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ne Deliver RAW novel - Chapter (75)
신들의 배달기사(75)
“하준, 정말 이쪽으로 가는 게 맞습니깟?”
어둑어둑 해가 다 저물어가는 저녁.
결국 헤파이스토스의 부탁을 받고서 크레타섬으로 향한 하준은, 어느새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바다를 보고선 난감한 얼굴로 침음을 흘렸다.
“으음, 이상하다. 분명 내비대로 왔는데.”
혹 길을 잘못 든 건 아닐까.
다시 스마트폰에 찍힌 경로를 살펴도 보았지만, 화면은 여전히 저 바다 너머를 가리키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저길 건너야 하나 본데?”
얼마나 지났을까.
누가 그리스 신화 아니랄까 봐, 저물어가는 석양 속에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는 바다를 멍하니 내다보던 그는.
이내 체념한 듯한 눈빛으로 루시오를 돌아보았다.
“하준. 이 쌩쌩이, 바다는 못 타는 겁니깟?”
“되겠냐? 무슨 수륙양용도 아니고.”
실없는 소리에 피식하곤 웃음을 터트린 하준은, 어찌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맑은 하늘에 그림자도 안 보이는 섬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헤파이스토스 님은 도대체 왜 이런 데다 내려주신 건지.’
기왕 보내줄 거, 그냥 좀 편하게 섬 안에다 떨궈주면 좋으련만.
배도 없는데 졸지에 이 먼 거리를 헤엄쳐 가게 생긴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점을 뒤적이며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이 있나 찾아보았다.
-테세우스의 배[30,000,000p]
-아르고호[50,000,000p]
-노아의 방주[100,000,000p]
“……이건 뭐, 그냥 타지 말라는 소리구만.”
터무니없는 가격에 말문이 턱 막힌 하준은, 자그마치 백만 포인트가 넘게 있는데도 엄두도 못 낼 물건들을 바라보며 힘없이 창을 닫았다.
언제는 뭐, 배달이 안 풀릴 때면 포인트 상점을 이용해보라더니.
곡괭이 같은 건 저렴한 값에 1회용으로 잘만 팔면서도, 왜 이런 건 또 수천만짜리 진품밖에 없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갈 따름이었다.
“그래서 이제 어떡할 겁니깟, 하준?”
“……어떡하긴, 가서 발품이라도 팔아봐야지.”
루시오의 물음에 다시 스쿠터에 올라탄 하준은, 저 멀리 언덕 아래 내려다보이는 도시를 보고선 핸들을 잡았다.
내비가 가르쳐주는 경로랑 겹치질 않아서 둘러볼 생각도 못 했건만, 아무래도 일단 저리로 들어가서 무언가 대책을 강구해봐야 할 것 같았다.
슬쩍 봐도 규모가 그리 작아 보이진 않았던 데다가, 못해도 바닷가에 붙어 있는 곳이니만큼 항구가 있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끼이익-
털- 털- 털-
비교적 완만한 산길을 타고 빙 둘러 내려와 마을 근처에 도착한 그는, 적당한 곳에 스쿠터를 멈춰 세우곤 배달통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스윽-
“이야, 이거는 정말 몇 번을 봐도 신기하다니까.”
“그러니까 마법의 주머니인 거 아니겠습니깟?”
그대로 입구를 넓게 벌려 핸들 쪽에 툭 가져다 댄 하준은, 곧 하수구에 물이 빠지듯 주머니 안으로 쏙 빨려 들어가는 스쿠터를 보고선 나지막이 감탄을 내뱉었다.
‘확실히, 그 고생을 하면서 드레이크를 잡은 보람이 있다니까.’
저벅-
이윽고 스쿠터가 들어간 주머니를 허리에 찬 그는,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따라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와, 어째 위에서 봤을 때보다 규모가 훨씬 큰 거 같은…….”
“정지, 정지!”
척-
그렇게 생각보다 높고 기다란 성벽에, 적어도 항구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는 마음으로 편히 입구로 들어서려던 찰나.
