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ne Deliver RAW novel - Chapter (39)
신들의 배달기사(39)
“으그극!”
늦은 아침.
해가 중천에 다다라서야 겨우 잠에서 깬 하준은, 어째선지 영 뻐근한 몸에 신음을 흘리며 부스스한 눈을 떴다.
“어우, 삭신이야. 어제 너무 오래 잤나?”
새로운 배달거리를 찾아 직접 올림포스로 올라간 이후로, 잠도 못 자고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닌 지가 이틀.
중간에 아레스의 부탁을 받고 내려와, 잠깐 KTX에서 눈을 붙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걸로 피로를 모두 풀어내기엔 무리였던 듯싶었다.
“아니, 어쩌면 그냥 곡괭이 하나 들고 절벽을 타서 근육통이 온 걸지도… 응?”
이윽고 가볍게 스트레칭이라도 하기 위해 몸을 일으킨 그는, 밤새 자다가 굴렀는지 매트리스 아래로 반쯤 떨어진 루시오를 보고선 내딛던 걸음을 멈춰 섰다.
“음냠… 어서 사탕 오십 개를 내놓은 것입니닷…”
피곤했나.
평소엔 알아서 다시 올라오던 녀석이 웬일이래.
가만히 녀석을 지켜보다 곧 매트리스 가운데로 자리를 옮겨준 하준은, 이내 목 아래로 가지런히 이불을 덮어주고선 방을 빠져나왔다.
“거참, 빨리 이사를 하든가 해야 하는데.”
혼자 살 때도 좁아터졌었는데, 식구가 하나 늘어나니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젠 뭐 안에 있을 땐 건조대 하나 펼쳐놓기도 어려울 지경이었으니.
“입주일은 대체 언제 오나.”
속으로 남은 일수를 세며 고민하던 그는, 아직도 보름이 넘게 남은 기간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젠 잔금을 치러도 돈이 넉넉한데, 들어갈 방법이 없다니.
삑- 삑- 삑-
띠로리-
금방 집 근처 편의점에서 피로회복제랑 애들 먹는 음료 하나를 사 들고 돌아온 하준은, 여전히 곯아떨어져 있는 루시오를 한 번 슥 살피고선 슬그머니 책상 앞에 앉았다.
집이야 어쨌든, 그건 당장에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이고.
중요한 건 예전부터 줄곧 생각해왔던 문제를 슬슬 해결할 때가 됐다는 것이었으니까.
‘헌터 시험.’
곧바로 컴퓨터를 켜고 헌터 협회의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간 그는, 메인 화면에 떡하니 떠 있는 공고를 보고선 일정을 살폈다.
‘15일이라. 그럼 앞으로 사흘 남았나.’
이전엔 하고 싶어도 가진 거라곤 퀴네에밖에 없어서 도전조차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하루에 3분뿐이긴 해도 그 팔괘로조차 걸레짝으로 만들 수 있게 해주는 슈트가 있었으니 합격은 떼 놓은 당상이었다.
솔직히 인제 와서 헌터가 된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었지만, 만일을 대비해서라도 일단 붙어놓는 것쯤은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언제 또 스쿠터가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던전으로 배달이 잡힐지 모를 노릇이고.
헌터증이 있다면 굳이 입구를 오갈 때 아깝게 퀴네에를 낭비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으응… 하준, 거기서 뭐 하는 겁니깟?”
“아, 일어났어?”
그렇게 시험 정보를 확인하고, 막 응시비와 함께 신청을 마친 찰나.
잠긴 목소리에 슬쩍 뒤를 바라본 하준은, 방금 일어나 졸린 듯 눈을 비비고 있는 루시오를 발견하고선 조용히 미소지었다.
“별거 아냐. 그냥 뭐 좀 할 게 있어 가지고. 그보다 저기 냉장고에 음료수 넣어왔으니까, 목마르면 꺼내서 마시든가 해.”
“음료수? 포도주 같은 거 말입니깟?”
“…뭐? 아니, 포도주는 술이고. 주스 말이야, 주스.”
올림포스는 포도주를 그냥 음료수처럼 내놓나?
너무 자연스레 돌아온 물음에 흠칫 당황한 그는, 어색하니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스?”
그에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멀뚱히 눈을 깜빡인 루시오는, 조금 전 하준이 얘기한 대로 냉장고를 열어젖히고선 안에 있던 음료수를 꺼내 들었다.
“위에 뚜껑부터 돌려서 따고, 안에 비닐을 벗겨서… 아니다. 이리 줘봐.”
그리곤 어떻게 먹는 건지 이리저리 병을 돌려가며 고민하길 잠시.
보다 못한 하준의 도움으로 드디어 마실 준비가 된 음료수를 손에 쥔 녀석은.
이내 어딘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찰랑거리는 액체를 바라보다, 곧 조심스레 입을 가져다 댔다.
“…!”
