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ne Deliver RAW novel - Chapter (76)
신들의 배달기사(76)
“하준, 언제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하는 겁니깟? 그냥 먼저 들어가면 안 됩니깟?”
경비가 전해준 정보에 따라, 주점 앞에 길게 늘어선 대열에 합류한 지도 수 시간.
캄캄하다 못해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하는 점포에, 슬그머니 주점 안을 들여다보는 횟수가 늘어날 때쯤.
슬슬 인내심이 다했는지 투덜거리는 루시오를 돌아본 하준은, 입술을 삐죽 내밀곤 한 발로 툭툭 바닥을 차고 있는 녀석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더 참아.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잖아.”
“……그치만, 벌써 두 시간도 넘게 기다린 겁니닷. 이러다 크레타섬으로 가기도 전에 지쳐 쓰러질지도 모르는 것입니닷!”
해가 다 떨어져서 그런가.
루시오는 이제 제법 쌀쌀하기까지 한 날씨에 몸을 떨며, 말과 달리 아직도 스물은 되어 보이는 줄을 훑었다.
“그, 괜찮으시면 제 앞으로라도…….”
“아뇨, 아뇨. 괜찮아요. 야! 너 때문에 괜히 다들 불편해하시잖아.”
그 모습에 눈치가 보인 걸까.
슬쩍 제 쪽을 돌아보며 한 발짝 옆으로 물러나는 앞사람을 바라본 하준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제 옆에 붙은 님프를 홱 노려봤다.
아무리 힘들어도 다들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린 건 마찬가지일 텐데.
어차피 조금 빨리 움직인다 하더라도 시간이 늦어서 배를 띄울 수도 없는 마당에, 굳이 줄을 어겨 가면서까지 먼저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저 안에 도대체 누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기다리게 만들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저를 섬으로 데려다줄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에게 가능한 한 나쁜 인상을 심어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저희가 여기 있는 게 더 불편할 거란 생각은 안 듭니깟?”
끼이익-
그렇게 뾰로통 불만스러운 얼굴로 툴툴대면서도, 더 이상 긴말 않고 가만히 있어 주는 루시오와 마저 줄을 서기를 수십 분.
“흐윽!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단련해놓는 거였는데!”
타다닥-
오랜 기다림 끝에 활짝 열린 문을 마주한 하준은, 곧 안에서 거칠게 뛰쳐나오는 남자를 보곤 고개를 기울였다.
“아까부터 다들 왜 저런대? 도대체 안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실망 가득한 목소리로 눈앞을 가리며 저 멀리 사라져가는 사내를 가만히 지켜보던 그는, 이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루시오를 내려다보았다.
“으음, 아무래도 안에 어떤 영웅님이 동료를 모으고 계시는 모양입니닷.”
“영웅?”
“그렇습니닷. 모름지기 남자라면 한 번쯤 원대한 모험을 꿈꿔본다지 않습니깟? 물론 단순히 그런 바람 말고, 현실적인 이유도 있는 것입니닷. 엄청 엄청 대단한 영웅님의 동료가 돼서 같이 여정에 나설 수만 있다면, 앞으로 무척이나 유명해질 수 있으니까 말입니닷.”
그에 고민 끝에 조용히 답을 내놓은 루시오는, 이미 머릿속으로 짐작이 가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성큼성큼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유명세라. 간단히 말해서 그냥 출세의 동아줄 같은 느낌이구만.’
“이번에도 꽝인가. 이러다 또 혼자 가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이윽고 녀석을 따라 주점 안쪽으로 발길을 옮긴 하준은.
전세라도 냈는지 텅 빈 가게 가운데,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는 누군가를 보며 어색하니 고개를 숙였다.
“저, 안녕하세요. 이리로 가면 크레타섬으로 가는 배를 구할 수 있다고 해서 왔는데.”
화려한 금발에 진한 에메랄드빛 눈동자.
여태껏 만나온 영웅들과 달리, 비교적 얄쌍한 체구의 미남.
“아. 그래, 다음……. 응? 그쪽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테이블에 얼굴을 묻은 채 한숨을 푹 내쉬는 남자를 마주한 하준은, 곧 자못 놀란 눈빛으로 저를 살피는 그를 보고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혹시, 이하준?”
“예? 저를 아세요?”
뒤이어 영웅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뜬 그는, 혹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 머리를 굴리며 나지막이 침음을 내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늘 처음 보는 거 같은데.
“역시! 보기 드물게 신기한 옷을 걸치고 있다 했더니. 네가 선장이 말한 그 신진 영웅이구나!”
“……선장, 이요?”
선장.
남자의 말에 알 듯 말 듯 고개를 기울인 하준은, 툭툭 저를 두드리는 손길에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다.
“이아손 님 말입니닷, 이아손 님.”
“아! 이아손 님!”
이아손.
루시오의 얘기에 곧장 시대에 맞지 않게 멀끔하니 정장을 입고 다니던 영웅을 떠올린 그는, 그날 아찔했던 부탁을 기억하며 식은땀을 주룩 흘렸다.
하마터면 세이렌한테 수장당할 뻔했었지.
그래도 포인트는 많이 벌었지만.
“그런데 신진 영웅이라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렇게 잠시 고개를 주억인 하준은, 이내 또 마음에 걸리는 이야기를 되짚으며 말을 물었다.
신진 영웅이라니.
설마 그거, 저보고 한 소린가?
“하하하! 듣던 대로 재미있는 친구네. 선장이 매번 볼 때마다 질리게 얘기를 꺼낸 이유가 있어.”
정말 모르겠다는 듯, 멀뚱히 눈을 끔뻑이는 그의 모습에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영웅은.
삐죽 나온 눈물을 슥 닦으며 마저 말을 이었다.
