기에 빠진 아레스의 헌터를 구하십시오.] [남은 시간 : 미정]‘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맡겨도 이런 일을 나한테 맡기다니. 전에 데메테르도 그렇고 오공도 그렇고, 신이란 작자들은 배달이 무슨 뜻인지 모르나?’
딸내미 도시락 전해주겠다고 던전에 들어가, 물건 찾아주겠다고 보스도 없애.
이젠 그거로도 모자라서 일반인이 헌터를 구해주러 다녀야 하는 꼴이라니.
도대체 신들 머릿속에서 배달기사는 뭐 하는 사람인지.
가끔 보면 제가 무슨 해결사인 줄 아나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시간제한이 없으면 없는 거지, 미정은 또 뭐람?’
난데없이 남은 시간이 뿅 하고 생기기라도 하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이만 메시지를 닫은 하준은, 설마 그러겠냐는 듯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선.
아까부터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창밖을 살피고 있는 루시오를 돌아보았다.
“우와아아… 하준, 하준! 이 자동차, 엄청 빠른 것입니닷! 바깥이 휙휙 하고 지나가 버리는 겁니닷!”
“이건 자동차가 아니라 열차. 그리고 놀라는 건 좋은데, 목소리 좀 낮춰라. 여기 우리만 있는 거 아니니까.”
“합! 알겠습니닷. 루시오는 엘리트 님프니까, 공공예절은 확실히 지키는 것입니닷.”
“…그 예절, 나한테도 좀 지켜주면 안 되냐?”
위에서 새벽까지 스쿠터를 몬 자신과는 다르게, 뒤에서 푹 자고 일어나서 그런가.
막 서울역에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섰을 때도 그렇고, 바글바글한 인파에 휩쓸려 미아가 될 뻔했을 때도 그렇고.
쌩쌩하니 호기심이 넘쳐선 틈만 나면 이것저것 물어보고 다니는 게,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준, 우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깟?”
“글쎄다. 일단 해운대 쪽이긴 한데. 자기 헌터를 구해달라는 걸 보니 던전이나 게이트겠지.”
그러고 보니 최근 해운대에 게이트가 어쩌고 하는 뉴스를 본 거 같은데.
타르타로스의 뒤를 잇느니 마느니 하던.
‘뭐, 괜찮겠지. 전에 그 타르타로스도 무사히 갔다 왔었으니까.’
물론 도시락 때랑은 달리, 단순 배달이 아니라 사람을 구하는 거라고 적혀 있기는 했지만.
아레스 본인한테 듣기로는 그저 제가 부탁한 무기만 전해주면 된다고 그랬으니, 반드시 몬스터와 부딪힐 필요는 없을 터였다.
더구나 저쪽에서 급하게 무릎까지 꿇고 부탁할 정도의 일이라면, 팁도 꽤 빵빵하게 받을 수 있을 테고.
‘…이거, 철야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지도?’
“구해준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깟? 가서 무기만 주고 돌아오는 거 아니었습니깟?”
“응? 뭔 소리야. 너도 옆에서 같이 들었잖아.”
이내 이번 건을 마치고 받을 보상을 생각하며, 짐짓 들뜬 얼굴로 미소를 짓던 하준은.
마치 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루시오를 보고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루시오는 검을 배달해달라는 얘기밖에 못 들은 것입니닷.”
아, 구해달라는 건 따로 메시지로만 뜬 거였나.
답을 기다리듯 가만히 저를 쳐다보는 녀석을 마주한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별 건 아니고, 그냥 배달지가 게이트로 찍혀 있더라고. 메시지도 검을 전해주라는 게 아니라, 헌터를 구하라고 적혀 있었고.”
“…그렇습니깟?”
“응.”
아마 무기만 던져주면 알아서 게이트를 공략하든 밖으로 탈출하든 그러는 게 아닐까.
별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마친 하준은, 어깨를 으쓱이며 벽에 세워 놓은 검을 바라봤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겠지.
설마 또 싸워야 하기라도 하겠어?
다른 누구도 아닌, 신이 직접 그렇게 말했는데.
* * *
“젠장. 저 앞에 또 온다! 다들 전투 준비!”
어두컴컴한 동굴 내부.
전날 부산에 도착해 밤새 정비를 마친 뒤, 아침 일찍 길드원들을 데리고서 다른 공략조와 함께 게이트 공략에 나선 박성준은.
거의 10분에 한 번꼴로 몰려드는 엄청난 수의 몬스터들을 보고선, 질린 얼굴로 피에 절은 검을 허공에 툭툭 털었다.