난데없이 제 앞을 가로막은 창대에 흠칫 멈춰 선 하준은, 양옆에서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는 경비를 보고선 식은땀을 주룩 흘렸다.
“넌 웬 놈이냐! 이곳에 온 목적과 출신을 밝혀라!”
“……예? 아, 아니, 왜 그러세요?”
조금 전에 멀리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는 걸 봤을 때는 별일 없이 그냥 보내주는 거 같더니만.
유독 자신한테만 과하게 반응하는 모습에 당황한 얼굴로 뒷걸음친 그는, 그 순간 뒤에서 꾹꾹 제 옷깃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슬그머니 눈길을 돌렸다.
“이거, 이거 때문입니닷.”
“뭐? 이거라니……. 옷?”
뒤이어 보란 듯이 집어 든 옷깃을 펄럭이는 루시오에, 주변을 둘러본 하준은.
과연 그 말마따나 홀로 이질적인 저와 녀석의 차림새를 보고선, 나지막이 침음을 내뱉었다.
스윽-
대답 없이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모습이 더욱 수상해 보였던 걸까.
천천히 목을 향해 내려오는 창날에 마른침을 삼킨 그는.
곧 살결을 스치는 차가운 쇠붙이에, 퍼뜩 정신을 차리곤 입을 열었다.
“크, 크레타섬! 크레타섬으로 가는 배를 구하러 왔습니다!”
“……크레타섬?”
슥-
이내 찡그린 눈살과 함께 살짝 거두어지는 창날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쉰 하준은.
마치 커다란 천 하나를 둘러맨 듯한 모양새의 의복에, 다들 한쪽 팔을 내어놓고 다니는 것을 보고선 지끈거리는 눈을 감았다.
지금껏 신이나 영웅들만 상대할 줄 알았지, 신화 속에 배경처럼 나오는 민간인들과 부딪칠 일은 없을 줄 알았기에, 당연히 복장 같은 건 딱히 신경도 안 쓰고 다녔건만.
설마 그것이 이렇게 발목을 잡게 될 줄이야.
다음부턴 어디서 시대에 걸맞은 옷가지라도 하나 챙겨 다니든 해야지.
“그, 혹시, 실례지만 귀인의 존함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예?”
하나 속으로 한탄도 잠시.
인제 와서 갑자기 자세를 낮추며 공손하게 물어오는 경비들의 모습에 가만히 눈을 끔뻑인 그는.
혹여 일이 잘못됐을까,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제 눈치를 살피는 그들을 보고선 무슨 일인가 주변을 훑었다.
‘뭐야? 딱히 달라진 건 없는 거 같은데…….’
“흠흠!”
그렇게 통 요상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자못 의심스러운 눈으로 경비를 흘기던 그때.
누군가 목을 가다듬는 소리에 조용히 뒤를 돌아본 하준은.
입가에 주먹을 올린 채 앞으로 나서는 루시오를 보고선, 멀뚱히 녀석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헤파이스토스 님의 명을 받아, 크레타섬에 일어난 변고를 확인하러 온 겁니닷! 그런데 주신님의 말씀을 받들러 온 우리를 성심성의껏 돕지는 못할망정, 입구에서부터 이렇게 천대하다닛! 정녕 천벌이 두렵지 않은 것입니깟!”
“니, 님프?”
“헤파이스토스 님의 명이라니…….”
당당하게 사람들의 이목이 끌린 자리에 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저들이 내려온 목적을 밝힌 루시오는.
곧 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에 한 발짝 더 걸음을 내디디며, 얼른 자리를 비키라는 듯 매서운 눈길로 경비를 쏘아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가 영웅님을 못 알아 뵙고 큰 결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텅그렁-
이윽고 들고 있던 창도 멀리 내던지고서, 황급히 바짝 엎드린 경비를 살핀 하준은.
잔뜩 겁을 먹어 사색이 된 얼굴로 벌벌 떨고 있는 둘을 보고선, 제법 의외란 눈빛으로 루시오를 내려다보았다.
“흥! 앞으론 조금 수상해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함부로 날을 세우지 않는 것입니닷!”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영웅님 말씀, 뼛속 깊이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님프는 신과 영웅들 곁에서 평생 그들을 도우며 살아가는 종족이라 했던가.
