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ne Deliver RAW novel - Chapter (77)
신들의 배달기사(77)
“루시오.”
“으응……. 5분만, 5분만 더 자는 것입니닷.”
“5분은 무슨. 조금 있으면 배 뜨니까, 그만 어리광 부리고 일어나.”
이른 새벽.
해가 뜨기도 전에 먼저 잠에서 깬 하준은.
슬슬 다가오는 약속 시각을 바라보며, 여전히 침대 위에 늘어진 루시오를 흔들어 깨웠다.
“하아암. 뱃사람들은 잠도 없답니깟? 아직 바깥이 이렇게 깜깜한데.”
“언제 출발하든 그거야 선주 마음이지. 얻어 타는 주제에 무슨 불만이 있겠냐. 됐으니까, 얼른 일어나서 씻고 준비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꾸물대는 녀석을 두고서 주머니를 챙긴 그는.
저 멀리 창밖에 비치는 바다를 내다보며, 전날 테세우스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배는 새벽 일찍 출발할 거니까, 먼저 들어가서 푹 자두도록 해. 나는 혹시 모를 동료를 위해, 줄이 끝날 때까진 자리를 지켜야 할 거 같으니까.」
「아, 예.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미노타우로스라면 분명 테세우스 님께서 예전에 토벌하시지 않으셨나요?」
「……그랬었지.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야.」
미노타우로스.
감히 제물로서 신의 눈을 속이려 든 대가로, 크레타섬에 내린 천벌이자.
차마 입에 담기조차 두려운 더럽고 추악한 금기로 인해 태어난, 미노스 왕가의 치부.
이야기에 따르면 벌써 오래전에 싸늘한 주검이 되어, 라비린토스 밑바닥에 묻혀 있어야 할 괴물이.
어째서 말짱히 살아나 다시금 크레타 왕국을 악몽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가.
「실은, 그래서 이번 여정을 좀 서두른 거기도 해. 가능하면 내 손으로 확실히 마무리 짓고 싶었거든.」
「예? 그러면 굳이 이렇게 일행을 구하실 필요가…….」
「없지. 그렇게 생각했어. 도중에 헤라클레스가 보낸 전령한테 그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이후, 바깥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비웠던 하준은.
채 못다 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나지막이 침음을 내뱉었다.
도대체 그는 헤라클레스로부터 무슨 말을 전해 들었던 걸까.
왜 혼자서도 능히 쓰러트렸던 미노타우로스를 잡으러 가는 길에, 굳이 사람을 더 들이기로 마음을 바꾼 것일까.
‘……혹시, 헤파이스토스 님께서 하신 얘기와 관련이 있는 건가?’
올림포스에서 주문을 받고 내려오기 전.
헤파이스토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린 그는.
요번 일이 그놈의 일곱 어쩌고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던 이야기를 기억하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보니 헤라클레스도 올림포스의 신들 중에선, 가장 먼저 그 소식을 접한 인물이었던가.
일전에 제 입으로 직접, 아틀라스로부터 들었던 얘기를 전해줬었지.
“하준! 준비 끝난 것입니닷!”
“어? 아, 그래. 다 됐으면 얼른 가자.”
끼이익-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덧 준비를 마치고 제 옆에 선 루시오를 돌아본 하준은, 곧바로 녀석과 함께 여관을 나서 약속한 부두로 걸음을 옮겼다.
“테세우스 님!”
금세 해안에 도착해 근처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저 멀리 혼자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인영들을 보고선 배를 찾았다.
“읏차. 왔어? 그렇지 않아도 슬슬 이것만 마무리하고 찾으러 가려 했는데. 금방 끝나니까, 먼저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어. 방은 위에서 안내해줄 거야.”
“아, 네.”
무얼 그리 잔뜩 싣는 걸까.
벌써 한가득 실린 상자들을 보며 선상에 올라선 하준은.
누가 영웅이 모는 배 아니랄까 봐, 제법 널찍한 갑판을 보며 나지막이 감탄을 흘렸다.
“이야, 멀리서 봤을 때도 장난 아니다 싶었는데. 여기서 보니까 더 엄청나네.”
“루시오도 이렇게 엄청 엄청 큰 배는 처음 타보는 것입니닷!”
