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ne Deliver RAW novel - Chapter (49)
신들의 배달기사(49)
“직접 보니까 좀 어때? 생각보다 쓸 만하지?”
하준이 떠난 자리.
바위산 정상에 홀로 남겨진 헤라클레스는, 언덕처럼 쌓인 사체 더미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주억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헤르메스. 언제부터 와 있었습니까?”
“방금. 그 아이들이 떠나고 나서. 그보다 헤라클레스, 도대체 언제까지 나한테 존댓말을 쓸 생각이야?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어?”
날개 달린 모자에, 날개 달린 샌들.
그리고 두 마리 뱀이 서로 엉킨 채 휘감겨 있는 지팡이, 카두케우스를 손에 쥐고서 모습을 드러낸 남자아이.
헤르메스.
어느새부턴가 사체 꼭대기에 걸터앉아 가만히 헤라클레스를 내려다보던 이 장난꾸러기 신은, 오늘도 어김없이 말을 높여오는 올림포스의 영웅을 보고선 어색한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지난 과업을 수행할 때, 몇 번이고 저를 도와주셨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거 때문에 매번 형님들 눈치 보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구. 특히 아레스 형님 말이야. 너, 그쪽한테는 요즘 아예 대꾸도 안 한다면서?”
“흥. 그놈이 옛날 일 가지고 여전히 꿍해가지고는, 매번 마주칠 때마다 시비잖습니까. 형님이 뭐 형님다워야 대우를 해주지.”
그런 헤르메스의 말에 먼 옛날, 제가 아직 반신이었을 적의 일을 기억한 헤라클레스는.
당시 헤라가 내어준 과업 탓에 별수 없이 죽여야만 했던 그의 까마귀들을 떠올리며 나지막이 혀를 찼다.
아무리 쓰임새가 있어 애지중지 키운 아이들이었다 한들, 저 또한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어머니가 내린 과업을 이행하느라 그런 것이었건만.
신들의 왕자라는 작자가 고작 그거 하나 가지고 그리 속 좁게 나와서야.
“할아버지랑은, 아직 냉전 중인 거야?”
그렇게 덩치에 맞지 않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궁시렁거리는 헤라클레스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미소를 흘린 헤르메스는.
이내 저 구덩이 아래 홀로 남겨져 끝나지 않을 형기를 보내고 있을 제 조부를 떠올리며, 천천히 입을 뗐다.
언제 또 요번처럼 이변이 일어날지 모르는 마당에, 이제 그만 서로 과거를 잊고서 사이가 완만해지면 좋을 텐데.
괜히 다음에도 굳이 누군가를 불러서 대신 내려보내야 하지 말고.
“하하… 그 티탄 얼굴도 안 본 지가 벌써 천년이 훌쩍 넘었는데, 어떻게 이제 와서 뻔뻔히 화해한답시고 내려가겠습니까. 게다가, 제가 그러고 싶어도 아마 그쪽이 그럴 마음이 없을걸요.”
“하기야, 원래부터 둘이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뭣보다 그 영감, 커다란 몸뚱이랑은 안 맞게 쪼잔하기까지 하니까.”
돌아온 대답에 잠시 씁쓸한 눈빛으로 구덩이 쪽을 살핀 그는, 이내 표정을 풀고선 다시금 헤라클레스를 바라보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어찌 제 바람대로 둘이 화해할 수만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게 생각만큼 쉽게 해결될 일이었다면, 애당초 여태까지 계속 안 보고 날을 세우고 있지는 않았겠지.
“크흠. 드, 들으셨습니까? 조금 전엔 방금 막 왔다고 하시더니.”
“아하하! 농담이야, 농담. 어차피 내 할아버지래도 그리 자주 본 사이도 아니고. 읏차.”
이윽고 머쓱하니 저를 올려다보며 머리를 긁적이는 헤라클레스의 모습에, 한껏 웃음을 터트린 헤르메스는.
간만에 그리운 얼굴도 봤겠다, 이만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는 겁니까?”
“그래야지. 누군가는 아까 그 이야기들을 신전에 알려야 하잖아?”
일곱 갈래로 가라진 땅. 그리고 군데군데 푸른 불길이 넘실거리는 곳.
제가 막 이곳에 도착했을 당시, 타이밍 좋게 꺼내고 있던 이야기를 떠올린 그는.
그렇지 않아도 최근 전령의 신 모임에서 옆 동네 피리쟁이한테 들었던 말을 상기하며 입술을 씹었다.
지상에 있어서는 안 될 녀석들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할 때부터 언젠간 이런 날이 오리라 예상했었지만, 설마 놈들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이야.
“바쁘실 텐데. 그런 것쯤이야 그냥 제가 다녀와도…”
“아냐, 됐어.”
복잡해진 마음을 다스리고 금방 정신을 차린 헤르메스는, 저 대신 아버지가 있는 신전으로 향하려는 헤라클레스를 가로막곤 샌들을 이용해 날아올랐다.