-키에에에엑!
한 번에 둘씩 지나가기엔 조금 좁은 통로를 타고 몰려드는, 기괴하게 생긴 촉수들.
촤악-!
철퍽-
질척이는 선홍빛 몸뚱이에 붙은 십수 개의 눈을 끔벅이며, 사방에 달린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미는 촉수들.
마치 작은 해일처럼 밀려드는 녀석들을 차분히 베어나가던 그는, 길게 베어낸 상처에서 뿜어져 나와 눈가에 튄 피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네!”
스억-
앞선 브리핑에서도 그렇고, 출발 전에 따로 보고 받았던 내용에서도 그렇고.
길이 좁아서 공략에 어려움이 있으리란 얘기는 들었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였을 줄이야.
그래도 저들 ‘영원’은 소수정예니만큼, 비좁은 공간에서도 나름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마냥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허억, 후욱… 아이고, 힘들어 죽겠네! 아린아, 거긴 어때. 괜찮아?”
“응. 뒤쪽, 잘 안 와.”
“…그래? 그러면 조금만 쉬었다 가자.”
그렇게 얼마나 베었을까.
일렬로 늘어진 줄의 선두에서 벌써 열 번이 넘는 공습을 막아내느라 기진맥진해진 성준은, 다행히 누구 하나 다친 사람은 없는 이들을 보고선 잠시 벽에 등을 기대었다.
쯔억-
“으. 이 지긋지긋한 놈들.”
이윽고 벽에 남은 사체가 갑옷에 눌어붙는 느낌에 혀를 찬 그는, 찝찝함에 자리를 옮기며 뒤를 돌아봤다.
“보스 방까지 얼마나 남은 거 같으세요?”
“다 왔습니다. 슬슬 앞에 보일 거예요.”
저들 이전에 A급 헌터 여섯 명이 포함되어 있던 공략조를 이끌던 남자.
한오성의 말에 나지막이 고개를 주억인 성준은, 곧 짧은 휴식을 마치고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가자! 빨리 끝내고 다들 돌아가서 쉬어야지.”
“예!”
저벅- 저벅-
“정지.”
이후, 거의 도착했더라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가길 몇 분.
다행히 또 촉수들이 몰려드는 일 없이 거대한 공동 입구에 선 그는, 들어서기 전에 잠시 자리에 멈추어 입을 열었다.
“이 앞으론 보스 방이니까, 다들 마음 단단히 먹도록. 지금껏 겪어봐서 알겠지만, 아무래도 예상했던 것보단 난이도가 조금 더 있는 거 같으니.”
“예, 알겠습니다!”
“좋아. 그러면 탱커들부터 입장한다! 들어가자마자 바로 대형을 만들어놓을 수 있도록!”
쿵- 쿵-
공동에 들어서기 전.
좁은 골목에서 싸울 때와 달리 넓은 환경에 대열을 재정비한 성준은, 하나둘 먼저 자리를 잡고서 방패를 치켜드는 길드원들을 보고선.
맨 뒤에서 앞으로 나온 백아린과 함께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길드장님! 근처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뭐야. 다 어디 갔어? 보스는?”
탱커부터 딜러, 보조까지.
순서대로 보스 방에 입장해 제대로 대형을 잡은 것을 확인하곤 주변을 둘러본 그는, 휑하니 비어있는 공동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툭-
“응?”
뒤이어 슬금슬금 다들 품에서 손전등을 꺼내 사방을 비춰보길 잠시.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에 조심스레 고개를 든 성준은, 노란 불빛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시뻘건 무언가를 발견하고선 황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아린아! 위에!”“위? 읏!”
콰아아앙-!
경고가 떨어지기 무섭게, 백아린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거대한 형체.
귀를 때리는 굉음에 눈살을 찡그린 그는, 이내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를 보고선 다급히 그녀를 찾았다.
“백아린! 괜찮아?”
후두둑-
곧 사방에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파편을 몸으로 받으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거뭇한 인영.
“…응. 아슬아슬.”
다행히 먼지만 좀 뒤집어쓰고 나온 아린을 확인한 성준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휴. 안 다쳤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조금 전,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기 전에 힐끗 보았던 거대한 괴물.
얼핏 보기에도 보통은 아니었던 크기에 마른침을 삼킨 그는, 머잖아 가라앉기 시작하는 안개 사이로 선명하게 비친 녀석의 덩치를 확인하고선 슬쩍 오성을 돌아봤다.
“그, 분명 브리핑 땐 10m 정도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예. 그랬는데.”
-크워어어어억!
“그새, 더 커졌나 보네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