벌컥- 벌컥-
음료가 마음에 들었을까.
한 모금 목으로 넘기기 무섭게 꿀꺽꿀꺽 내용물을 금세 해치운 루시오는, 여운이 남는 단맛에 눈을 반짝이며 하준을 올려다보았다.
“하준! 이거 엄청엄청 맛있는 겁니닷! 예전에 교수님께서 아끼시던 디오니소스 님의 포도주를 조교님들이랑 몰래 슬쩍해 마셨을 때보다 더 달콤한 것입니닷!”
“…응? 포도주를 뭐 어쩌고 어째?”
이윽고 텅 빈 병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감상에 잠긴 녀석을 가만히 지켜보던 하준은, 저 어린아이 같은 외형에서 나오기엔 잔뜩 위화감이 느껴지는 이야기에 당황한 듯 침음을 내뱉었다.
그, 마셔도 되는 건가? 술을?
하긴, 겉으론 이래 보여도 속은 대학까지 나왔다고 하니까.
“아무튼, 맛있다니 다행이네. 뭣하면 더 사줄까?”
“그, 그래도 되는 겁니깟? 이거, 진짜진짜 비싼 거 아닙니깟?”
“아냐, 그렇게 안 비싸.”
이후 또 사준다는 얘기에 정말 그래도 되냐는 듯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루시오를 마주한 그는,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고선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좀 있다 편의점 가는 김에, 점심도 근처에서 먹고 오면 되겠다. 금방 나갈 거니까, 빨리 씻…”
띵동-
-배달의 만족, 주문!
이어서 나가기 전에 간단하게 세면을 마치러 화장실로 향하던 하준은, 경쾌한 알람과 동시에 화면에 불이 들어오는 스마트폰을 보고선 슬쩍 발을 멈춰 섰다.
“…우리, 음료수는 다음에 먹을까?”
* * *
“오. 이번에도 헤파이스토스 님 콜인가?”
올림포스.
빠르게 세면을 마치고 콜을 수락해 구름 위로 올라온 하준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오두막을 발견하곤 같이 딸려온 스쿠터를 구석에 대곤 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제도, 그제도 그렇게 돌아다녔는데. 오늘도 또 배달인 것입니깟?”
“어허. 벌 수 있을 때 많이 벌어놔야지. 그리고 너도 신님들 부탁 들어주는 거 좋아하잖아.”
“물론 그거야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쉴 땐 또 확실히 쉬어야 능률이 나오는 것입니닷!”
음료수에 내심 기대가 컸는지 툴툴거리며 따라오는 루시오를 돌아본 그는, 지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녀석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한숨 푹 잤으면 됐지. 뭘 더 쉬려고 그래, 주말도 아닌데. 헤파이스토스 님! 저 왔습니다!”
똑똑똑-
끼이익-
“왔수? 오늘도 일찍 도착했구만.”
“에이, 당연히 일찍 와야죠. 우리 단골 고객님 요청이신데.”
이젠 뭐, 거의 옆집 아저씨를 보는 듯한 푸근함이 느껴지는 헤파이스토스를 지나치며 오두막 안으로 들어선 하준은, 아직도 현관에서 쭈뼛대는 루시오를 데리고선 식탁을 찾았다.
“형씨, 요새 아주 소문이 자자하더구만. 케이론 그 껄끄러운 양반의 다리도 고쳐주고, 근래 끙끙 앓던 아레스의 고민까지 해결해줬다고. 듣자 하니 그 히드라도 그냥 애완동물 다루듯이 콱 제압해버렸다면서?”
“어유. 애완동물은 무슨, 누가 들으면 오해할라.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운이 좋아서 독 좀 얻어왔을 뿐이지.”
“으하하! 그야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형씨가 어떻게 히드라를 잡았겠수. 그 헤라클레스조차 조카 없인 다시 엄두도 못 내는 일을.”
자리에 앉은 그는 곧바로 소문에 관한 얘기를 꺼내오는 헤파이스토스를 쳐다보며, 조용히 준비된 차를 홀짝였다.
그게 벌써 그렇게 퍼졌나?
이제 고작 하루이틀 지났을 뿐인데.
“그래도 요즘 올림포스가 형씨 얘기로 떠들썩한 건 다름없수다. 사실이 어쨌든 그동안 아무도 못 하던 케이론의 숙원을 풀어준 건 매한가지니까.”
하준은 조금 얼떨떨하긴 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됐든 소문이 그렇게 퍼졌으면, 앞으로 저를 찾는 신들도 더욱 늘어날 거라는 얘기였으니까.
“저, 그래서 오늘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좋은 소식에 금세 찻잔을 비운 그는, 이내 조심스레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물었다.
딱히 바쁜 것도 없으니 잡담이 길어져도 별로 상관은 없었지만, 그래도 계속 앞에서 제 소문을 전해 듣는 건 꽤 낯부끄러운 일이었으니.
