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ne Deliver RAW novel - Chapter (56)
신들의 배달기사(56)
“거참, 살다 살다 이젠 생전에 고인 취급을 다 받아보네.”
미드가르드와 헬헤임.
그 사이를 잇는 거대한 다리, 걀라르브루.
산 자와 죽은 자, 그들의 출입을 가리는 문지기 ‘모드구드’를 지나 끝자락에 다다른 하준은.
조금 전 노파의 입에서 튀어나왔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데리고서, 다짜고짜 넌 이미 죽었다니.
처음엔 그때 스쿠터에서 굴렀을 적에 뭔가 잘못됐었나도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팔다리가 좀 까져서 아릴 뿐, 그렇게 크게 다친 부분은 없는 거 같았다.
애당초 다리 바닥이 딱히 포장된 것도 아니고, 제한시간이 그리 급한 것도 아니라서.
속도 또한 40을 넘게 당기지 않고 있었으니까.
“요새 뭐 마가 꼈나? 전에는 웬 도둑년이 귀신이냐고 난리를 피우더니.”
“…하준. 그거 어쩌면, 예전에 타르타로스에 한 번 들어갔다 와서 그런 거 아닙니깟?”
“응?”
이윽고 바로 며칠 전에 있었던 오해를 상기하며 한숨을 푹 내쉬던 그는.
혹시나 하는 목소리로 뒤에서 조용히 말을 붙이는 루시오를 보고선 고개를 기울였다.
“타르타로스는 왜?”
녀석의 말에 데메테르의 부탁을 받고서 페르세포네에게 도시락을 배달해주러 갔던 일을 기억한 하준은.
타르타로스 심부의 그 어두컴컴하고 음침했던 광경을 생각하며, 당시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가 고민에 빠져들었다.
…딱히 케르베로스한테 먹힐 뻔했던 걸 빼곤 별일 없었던 거 같은데.
“개울에 사는 님프한테서는 개울 냄새. 도랑에 사는 님프한테서는 도랑 냄새. 또 숲을 가로지르는 강가에 사는 님프한테서는, 강과 풀잎 냄새가 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 겁니닷! 타르타로스나 헬헤임이나, 신화만 다를 뿐 저승은 저승이니깟. 모드구드 님께서 하준한테 죽음의 냄새를 맡으신 걸지도 모르는 것입니닷!”
“죽음의, 냄새?”
이어진 설명에 과연 그럴싸하니 고개를 주억인 하준은, 슬쩍 제 팔에다 코를 묻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음. 난 잘 모르겠는데.’
조금 전에 바닥을 굴러서 그런가.
옅은 혈향이 코를 간질이긴 했지만, 그다지 죽음이라고 할 만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인간이라서 느끼지 못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또 일전에 히드라가 말하길, 저한테서 무슨 지옥의 망령들한테서나 맡을 법한 냄새가 난다고 했던 거 같기도 하고.
“에이, 모르겠다. 아무렴 어때. 결국 통과했으니 장땡이지.”
무언가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에 나지막이 침음을 흘린 그는, 이내 고민을 멈추고 곧 눈앞에 닥친 풍경에 집중했다.
“아. 이제 슬슬 도착인가 보다. 저기가 바로 헬…”
휘오오오-
“흐어어어! 추, 추워!”
“에, 에, 에츄!”
새하얀 얼음과 그 위에 옅게 쌓인 서리들로 이루어진 광활한 대륙.
곳곳에 우뚝 선 빙산과 뿌옇게 안개처럼 몰아치는 눈보라에 잠시 할 말을 잃어버린 하준은.
다리 위,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마치 경계선을 지난 듯 뚝 떨어진 기온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흐으으. 뭐, 뭐야 이거? 날씨가 무슨… 어? 야, 야!”
“…엣? 하, 하준. 방금 무슨 일 있었습니깟?”
잠깐, 아주 잠깐 서 있었을 뿐임에도 살결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에 스쿠터를 물린 그는.
옆에서 너무나도 매서운 추위에 정신을 놓았는지 엉뚱한 소리나 하고 자빠져 있는 루시오를 보며, 어딘가 이상하다는 듯 입술을 씹었다.
분명 북유럽의 신화의 저승이라고 하지 않았나.
일반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저승이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전혀 다른 모습에 당황한 하준은, 그 짧은 새에 스쿠터 위에 낀 서리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저걸 뚫고 헬인지 뭔지 하는 녀석한테 편지를 달라고?
