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ne Deliver RAW novel - Chapter (63)
신들의 배달기사(63)
“하준, 하준! 어서 열어보는 겁니닷!”
“알았으니까 가만히 좀 있어봐. 어디 보자, 비밀번호가… 일, 일, 공, 삼.”
삑- 삑- 삑- 삑-
띠로리-
아파트 복도.
무사히 프레이야의 부탁을 마치고 지상으로 돌아온 하준은, 마침 다가온 입주 날에 곧장 잔금을 치르고서 새 집을 찾았다.
“우와아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현관에 나지막이 감탄을 터트린 루시오는, 활짝 열린 중문을 지나쳐 널찍한 거실과 부엌을 둘러보며 반짝반짝 눈을 빛내었다.
“엄청엄청 넓은 것입니닷! 전에 살던 그 도랑 가재집 만한 곳이랑은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닷!”
도랑 가재집이라니.
누가 님프 아니랄까 봐, 코딱지만큼 작았다는 말도 참 특이하게 하는 녀석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린 하준은.
전 주인이 집을 비우며 다 빠진 가구 탓일까, 어째 계약 전에 보러왔을 때보다 더 넓어 보이는 공간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주억였다.
“하준! 루시오는 이 방이 좋겠는 것입니닷!”
미리 청소업체에 이야기해놓은 대로, 전날에 입주 청소도 전부 마무리되었겠다.
대부분 버리고 오느라 몇 안 되는 짐을 대충 구석에 몰아놓고 집안을 둘러보던 그는.
도도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곧 마음에 드는 방을 하나 찍고선 결심에 찬 목소리로 저를 찾는 루시오를 돌아봤다.
“…이런 경우 없는 녀석을 봤나. 야, 인마! 여기가 어떻게 네 방이야? 내 방이지. 내 돈 내고 내가 산 내 집인데.”
이윽고 그 손가락 끝에 위치한 방을 슬쩍 들어가 살피던 하준은, 척 봐도 셋 중 가장 커다란 면적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얹혀사는 주제에 어딜 제일 큰 방을 먹으려고.
쪼꼬만 게 양심이 있어야지.
“치.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깟? 그럴 거면 차라리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로 정하는 것입니닷!”
가위바위보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무시하곤 말없이 어깨를 으쓱인 그는, 이내 아파트 기본 옵션으로 붙은 빌트인과 싱크대 그리고 아일랜드 식탁을 제외하곤 텅 빈 집안을 보고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까, 큰 방은 내 걸로 하기로 하고. 일단 바로 가구부터 보러 갈까?”
본래대로라면 이사하기 전에 먼저 가구를 사서 설치일을 맞출 필요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근래 배달 때문에 어딜 나가 있는 일이 많았던 터라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헌터 시험이 있던 날 가구점이라도 한 번 들르는 거였는데.
“…도대체 뭐가 그렇게 됐다는 겁니깟? 루시오도 제일 큰 방이 가지고 싶은 것입니닷!”
아직 방 얘기가 해결이 안 됐다는 듯 투덜대는 루시오를 뒤로하고 현관으로 나선 하준은, 방금 벗어놨던 신발을 다시 신으며 슬그머니 구석에 박힌 짐들을 훑었다.
미리 대충 정리해놓은 식기와 주방, 욕실용품을 제외하고.
전에 쓰던 컴퓨터에 모니터와 키보드, 마우스 같은 주변용품.
방이 좁아 몇 안 되던 옷가지에, 케이론으로부터 선물 받은 빛나는 활과 아틀라스에게 받은 요상한 철패.
사실 짐이랄 것도 별로 없어서 그리 너저분해 보이진 않았지만.
지금 당장 가서 주문해도 가구가 들어오는데 며칠 걸릴 수 있으니, 가능한 빨리 사서 배송을 잡아놓는 편이 좋았다.
이렇게 넓은 데서 살다 보면 또 금방금방 짐이 늘어날지도 모를 노릇이었으니까.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그 얘긴 이제 나중에 하고. 우선 나가게 신발부터… 응?”
띵동-
그렇게 불만 가득한 얼굴로 볼을 부풀리는 루시오를 살살 달래고서, 막 밖으로 나서려던 찰나.
갑자기 울린 초인종 소리에 잠시 말을 멈춘 하준은, 이제 막 새집에 이사 온 터라 올 손님도 없을 텐데 누군가 하며 조심히 문을 열었다.
삑-
띠로리-
“누구세… 아.”
혹시 뭐 아파트 부녀회장이라도 찾아온 걸까.