“네가 자리를 비우면 지금 기어 올라오고 있는 녀석들은 어떡하려고. 아무래도 난 전쟁의 신도 승리의 여신도 아니다 보니, 싸움에는 영 쥐약이거든. 더구나 이런 소식을 가져다 어딘가에 알리는 일이, 더욱 전령의 신답기도 하고.”
“으음…”
헤르메스의 말에 슬그머니 구덩이 쪽을 살핀 헤라클레스는, 정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기어 나왔는지.
벌써 여기저기 정상으로 손을 뻗고 있는 괴물들을 보고선 나지막이 침음을 흘렸다.
거참, 끈질긴 놈들 같으니라고.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구만.
“그럼 이만. 나중에 제수씨한테 안부나 좀 전해줘! 저번에 그 엘릭서, 직접 배달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뒤이어 질린 얼굴로 놈들을 살피는 헤라클레스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헤르메스는, 곧 터덜터덜 힘없이 걸음을 옮기는 그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저나 헤라클레스나.
이제부터 더 쉴 새 없이 바빠질 터였으니까.
* * *
“야! 얌마! 슬슬 일어나, 이제.”
“으응… 5분만 더 자는 것입니닷…”
아틀라스를 설득하고 헤라클레스의 부탁을 들어준 뒤, 지상으로 돌아와 휴식을 만끽한 지 이틀.
아침 일찍 일어나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루시오를 깨운 하준은, 아직 피곤한지 잠긴 목소리로 우물대는 녀석을 보고선 이불을 확 끌어 내렸다.
펄럭-
“5분은 무슨 5분. 조금 있으면 나가야 하니까, 빨리 정신 차리고 씻고 옷 갈아입어. 늦을 거 같으면 그냥 여기 두고 갈 거니까.”
“하암. 도대체 무슨 일인데 아침부터 그렇게 서두르는 겁니깟?”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루시오는 졸린 눈을 비비적거리며, 그새 화장실로 들어가 머리를 말리고 있는 하준을 살폈다.
오늘 뭐 약속이라도 있었던가?
“무슨 일이긴. 오늘 헌터 시험 있다고 했잖아. 내가 어제 그냥 집에서 기다릴 거냐니까, 너도 구경해보고 싶다면서.”
“아! 그러고 보니 그랬던 거 같습니닷! 그런데, 헌터 시험이 대체 뭐하는 겁니깟?”
이내 잠시 드라이기를 끄고 돌아온 이야기에 전날의 기억을 떠올린 녀석은, 냉장고 안에 그득하게 채워 넣었던 음료수 하나를 꺼내 마시며 말을 물었다.
헌터 시험이라.
무슨 대입 시험 같은 건가?
뭔지는 몰라도 일단 구경해보고 싶다고 얘기는 했었는데.
“너는 거기가 뭐 하는 데인지도 모르면서 같이 가자고 한 거야?”
“그야 혼자 있으면 심심하지 않습니깟! 그리고 하준이 나가면 밥해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닷!”
“…내가 니 식모냐?”
천진난만한 대답에 쓴웃음과 함께 한숨을 푹 내쉰 하준은, 금세 음료수를 다 마시곤 씻으러 들어오는 루시오를 뒤로하고선 밖으로 나가 짐을 확인했다.
신분증 챙겼고, 시험표 챙겼고.
무기는 괜히 챙겼다가 웬 나무 몽둥이 같은 걸 주워왔냐고 욕먹을지도 모르니까, 일단 놓고 가기로 하고.
“하준! 바로 출발하는 겁니깟?”
“어? 어어. 잠깐 거기 머리 말리고 있어. 금방 갈 거니까.”
어디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시험만 보고 돌아올 거니까.
간단하게 챙길 것만 챙기고 혹시나 이목을 끌까, 슈트 위에다 옷만 하나 걸쳐 입은 그는.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무언가를 발견하고선 조용히 회상에 잠겼다.
‘들고 다니면 언젠가 도움받을 날이 올 거라고 했던가.’
빛에 비추면 은은한 푸른색으로 반짝이는 네모난 철패.
헤라클레스에게서 받은 20만 포인트와는 별개로, 황금사과를 건네줬을 적에 아틀라스로부터 받은 자그마한 보상.
이런 걸 자세히 설명도 안 해주고, 도대체 어디다 써 먹으라 준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지고 있으면 도움이 되긴 할 거라니까.
달그락-
잠깐의 고민 끝에 철패를 집어다 주머니에 챙긴 하준은, 다시 한번 수험표를 확인하고선 몸을 돌렸다.
“루시오. 머리는 다 말렸어?”
“그런 것쯤이야 진즉에 다 끝낸 것입니닷. 그보다 바쁘다더니, 아까부터 뭘 그렇게 보고 있던 겁니깟?”
“응? 아, 별거 아니야. 그런데 너…”
이윽고 그새 나갈 준비를 마치고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루시오를 발견한 그는, 잠깐 멀뚱히 녀석을 살피더니 곧 어딘가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으로 손을 뻗었다.