아무래도 그 사실은 비단 올림포스에만 퍼져 있는 것이 아닌 듯, 다들 순식간에 경외와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곳에선 님프가 영웅의 신분을 보장하는 보증수표로서의 역할도 맡는 걸까.
하긴, 그러고 보니 파라오도 케이론도 제가 루시오를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보곤 깜짝 놀랐었지.
‘……나 참,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을 줄이야. 아까는 괜히 쫄았네.’
“에헴! 어떻습니깟?”
“잘했어. 돌아가면 또 치킨이라도 먹을까?”
“앗! 이번엔 치킨 말고 다른 게 좋은 것입니닷!”
아무튼.
덕분에 훤히 열린 길을 보며, 성큼성큼 안으로 발길을 옮긴 하준은.
어깨가 으쓱 올라간 루시오를 향해 대견하다는 듯 엄지를 치켜세우며, 성문을 지나쳤다.
아니, 지나치려 했다.
“자, 잠깐!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영웅님!”
방금 성문을 지키던 경비 하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저들을 멈춰 세우기 전까진.
“인간, 아직도 뭔가 할 말이 남은 겁니깟?”
“그만해, 인마. 이제.”
콩-
“아읏! 갑자기 왜 그러는 겁니깟, 하준!”
이어서 싹 표정을 굳히며 또 겁을 주려는 님프를 향해, 매콤하게 꿀밤을 먹인 그는.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얼어붙은 경비를 보고선 친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아, 예! 저, 그것이…….”
혹 조금 전에 무례하게 군 탓에 보복이 떨어지진 않을까, 오들오들 떨며 식은땀을 흘리던 남자는.
곧 옅은 미소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용건을 꺼내었다.
“다름이 아니라, 영웅님께서 크레타섬으로 가신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네. 그런데 건너갈 방법이 없어서, 배를 좀 구할 수 있을까 하고 이리로 들어왔습니다.”
“아! 역시 그러셨군요!”
역시 그랬다니?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경비의 모습에, 어리둥절하니 고개를 갸웃한 하준은.
무슨 문제라도 있나 조용히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실은 그 배 말입니다. 아마 당분간 민간에서 배편을 구하기란 어려우실 겁니다. 아침에 미노스 왕이 보낸 사자가 저희 부두에 도착해서,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왕도로 향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깔렸거든요.”
크레타섬에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이 틀림없다.
본디 제삿날엔 새벽부터 연기가 바다 건너까지 비칠 정도로 자욱하게 올라와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덕분에 정확히 뭔 일이 생겼는지를 알아내기 전까진, 선주들이 크레타섬으로 향하는 배를 띄우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하준은.
황당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예 못 가는 거예요, 지금은?”
“그 먼 데를 다 헤엄쳐서 가야 하는 겁니깟?”
어쩐지 이번엔 쓸데없이 기한을 닷새나 퍼주더라니.
기껏 코앞까지 왔는데 섬으로 가는 배가 없다는 이야기에 절망한 그는, 아까 해안에서 거의 200km 가까이 잡혔던 거리를 떠올리며 허탈함에 실소를 터트렸다.
어떡하지.
인제 와서 콜을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한데,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예?”
막막함에 지그시 미간을 누르던 하준은, 다행스럽게도 해답을 알고 있는 듯 보이는 경비를 보고선.
반가운 눈빛으로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럼 그 방법이 대체 뭡니까!”
방법이 있다면 그게 지푸라기든 뭐든 반드시 잡아야만 했다.
안 그러면 조만간 제 머리에 천벌이 뚝 떨어지게 생겼으니까.
“주점.”
그에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경비는, 길거리 어느 한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주점이요?”
상점가인 듯 드문드문 깔아둔 과일과 채소들이 보이는 거리, 그 모퉁이에 선 낡은 건물.
“주점으로 가보십시오.”
하준은 그 앞에 잔뜩 줄지어 선 의미 불명의 행렬을 바라보며, 묵묵히 고개를 주억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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