아직 동사무소에 전입신고는커녕 용달도 안 불러서 경비실에 들르지도 않았는데.
희한함에 고개를 기울이며 문틈 사이로 머리를 내민 그는, 곧 가만히 문 앞에 서선 멍하니 저를 쳐다보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곤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안녕.”
익숙한 외모, 익숙한 목소리.
여전히 표정 하나 없는 인형 같은 얼굴을 한 여자를 마주한 하준은, 무미건조하게 내뱉은 인사에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그녀를 훑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여기 옆집에 살았던가.
그동안 일이 바빠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하준, 신발 다 신은 것입니닷! 하준?”
그사이 툴툴대면서도 금세 신발을 신고 나온 루시오는.
나갈 거라더니 문 앞에 서선 누군가와 대치하고 있는 하준을 발견하곤, 어인 일인가 빼꼼 바깥을 살폈다.
“아앗! 이 인간은!”
그리곤 이내 그와 마찬가지로 백아린을 보고 놀란 녀석은, 일전에 몇 번인가 마주쳤던 기억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저번에 집 보러 왔을 때랑 던전에 아레스 님의 검을 배달하러 갔을 때 본 그 인간인 것입니닷! 하준, 우리 이웃인 겁니깟?”
둘 다 잠깐 스쳐 지나가듯 봤을 뿐인지라 구면이라 하기에도 참 애매한 관계긴 했지만, 어째선지 하준이 유독 그녀를 껄끄러워했던 터라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헤파이스토스 님의 요청을 받아 하준과 함께하게 되기 전,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가 영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썩 기분이 달갑진 않았다.
“무슨 일이세요. 저희 지금 나가는 길인데. 별일 아니면 이만 비켜주시겠어요?”
그러거나 말 거나.
아까부터 묵묵히 저를 쳐다만 보고 있는 아린을 향해 손을 휘적인 하준은.
이상하게 그녀만 보면 왠지 앞으로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만 같은 예감에,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고자 했다.
아무래도 그 끈질기게 영입을 제안해오던 ‘영원’ 길드의 부길드장이라서 그런가.
“이거.”
허나 비키라는 손짓에도 되려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오는 아린의 행동에 흠칫 놀란 하준은.
뒤이어 문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무언가를 집어 들곤 제게 건네는 그녀를 보고선, 얼떨결에 그를 받아들었다.
“…뭡니까, 이게?”
“집들이 선물.”
집들이?
웬 뚱딴지같은 소리에 손에 쥔 물건을 확인한 그는, 30롤들이 두루마리 휴지를 고맙게 챙기면서도 참 요상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니, 집주인이 먼저 집들이하겠다고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누가 이삿날에 바로 집들이를 합니까, 집들이를?”
“…아니야?”
“당연히 아니죠.”
집들이도 뭐 집 안이 좀 정리되고, 전입신고니 뭐니 자잘한 볼일은 다 끝마치고 나서야 부르는 거지.
누가 막 이사 와서 어수선한 당일에 남을 들인단 말인가.
어째 가만 보면 볼수록 푼수 끼가 넘치는 아린의 모습에 어딘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지그시 그녀를 살피던 하준은, 곧 일전에 백반집에서 봤던 성준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지막이 침음을 내뱉었다.
이런 사람이 정말 부길드장이라니.
‘영원’길드, 괜찮은 건가?
“그럼, 이사 떡.”
“글쎄… 하. 요즘 누가 이사 떡을 돌립니까? 그것도 아파트에서.”
비록 제가 그쪽 길드원은 아니지만, 나름 괜찮은 조건에 가격을 후려치지도 않고 잘 배달을 맡겨준 정이 있는데.
자못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또 희한한 소리를 해대는 아린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주섬주섬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드는 그녀를 보고선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스럭-
“자.”
“…아니, 그걸 왜 그쪽이. 게다가 떡도 아니잖아요, 이거!”
떡이라더니.
그럴 거면 못해도 좀 비슷한 걸로 가져오던가.
하준은 척 봐도 아이스크림 종류만 서른 가지가 넘을 법한 프랜차이즈에서 사온 듯 보이는 용기를 내미는 아린을 보며, 슬슬 지끈거리는 머리에 파르르 떨리는 눈가를 꾹 짚었다.
“떡? 그거 먹는 겁니깟?”
“야! 넌 또 왜 그걸 준다고 해서 넙죽 받고 있어!”
그렇게 더 이상 대화를 계속해나가다가는 뒷목을 잡을 지경에, 아까 받은 휴지만 잽싸게 넣어놓고서 문을 닫고 밖에 나서려던 찰나.
