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ne Deliver RAW novel - Chapter (82)
신들의 배달기사(82)
“도대체 언제 오는 겁니깟, 하준.”
컴컴한 미궁.
하준의 부탁으로 미노스 왕을 업고선, 가능한 한 멀리 도망친 루시오는.
중간중간 계속해서 들려오는 굉음에, 불안한 표정으로 지나온 길을 흘겼다.
“설마, 또 싸우고 있는 겁니깟?”
콰아아아앙-!
분명 제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할 때까지, 잠깐 시간만 끌 거라고 해놓고.
도무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이는 소음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벽 너머를 바라본 님프는, 이내 분한 얼굴로 입술을 꾹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도우러 가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방법이 없었다.
여기가 어디 물가라든가, 아니면 하준이 무슨 신기를 이용해 싸우고 있는 거라면 또 모를까.
둘 중 아무것도 아닌 상황에서 무작정 돕겠답시고 끼어들어봐야, 옆에서 발목이나 붙잡지 않으면 다행이었으니까.
저벅-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미노스 왕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바닥에 잘 눕혀놓고, 안절부절 통로를 살피던 루시오는.
어느덧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하준?”
어떻게, 잘 도망친 걸까.
반짝이는 눈으로 깜깜한 어둠 속을 지그시 바라보던 님프는.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표정을 굳히며,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루시오!”
“……하준!”
하나 그것도 잠시.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슬그머니 미노스 왕을 다시 업어 들던 루시오는, 순간 통로에 울려 퍼지는 익숙한 음성에 환한 얼굴로 달려 나갔다.
“하준! 괜찮습니깟?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깟?”
곧 꺾어지는 골목 쪽에서 불그스름하게 들어오는 빛과 동시에, 코너를 돌아 하준과 마주친 녀석은.
군데군데 피 묻은 그의 차림새를 보고선, 자못 근심 어린 목소리로 상태를 물었다.
“없어, 없어. 말했잖아, 그냥 시간만 끌다 갈 거라고.”
“……그래서, 시간만 끌었습니깟?”
“하하. 그게, 그러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읏!”
그에 전혀 문제없다는 말투로 루시오를 진정시키며, 녀석이 뛰쳐나온 길목으로 들어선 하준은.
영 미심쩍은 눈으로 가만히 저를 쳐다보는 님프에 어색하니 머리를 긁적이다, 문득 손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흠칫 눈살을 찌푸렸다.
“쓰읍.”
처음 미노스 왕을 쫓아 달려가던 미노타우로스를 받아칠 때, 그 반동으로 쭉 까져버렸던 손바닥.
이후로도 계속 놈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몇 번이고 몽둥이를 내리친 탓일까.
이젠 까지다 못해 아주 벗겨져선 피가 철철 흐르는 제 손을 내려다본 그는.
제대로 다친 걸 인식해 버려서인지는 몰라도, 어째 갈수록 더 따끔해지는 상처에 조용히 침음을 흘렸다.
“거 보는 겁니닷! 그러니까 위험하다고, 싸우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깟!”
“흠흠. 아니, 고작 이거 손바닥 좀 까진 거 가지고 뭘…….”
이윽고 거칠어지는 잔소리에 헛기침을 내뱉으며 슬쩍 고개를 돌리던 하준은, 루시오의 눈에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하는 눈물을 보고선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짜식, 말은 안 해도 제법 걱정이 됐던 모양이네.’
어쩐지, 아까 인질을 데리고 먼저 도망치라 했을 때 그렇게 반대를 하더니마는.
괜히 미안하면서도 기특한 마음에 대견한 눈빛으로 녀석을 흘긴 그는, 이내 씨익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알았어. 앞으론 더 조심…….”
“하준이 다치면, 오늘 루시오가 고생한 값은 누구한테 받으란 겁니깟!”
“……어? 그, 그쪽이었어?”
그러나 감동도 잠시.
예상외의 답에 순간 벙찐 얼굴로 눈을 끔뻑인 하준은.
어느새 눈가를 닦고 돌아선 녀석 뒤로 조그맣게 들리는 웃음소리에, 피식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녀석이 장난은.
“하하. 듣던 대로 님프랑 사이가 좋네, 하준.”
“아, 테세우스 님.”
뒤이어 무리해서 참격을 날린 탓에, 지팡이처럼 검을 써가며 뒤늦게 도착한 테세우스를 돌아본 그는.