스윽-
“읏! 뭐, 뭐 하는 겁니깟?”
“음. 이러니까 훨씬 낫다.”
벽 쪽에서 제가 쓰던 모자 하나를 가져와 루시오에게 꾹 눌러 씌운 하준은, 불편하다는 듯 이리저리 챙을 만지작거리는 녀석을 보고선 뿌듯하니 미소를 지었다.
심심하니까 저도 같이 데려가 달라니 그러기야 하겠지만, 저 귀염뽀짝한 외모나 눈에 확 띄는 하늘색 머리는 어찌해야 하나 걱정이었는데.
이래놓고 보니 좀 튀긴 해도, 얌전히만 있어 준다면 무슨 사달은 안 날 것 같았다.
“좋아, 가자.”
이내 모자 탓인지는 몰라도 뚱해 보이는 루시오를 데리고서 자취방을 나선 그는, 스쿠터를 타고 금세 강남역에 도착해 근처에 있는 협회 건물로 향했다.
“어우, 벌써부터 사람이 아주 바글바글하네.”
이어서 지체할 것 없이 데스크를 찾아 신분증을 확인하고, 번호표를 받아 널따란 강당 같은 곳으로 들어선 하준은.
저 구석에 시험용 몬스터들이 나오는 통로와 이어진 케이지 앞에서 대기 중인 사람들을 보고선, 자연스레 자리를 찾아 앉았다.
“하준. 여기 있는 인간들이 전부 신님들의 사자인 것입니깟?”
“사자? 아, 신화계 헌터들? 글쎄다. 내가 알기론 신체강화나 무술계열이 대부분이라던데.”
보기보다 자주 열리는 시험에, 안전대책이 다 마련이 되어있어서일까.
외부인임에도 어찌 같이 들어온 루시오를 데리고서 무릎에 앉힌 그는, 사방에 잔뜩 긴장한 채로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훑고선 궁금하다는 듯 말을 물어오는 녀석을 보며.
소곤소곤 잡담과 함께, 어서 시험이 진행되기만을 기다렸다.
“자, 그럼 지금부터 헌터능력검정시험을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1번 응시자. 케이지 위로 올라와 주세요.”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처음 강당에 들어섰을 적보다, 대강 두 배쯤 인원이 찼을 때쯤.
드디어 감독관의 설명과 동시에 시작된 시험을 맞이한 하준은, 가장 나약하기로 소문난 몬스터 중 하나이자, 이번 시험 대상인 고블린들을 보고선 생각에 잠겨 들었다.
‘세 마리. 안전 문제 때문인가. 어지간하면 일반인들도 다 잡을 수 있는 수준이네.’
어쩐지.
다들 결과보단 과정을 보는 시험이라고들 하더니.
단순히 고블린들을 해치우느냐 마냐가 아닌, 어떻게 잡느냐. 그리고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를 보고서 판단하겠다는 건가.
“다음, 38번 응시자!”
“아, 네!”
누구는 무술로, 누구는 검술로, 누구는 특이한 초능력과 번쩍이는 마법으로.
하나둘 다양한 방법으로 상대를 쓰러트리는 응시자들과 그런 그들을 위층에 난 유리창을 통해 지켜보고 있는 길드의 스카우터들을 살피던 하준은.
어느새 자기 차례가 다가온 것을 확인하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준, 파이팅인 것입니닷!”
“오냐.”
끼이익-
-키에엑!
-키에에엑!
곧 루시오의 응원을 받으며 감독관의 인도에 따라 케이지 위로 올라선 그는, 저 앞에 시뻘건 안광을 번뜩이며 다가오는 고블린들을 보고선 천천히 슈트의 능력을 켰다.
‘적당히만 하자, 적당히.’
싸움에 들어서기 전.
슬그머니 위를 올려다본 하준은, 다른 응시자 때와 마찬가지로 유심히 저를 들여다보고 있는 스카우터들을 보며 나지막이 침음을 흘렸다.
자신은 그저 던전이나 게이트의 출입 때문에 자격증만 따러 온 거니, 굳이 저들의 눈에 띌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랬다간 괜히 저번 ‘영원’ 때처럼 귀찮게 들러붙기나 하겠지.
-캬아아악!
이윽고 잠깐 눈치를 보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고블린들을 마주한 그는, 최대한 몸에 힘을 빼고선 느릿느릿 팔을 휘둘렀다.
‘절대 한 방에는 죽진 않게, 살살…’
그리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선두를 향해 주먹이 맞닿은 찰나.
콰아아앙-!
“아.”
하준은 앞선 노력이 무색하게도, 케이지를 넘어 강당 전체가 울리는 듯한 굉음에 흠칫 놀라며.
후두둑-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눈앞에서 증발해버린 초록이 대신, 허공에서 우수수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는 시뻘건 빗물을 보고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망했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