현대에 있는 크루즈나 군용 함선, 혹은 거대한 화물선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시대에 비추어봤을 때, 가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규모였다.
적어도 그 크기만을 놓고 보자면, 이상하리만치 현대화되어 있던 이아손의 배들과 거의 견주어볼 수 있는 사이즈였으니까.
한때 같은 원정대 소속이었어서 그런가.
“흐흥. 그야 당연한 거 아닙니깟? 이게 어떤 분의 배라고 생각하는 겁니깟!”
“응?”
그렇게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던 그때.
카랑카랑하게 귀를 때리는 소리에 조용히 눈살을 찌푸린 하준은, 슬그머니 제 옆에 선 루시오를 훑었다.
“왜 여길 보는 겁니깟, 하준? 루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입니닷.”
이윽고 자긴 아니라는 듯, 멀뚱히 눈을 깜빡이는 녀석을 살핀 그는.
진심인 듯 전혀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를 보고선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하다.
이 귀 따가운 하이 톤은 분명 님프한테서나 들을 법한 소리였는데.
“이쪽입니닷, 이쪽!”
이내 또 한 번 들려오는 얘기에 뒤를 돌아본 하준은,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을 찾고선 동그랗게 눈을 떴다.
“흥! 누가 촌뜨기 도랑 출신 님프랑 그 주인 아니랄까 봐, 고작 배 하나 가지고 정신을 못 차리는 겁니닷!”
전날 낮에 본 바다가 떠오르는 에메랄드빛 머리와 눈동자.
루시오보다 조금 더 작은 키에, 비교적 날카롭고 소년 같은 인상의 님프.
“앗! 루보르! 진짜 진짜 오래간만인 겁니닷!”
아는 사이인 듯,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루시오를 바라본 하준은.
자못 신기한 눈빛으로 두 녀석을 살폈다.
자신도 루시오 외에 다른 님프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저번에 영웅님한테 불렸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게 테세우스 님이었던 겁니깟? 진짜 진짜 잘된 것입니닷!”
“이익! 함부로 아는 척하지 마는 겁니닷! 촌뜨기 님프!”
가능한 한 명망 높은 신이나 영웅의 밑에서 일하는 것이, 저들에게 있어 가장 큰 영광이라 했던가.
지인의 성공에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듯한 루시오와, 그런 녀석을 부담스러운 얼굴로 밀어내는 루보르를 가만히 지켜보던 하준은.
마치 사이좋은 남매와 같은 그 모습에, 흐뭇하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나저나 루시오 이 자식, 매번 자기가 님프치고는 장신이 어쩌고 하더니만.
그게 마냥 헛소리는 아니었나 보네.
저벅-
“……루보르, 내 분명 올라오는 손님이 있으면 곧장 방으로 안내해 드리라고 일렀건만. 아직도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테, 테세우스 님! 그게…….”
하나 반가움에 서로 티격태격하기도 잠시.
그새 선적을 마치고 올라온 테세우스를 보고선, 새하얗게 질린 루보르는.
우물쭈물 말을 더듬으며 조용히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고! 아닙니다, 테세우스 님! 그냥 애들끼리 아는 사이 같길래, 제가 잠깐 얘기 좀 나누고 있으라고 한 거예요.”
뒤이어 뚝뚝, 그 아래로 떨어진 눈물을 본 하준은.
황급히 둘 사이에 끼어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신이나 영웅을 도우며 살아가는 게 그리 영광인 녀석인데, 제가 모시는 영웅에게 질책을 당하면 얼마나 상처가 되겠는가.
하물며 그게 명망 높은 테세우스라면 말이다.
“아, 그래? 하하! 난 또. 미안하다, 루보르. 아무튼 이제 곧 출항할 거니까, 회포는 나중에 풀라고 하고. 먼저 방에 들어가서 좀 쉬고 있어. 자세한 건 이따 도착해서 얘기하자고.”
“예, 예. 그럼 이제 안내 좀 부탁해도 될까?”
“……아! 이, 이쪽으로 오시면 되는 겁니닷!”
무사히 잘 넘어간 듯 미소를 지으며 안쪽으로 사라지는 테세우스를 바라보던 그는.