“이런 미친. 배달 장소가 이딴 말도 안 되는 데였으면 진즉에 얘기를 했어야지!”
저승이라기에 그냥 몬스터 좀 돌아다니고 어두컴컴한, 타르타로스 같은 곳이리라 생각했건만.
단순히 그때처럼 퀴네에의 효과를 받고서 후딱 편지를 건네주고 나오려 했던 그는.
아직도 덜덜 떨리는 몸뚱아리에 이를 악물며, 호호 웃는 얼굴로 제게 부탁을 건넸던 그 망할 여신, 프레이야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진짜, 돌아가서 다시 만나기만 해봐라. 신이고 뭐고, 아주 그냥 한소리 팍팍 해줄 테니까.’
“앗!”
이윽고 속으로 불만을 투덜거리기도 잠시.
드디어 정신을 차렸는지, 흠칫 몸을 떨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루시오를 돌아본 하준은.
곧 무언가 알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헬헤임의 경계를 가리키며 입을 여는 녀석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그, 그러고 보니 교과서에서 본 적이 있는 겁니닷. 헬헤임은 타르타로스랑은 달리 엄청엄청 춥고 또 추운 지역이라, 이미 죽어서 추위를 잊은 자가 아니라면 서리 거인 정도는 돼야 버틸 수 있다고 말입니닷!”
제아무리 신과 영웅들을 도와 먹고사는 것을 업으로 여기는 님프라 한들, 보통은 그리스 신화 쪽을 벗어날 만한 일이 없어서 그런가.
기껏 배우고도 기억 한구석에 처박아두었던 내용들을 어렵사리 끌어올린 루시오는.
곧 헬헤임에 관해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쏟아내며 파르르 몸을 떨었다.
“뭐? 야 인마, 그걸 왜 이제 말해? 알고 있었으면 진즉에 얘기를 해줬어야지!”
“…이제 생각난 걸 어떻게 합니깟. 하준은 뭐, 학교에서 배운 걸 평소에도 전부 다 기억하고 다닙니깟?”
“그, 그건… 그건 아니긴 하지.”
뒤이어 녀석이 늘어놓는 말을 모두 듣고서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린 하준은, 이내 맞는 이야기에 머쓱하니 머리를 긁적이며 눈길을 돌렸다.
그래도, 가능한 한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준. 어차피 여기서 이러고 있다고 해서 뭔가 방법이 나올 거 같진 않은데, 그냥 저번처럼 뭐라도 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깟?”
“뭐? 혹시 포인트 상점 말하는 거야?”
그렇게 저 추위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말없이 깊은 고민에 빠져들던 그때.
상념을 깨우는 목소리에 슬그머니 그쪽을 살핀 하준은, 루시오가 꺼내든 제안에 조용히 눈살을 찌푸리며 나지막이 침음을 내뱉었다.
이 자식이, 자기 돈 아니라고 아주.
띠링-
하지만 그 말마따나 마땅히 생각나는 대안이 없기에, 결국 포인트 상점을 연 그는.
곧바로 짤막한 스크롤을 잡아 쭉쭉 내리며, 어딘가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찾아 눈을 굴렸다.
“아, 찾았다.”
-애완늑대 롱패딩[200,000p] [애완늑대 롱패딩]
-얼어붙은 세계의 재앙. 어두운 용의 애완늑대를 이용해 지은 롱패딩.
-입고 있으면 그 어떤 추위나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도, 마치 제집 안방을 거닐 듯 따뜻하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이십만… 윽!”
이윽고 척 보기에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쓰라고 만든 듯한 네이밍의 아이템에 스크롤을 멈춘 하준은.
자그마치 20만 포인트나 하는 가격의 물건을 보고선 얼얼함에 뒷목을 부여잡았다.
아무리 그래도 당장 타고 다니는 스쿠터가 10만인데, 고작 패딩 하나에 20만이라니.
그나마 사용 횟수에 제한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감사히 여겨야 하나.
띠링-
툭-
[잔여 포인트 : 622,700p]“아이고, 내 피 같은 포인트가!”
약간의 망설임 끝에 롱패딩을 구매하고, 바닥에 떨어진 녀석을 집어 든 그는.