그는 또 그걸 좋다고 받아서 뚜껑을 열어젖히는 루시오를 내려다보고선, 그만 포기한 듯 손잡이를 놓고 다시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야 하준이 오늘 이사 때문에 바쁘다고 아침도, 점심도 해주질 않아서 그런 것 아닙니깟! 함냠냠. 루시오는 지금 엄청엄청 배가 고프단… 구웨에엑!”
“야, 야! 바닥에 뱉지 마! 왜 그래?”
이윽고 결국 바라던 대로 제 집에 들어선 백아린과 함께, 잠시 아무것도 없는 거실 바닥에 앉아 허겁지겁 아이스크림을 퍼먹는 루시오를 지켜보던 하준은.
뭐가 문젠지 한 입 먹다 말고 곧장 내용물을 게워내려는 녀석을 보고선, 깜짝 놀라 손을 쭉 뻗어 그 입을 틀어막았다.
“으읍, 읍! 읍! 푸하!”
툭- 툭-
제발 놔달라는 듯.
우악스럽게 제 주둥이를 잡아챈 손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쓰던 루시오가, 기어코 내용물을 꿀꺽 삼키게 만든 하준은.
도대체 무얼 먹었기에 저리 몸부림을 치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아이스크림을 내려다보았다.
라면이고 짜장면이고, 어지간한 음식은 모두 세상 행복한 얼굴로 그릇까지 싹싹 긁어먹던 녀석이었는데.
“이, 이게 뭡니깟? 마치 초코를 먹고 바로 양치한 물을 가져다 꿀꺽 삼키는 거 같은, 이 엄청엄청 끔찍한 맛은! 인간들은 이런 것까지 좋다고 먹는 겁니깟?”
쏟아지는 악평에 말없이 그 안에 비친 초록색 아이스크림을 바라본 하준은.
방금 그 맛이 적잖이 충격이었는지 슬금슬금 발끝으로 통을 밀어내는 루시오를 보고선, 저도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민트 초코, 맛있는데.”
야심차게 준비한 제 선물이 이리 대놓고 거부당한 것이 못내 아쉬웠을까.
이전의 무표정은 어디가고 꽤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아린은, 한 숟갈 푸고 제게 돌아온 아이스크림을 들어 올리며 큼지막하게 한 입 민트초코를 오물거렸다.
“그래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저희 집에 쳐들어온 용건이 뭡니까?”
그에 제 옆에서 무슨 기인열전을 보는 듯한 루시오와 함께 가만히 백아린을 살피던 하준은.
이내 앉은 자리에서 아이스크림을 반쯤 비우다, 슬그머니 제 눈치를 보곤 뚜껑을 닫는 그녀를 보고선 천천히 본론으로 들어섰다.
설마하니 진짜 집들이 하나 하려고 이 난리를 피운 건 아닐 테고.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이사도 채 다 못 마친 저를 찾은 게 분명했으니까.
“집, 비워져 있대서. 나중에 보면 대신 부탁해 달라고 말했어.”
“부탁? 박성준 씨 말입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제야 속내를 털어놓는 아린을 보며 진지하게 자세를 잡은 하준은.
지난 의뢰도 난이도에 비해 보상이 썩 나쁘지 않았겠다, 곧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닦고선 말을 잇는 그녀를 보며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조사. 자세한 건 길드장한테. 보수는 섭섭지 않게 준댔어.”
조사.
자세한 건 길드장한테 가서 마저 들으라니 모르겠지만, 적어도 몬스터랑 치고받는 건 아니란 생각에 만족스레 고개를 주억인 그는.
섭섭지 않다는 보수에 씨익 기대된단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혹시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답니까?”
스윽-
“저번이랑 똑같이 20억? 으음. 이거, 그새 또 제 몸값이 올랐는데.”
이어진 물음에 대답 대신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는 아린을 바라본 하준은, 잠시 고민된다는 듯 턱을 쓰다듬으며 현재 백만이 넘게 쌓여 있는 포인트 창을 슬쩍 살폈다.
그때야 단순히 배 타고 물건만 지키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20억 받고 움직였다지마는.
직접 발 벗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조사를 다니는 것은 애당초 배달기사가 할 일도…
“두 배.”
“…두 배?”
허나 고민도 잠시.
제 말을 정정하듯 고개를 저으며 쭉 펼친 손가락을 강조해 보이는 그녀를 본 하준은.
곧 따라붙은 한 마디에 활짝 미소를 지으며 바닥을 박차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성준 씨, 지금 어디 있다고요?”
두 배는 못 참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