이내 슥슥 눈가를 닦으며 선실로 향하는 루보르를 따라, 천천히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 이 방을 쓰시면 되는 겁니닷!”
곧 복도 끄트머리에 위치한 방으로 안내를 받은 하준은.
금세 씩씩하게 돌아온 녀석을 보며 피식하곤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금방 기운을 차려서 다행이네.
끼이익-
“와, 방 되게 괜찮은데?”
“어제 묵었던 여관보다 훨씬 좋은 거 같습니닷!”
이윽고 루보르가 낑낑거리며 열어준 문 사이로, 한 발짝 안으로 들어선 그는.
생각보다 넓고 쾌적한 방을 보고선 휘둥그레 눈을 떴다.
아무리 배가 커도 선실은 그저 그럴 줄 알았는데.
테세우스가 일부러 가장 좋은 방이라도 내준 건지, 원한다면 안에서 아주 뛰어놀아도 될 정도였다.
“저, 저기!”
그렇게 연신 감탄을 내뱉으며, 슬슬 출발하는 듯 창밖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풍경을 내다보던 찰나.
조심스레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하준은, 무언가 할 말이 남은 듯 문 앞에 선 루보르를 발견하곤 가만히 눈을 끔뻑였다.
“아까는 정말 정말 감사했던 겁니닷!”
이어서 꾸벅 허리를 숙여오는 녀석을 마주한 그는.
씨익 웃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냐, 아냐. 괜찮아. 루시오 친구면 나한테도 동생이나 다름없는데 뭘.”
“그렇습니닷! 그러니까 걱정 말고…… 아니, 그런데 왜 루시오의 친구가 하준한테 동생이 되는 겁니깟?”
딱히 그 한마디 해주는 게 어려웠던 것도 아니고.
괜스레 거기서 분위기가 안 좋아지면, 루시오는 물론 저 또한 기분이 찝찝했을 테니.
그냥 적당히 상황을 넘기기로 한 것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말만 안 했다 뿐이지, 둘이 얘기하는 걸 계속 지켜보고 싶어서 얌전히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루시오, 진짜 진짜 좋은 영웅님을 만난 것입니닷.”
그에 장난스럽게 하준과 티격태격하는 루시오를 보며, 부럽다는 눈으로 녀석을 올려다본 루보르는.
곧 씁쓸한 미소와 함께 문고리를 잡으며 이만 밖으로 나섰다.
“쟤 갑자기 왜 저러니? 혹시 테세우스 님이 막 못되게 구시는 건 아니겠지? 별로 그럴 분 같지는 않던데.”
“아마 그런 건 아닐 겁니닷. 루시오가 아직 도랑에 있을 때부터, 테세우스 님은 저희들한테 잘해주시기로 소문이 자자하셨으니깟.”
그런 녀석의 모습에 괜히 걱정된다는 듯 닫힌 문을 쳐다본 하준은.
덤덤한 얼굴로 지그시 고개를 젓는 루시오를 보고는 가만히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 잘해주면 대체 왜?
“하지만 그래도 님프는 님프인 겁니닷. 잘해야 조금 쓸 만한 시종 정도. 그러니까, 하준은 되게 되게 특이한 것입니닷.”
“그러니까, 알면 좀 잘하란 말이야. 인마.”
“……루시오는 헤파이스토스 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함께한 거니까, 사정이 다른 겁니닷!”
이어진 설명에 헤파이스토스도 그렇고 케이론도 그렇고, 대부분 물건처럼 님프들을 여기던 신과 영웅들을 떠올린 그는.
그저 안타까움에 조용히 침음을 내뱉었다.
하긴, 애당초 그리스 신화는 노예제도도 너무나 당연한 시대의 이야기였으니.
똑똑똑-
“이제 곧 크레타섬에 도착하는 겁니닷!”
이후, 안쓰러운 마음을 날린 채 창가를 내다보며 시간을 죽치길 몇 시간.
노크 소리와 함께 돌아온 루보르를 본 하준은, 곧장 주머니를 챙기곤 선실 밖으로 발을 움직였다.
“루시오, 다 도착했단다. 나갈 준비 해.”
“이미 준비 만반인 것입니닷!”
크레타섬의 괴물.
라비린토스의 악몽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