“혼자서 그 까다로운 세이렌 동굴을 개척하고, 스승님의 다리를 고치기 위해 맨몸으로 히드라의 독까지 얻어 와 놓고서 모른 척은. 듣자 하니 요번엔 북유럽 놈들을 대신해서 헬헤임까지 갔다 왔다며?”
자신이 몸담았던 아르고 원정대도 함부로 정면에서 맞붙을 생각은 못 한 데다가, 그 오르페우스조차 노랫소리로 쫓아내기만 일쑤였던 세이렌을 부족 단위로 토벌한 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저 드높은 올림포스의 수호신이 되어버린 대영웅, 헤라클레스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마주할 엄두조차 못 냈던 히드라를 상대로 당당히 독을 얻어낸 존재.
“하물며 그게 몇 년도 아니고 고작 몇 개월 만에 이뤄낸 거라니. 넌 이미 유명 인사야. 적어도 이 바닥에서 네 업적을 모르는 녀석은 없을걸? 아직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지만.”
“그, 그렇습니까?”
남자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음유시인의 입을 통해 회자되고 있을지 모를 하준의 업적을 기억하며,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머리만 긁적이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당장이야 자신이 벌여온 일이 얼마나 대단한 것들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깨닫게 될 터였다.
소문은 빛보다 빠르다고들 하니까.
“루, 루시오는! 혹시 루시오에 대한 얘기는 없었습니깟!”
이윽고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루시오는, 곧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소문에 대해 더욱 자세히 물었다.
지금껏 남자의 입에서 나온 업적들 모두 저 또한 하준과 함께했던 여정이니만큼, 어쩌면 자신의 얘기 또한 들어있을지도 모를 노릇이고.
그렇다면 이는 가문의 자랑, 아니, 제가 나고 자란 도랑을 넘어 개울 전체의 자랑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응? 하하…… 글쎄. 그 떠오르는 영웅 곁에 항상 같이 다니는 님프가 있다는 말은 들었던 거 같은데.”
“……어째서 루시오는 그냥 평범한 동행인 취급인 겁니깟? 그때 세이렌 공주도 루시오가 마무리했는데 말입니닷!”
하나 고향에 돌아가면 떵떵거리며 모두에게 선망의 눈빛을 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잠시.
돌아온 대답에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크게 실망한 녀석은, 이내 억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물었다.
진짜 진짜 열심히 도왔는데.
“……저, 그런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귀인께서 누구신지 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루시오 혼자 부푼 꿈을 꾸고, 마주한 현실에 제멋대로 축 늘어지는 사이.
또 다른 고민에 속으로 끙끙 앓던 하준은, 곧 굉장히 미안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이아손을 선장으로 부르는 걸 보아하니, 그의 원정대에 속해 있던 사람일 테고.
또 케이론을 스승이라 하는 걸 보니, 그의 밑에서 수학한 제자 중 하나일 텐데.
“어, 어?”
인제 와서 차마 이런 질문이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
영웅은 꽤나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하, 하준! 정말로 몰라서 그러는 겁니깟? 누가 봐도 테세우스 님이시잖습니깟, 테세우스 님!”
“……테세우스? 아, 아! 그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한!”
테세우스.
충격적인 물음에 화들짝 놀라 자신을 말리고 선 루시오를 돌아본 하준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손뼉을 치며 고개를 주억였다.
“스읍. 이거 참, 당연히 알고 만나러 온 줄 알았는데. 요새 활동이 좀 뜸했나? 나도 좀 분발해야겠는데.”
“아, 아이고! 아닙니다! 그냥 제가 좀 그런 쪽으로 아는 게 없어서…….”
“맞습니닷! 하준은 그 아레스 님도 못 알아보는 바보니까, 너무 그렇게 마음 쓰실 필요 없는 겁니닷!”
조금 실망한 듯한 테세우스의 반응에 잽싸게 손사래를 친 하준은.
슬금슬금 그의 안색을 살피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거, 많이 화났으면 어떡하지?
“아하하! 장난이야, 장난! 실은 그것도 이미 선장한테 들었으니까.”
혹 그 때문에 배를 빌리지 못하는 건 아닐까, 잠시 걱정에 빠진 하준은.
다행스럽게도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넘어가 주는 테세우스를 보고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게 영웅의 배포인가.
“그보다, 이제 슬슬 일 얘기를 좀 나눠봤으면 하는데.”
드륵-
뒤이어 금방 웃음을 가라앉힌 테세우스는,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며 맞은편 의자를 밀어냈다.
“아, 예. 일 얘기라고 하심은…….”
배려에 맞춰 곧장 자리에 앉은 하준은, 사뭇 진지해진 그의 표정을 보고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잠깐.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이거.”
툭-
그리곤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린 테세우스를 보며, 조심스레 종이를 집어 든 그는.
그 가운데 찍힌 인장과 함께, 짤막하게 적힌 글자를 보고선 나지막이 침음을 삼켰다.
“루시오, 이거 뭐라고…….”
“크레타섬, 라비린토스의 악몽이 되살아났다고 적혀있는 겁니닷.”
라비린토스의 악몽.
그리스 문자를 읽을 줄 모르는 저를 대신해, 곧바로 눈치 좋게 내용을 읽어주는 님프를 돌아본 하준은.
바로 오늘,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에 주먹을 꾹 쥐었다.
“으흠. 아무튼, 여기 적힌 대로 이번에 미노타우로스를 잡으러 갈 동료를 구하고 있는데.”
뒤이어 헛기침과 함께 슬그머니 제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내는 테세우스를 돌아본 그는.
기어코 우려했던 상황에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능하면 또 싸우는 일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가시죠.”
역시, 세상사 그리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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