클릭 한 번에 쭉 빠져나간 포인트를 보고선, 남몰래 속으로 눈물을 훔쳤다.
참자, 참아.
어쨌든 배달만 마치면 또 50만 포인트가 들어올 거였으니까.
스윽-
“아! 이거 설마 루시오 네 것도…”
“흐앗! 하준, 하준! 이거 완전 후끈후끈한 겁니닷!”
그렇게 마음을 잘 추스르고서, 주워든 롱패딩을 막 챙겨 입은 찰나.
혹여 머릿수만큼 하나를 더 준비해야 하는 건 아닐까, 떨리는 눈빛으로 루시오를 돌아본 그는.
다행스럽게도 어디서 났는지 모를 패딩 하나를 껴입고선, 뒤집어쓴 후드 아래 빼꼼 얼굴을 내민 녀석을 보곤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에 뭐, 자기도 신기의 효과를 8할만큼 같이 쓸 수 있다니 뭐니 그러더니.
아무래도 이 옷가지 또한 퀴네에처럼 신기로 쳐주는 모양이었다.
거참, 스쿠터나 슈트는 어림도 없더니만.
‘뭐, 어찌 됐든 나야 포인트 아꼈으니 좋지만.’
부릉-
이어서 그리 준비도 마쳤겠다, 바로 스쿠터를 타고 헬헤임에 들어서길 한 시간 남짓.
휘오오-
“어우 씨, 뭔 놈의 눈이 이렇게… 으엑! 퉷, 퉷!”
“으. 앞이 안 보이는 것입니닷!
끊임없이 몰아치는 눈보라에, 뭐 말 좀 하려고 하면 자꾸만 입안에 들어가는 눈발을 뱉어낸 하준은.
패딩 덕에 어째 추위는 면했지만, 새하얗게 한 치 앞도 잘 안 보이는 지독한 날씨에 학을 떼며 내비를 살폈다.
“젠장. 이래 가지곤 오늘은커녕 내일이나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무슨 놈의 빙산이 이렇게 많아?”
슥슥 스마트폰에 내려앉은 서리를 치우며 길을 확인한 그는.
추위 때문인지는 몰라도 갱신도 잘 안되는 제 위치를 보고선 입술을 꾹 물었다.
그 망할 여신이 제한시간을 왜 120시간씩이나 줬나 했더니만.
이게 넉넉하게 퍼준 게 아니고, 진짜 그만치 시간이 걸리는 곳이라 그랬던 거였을 줄이야.
“야. 안 되겠다. 일단은 조금만 쉬었다 가자.”
“…여기서 말입니깟? 가만히 있다간 눈발에 막 파묻혀버리는 거 아닙니깟?”
“파묻히긴 뭘 파묻혀. 그럴 거 같으면 빨리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지. 아무튼, 내비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이 기다리긴 해야 해. 뭐든 일단 내 위치를 알아야 제대로 길을 찾아서 가든가 말든가 하지.”
하는 수 없이 스마트폰이 녹을 때까지 주머니 안에 집어놓고서 스쿠터를 멈춰 세운 하준은.
눈보라를 피해 바로 근처에 우두커니 서 있는 빙산 쪽으로 다가가 등을 기대고선, 남은 시간을 슬쩍 바라보았다.
[남은 시간 : 41시간 17분 36초]‘그래도 남은 거리랑 비교해보면 어지간해선 늦지 않겠네. 중간에 무슨 요상한 일에라도 휘말리지 않는 이상에야…’
“…하, 하준! 하준!”
“응?”
“저기, 저쪽엣! 빨리 일어나 보는 겁니닷!”
허나, 생각보다 여유로운 상황에 마음을 놓기도 잠시.
갑작스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선 제 소매를 꾹꾹 잡아당기는 루시오에, 주섬주섬 몸을 일으킨 하준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계속 어딘가를 가리키는 녀석을 보고선, 의아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어? 흐, 흐어어어억!”
뒤이어 돌아간 시선 속에서 무언가를 마주친 그는.
곧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루시오를 데리고 아까 세워두었던 스쿠터를 향해 죽어라 뛰었다.
“거, 거기 앞에!”
그도 그럴 것이 웬 우락부락한 근육의 거대한 남자가.
쿠구구구-
“살고 싶으면 얼른 도망치게! 어서!”
이 추위에 빤스만 입은 채, 뒤에 늑대 몇 마리를 달고선 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