“그거 말이요? 아! 마침 저기 오는구만!”
뒤이어 제 너머를 바라보며 반가운 듯 손을 흔드는 헤파이스토스의 모습에, 천천히 뒤를 돌아본 하준은.
멀끔하게 정장 같은 옷을 차려입고선 오두막에 들어서는 남자를 발견하곤,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누구지?’
“허업! 저, 저분은!”
“뭐야, 아는 사람이야?”
“보면 모르는 겁니깟? 무슨 화물이든 저 바다 너머로 신속 배달! 안전 배송! 최근 올림포스에서 운송업으로 눈부신 매출을 올리고 있다는 초 핫한 기업! 아르고 해운의 이아손 님인 것입니닷!”
허나 궁금증도 잠시.
옆에서 단번에 정체를 알아채곤 깜짝 놀란 루시오를 살핀 그는, 무어라 장황하게 설명을 풀어내는 녀석을 보고선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올림포스에서 핫한 기업이고 자시고.
이쪽 주민도 아닌 제가 그런다고 무얼 알겠느냐마는.
적어도 그 이름만큼은 저 또한 몇 번 들어본 적이 있는 녀석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본인보단 앞에 붙은 회사명이 유명하다고 봐야겠지.
“오랜만이십니다, 헤파이스토스 님. 그 팔뚝은 여전하시네요.”
“으하핫! 나야 뭐, 항상 쇠를 두들기는 게 일이잖수. 자, 인사하쇼. 이쪽은 아르고 호 원정대의 이아손.”
“아, 예. 처음 뵙겠습니다. 이하준이라고 합니다.”
아르고.
자세힌 모르지만 분명 그리스 신화의 내로라하는 영웅들이 잔뜩 모였던 배의 이름이었던가.
하준은 헤파이스토스의 소개에 꾸벅 고개를 숙이며, 제 앞에 선 영웅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하준 씨.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 양아버지의 다리도 고쳐주셨다고. 정말 감사드립니다.”
“네? 아, 아뇨. 저도 다 돈 받고 하는 일인데요, 뭐.”
“후후. 듣던 대로 겸손한 분이시네요.”
양아버지라니.
케이론을 말하는 건가.
어째선지 옆에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으로 저를 흘기는 루시오를 무시하고, 어색하니 내민 손을 마주 잡은 그는.
뜻밖의 인연에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한쪽 주먹을 꾹 쥐었다.
그 말은 즉, 이 이번 의뢰주로 보이는 영웅한테 이미 점수를 따고 들어갔다는 얘기였으니까.
잘하면 같은 일을 해도 팁을 좀 더 받아낼 수 있겠지.
“그럼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시간이 별로 없어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예. 그러시죠.”
이윽고 지체없이 제 맞은편에 자리를 잡는 이아손을 쳐다본 하준은, 곧장 자세한 얘기를 시작하는 그를 보며 조용히 의뢰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실은 우리 회사가 현재 운영하는 서비스에 조금 차질이 생겨서 말입니다. 선박으로 화물을 운송해야 하는데, 요즘 뱃길에 세이렌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는 모양이더라고요.”
화물 운송이라.
그러고 보니 아까 회사명이 아르고 해운이라고 했었던가.
“원래는 그럴 때마다 오르페우스를 시켜서 쫓아냈는데, 이 친구가 지금 연주회 때문에 멀리 출장을 가 있는 상태라. 부득이하게 하준 씨의 소문을 듣고, 이렇게 헤파이스토스 님께 부탁해서 찾아뵙게 된 겁니다.”
“…그거 지금, 저한테 그 세이렌인지 뭔지 하는 녀석들을 처리해달라는 겁니까?”
“예, 맞습니다. 정확하시네요.”
들어보니 난감한 부탁에 머리를 긁적인 하준은, 아쉽지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제아무리 요새 본의 아니게 몬스터랑 부딪히는 일이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자신은 어디까지나 헌터가 아닌 배달기사.
물건을 받아다 배달을 하는 사람이지, 무슨 해결사마냥 몬스터들을 쓱싹 없애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소문은 어떻게 났을지 몰라도, 막 어딜 싸우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아! 그러고 보니 아직 보수를 말씀 안 드렸군요.”
그렇게 제안을 거절하고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하준은 이어지는 이아손의 말에 발길을 멈추고, 일단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다.
“아무래도 너무 갑작스럽게 부탁을 드리는 일이다 보니까, 대략 이 정도 금액을 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에 미리 준비한 수첩을 꺼내 들어 무언가를 쭉 적어 내려간 이아손은, 금세 계산을 마치고선 종이를 찢어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진심?”
“진심입니다.”
뒤이어 거기에 적힌 숫자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하준은, 이내 의자를 당겨 앉으며 환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지금 바로 출발할까요, 고객님?”
그도 그럴 것이, 거절하기엔 너무 큰 금액이었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