오면서 티격태격하던 소리를 들었는지 훈훈하게 저와 루시오를 번갈아 보는 영웅을 보며, 어색하니 미소를 흘렸다.
“그래서, 미노스 왕은 어때. 좀 무사하대?”
“예? 아, 그게, 잠깐만요. 루시오?”
이어진 물음에 바닥에 누운 노인을 살핀 하준은.
여전히 기절한 채로 미동도 않는 그를 보고선, 슬그머니 루시오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아직 숨은 쉬고 있긴 한데, 아까부터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이는 것입니닷. 어떻게 합니깟? 억지로라도 깨웁니깟?”
그에 미노스 왕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보고선, 가늘게 새어 나오는 숨을 느낀 님프는.
조금 전 그에게서 꼭 무언가를 들어야 하는 것 같다던 하준의 말을 떠올리며, 조용히 말을 물었다.
“……아니야. 괜히 그랬다가 진짜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어떻게 해야 하나.
짧은 고민 끝에 고개를 가로저은 하준은, 괜한 모험심을 버리고선 천천히 말을 이었다.
노인의 상태가 정말로 가망이 없어 보였다든가, 혹은 제한 시간이 다 떨어져서 눈앞에 천벌이 아른거리는 거라면 또 모를까.
시간도 넉넉한데 괜히 사람 목숨 가지고 도박을 하고 싶진 않았다.
“일단 돌아가자.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큰 외상은 없어 보이니까, 한숨 푹 쉬고 나면 금방 정신 차리겠지. 신전에 가면 의사도 한 명쯤은 있을 테고. 테세우스 님, 그래도 괜찮으실까요?”
“그래. 솔직히 마음에 드는 양반은 아니지만, 그편이 보상을 받을 때도 물건을 팔 때도 더 유리할 테니까.”
하준의 제안에 복잡미묘한 눈빛으로 미노스 왕을 흘긴 영웅은, 금방 시선을 거두곤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지금이야 꽤 오래전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눈앞의 노인은 한때 자신의 선대인 아버지가 다스리던 아테네를 침공한 조국의 원수이자, 매년 그 백성들을 열넷씩 데려가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바치게 만든 작자였으니까.
물론 저도 제 아비 몰래 라비린토스의 공략을 도왔던 그의 맏딸인, 아리아드네를 바람맞히고 떠났었지마는.
스윽-
“그럼, 바로 출발하죠.”
그렇게 테세우스의 동의를 구한 하준은.
곧바로 미노스 왕을 등에 업고선, 루시오가 풀어놓은 실을 따라 미궁 밖으로 발길을 옮겼다.
저벅-
이제 남은 건 돌아가서 사건의 진상을 전해 듣고, 보상을 받아내는 것뿐이었다.
* * *
부릉-
“하준, 정말 이렇게 그냥 올라와도 괜찮은 겁니깟?”
올림포스.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의 오두막 앞.
라비린토스에서 무사히 미노스 왕을 구출하고, 다음 날 정신을 차린 그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전해 들은 하준은.
난장판이다 못해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에, 보물 대신 다른 방법으로라도 꼭 보상을 해주겠다던 노인의 말을 떠올리며.
자못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스쿠터를 멈춰 세웠다.
“……괜찮겠냐? 그 망할 늙은이 같으니라고. 기껏 힘들게 살려서 데려왔더니만, 땡전 한 푼 안 쥐여 주고 말이야. 아무리 무슨 보상을 바라고 도와준 건 아니라지마는, 사람이 좀 양심이란 게 있어야지.”
똑똑똑-
“계세요?”
툴툴거리며 루시오를 데리고 자리에서 내린 그는.
하다못해 본래 약속된 보상이라도 건지기 위해, 오두막의 문을 두드렸다.
끼익-
“오, 형씨! 벌써 끝낸 거요?”
“예. 크레타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주 낱낱이 파헤치고 왔습니다.”
“이야, 역시 형씨한테 부탁하기를 잘했구만! 아, 여기서 이러지 말고, 일단 안으로 들어오쇼!”
기다렸다는 듯 활짝 열린 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선 하준은, 자연스레 식탁에 앉아 헤파이스토스가 내어주는 차를 홀짝였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요? 미노스 녀석이 미치지 않고서야 제물을 빼먹었을 리가 없는데.”
이윽고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겨 착석한 헤파이스토스는, 무척 궁금하다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곧장 본론에 들어갔다.
이미 제물로 한 번 크게 데다 못해, 왕국을 말아먹을 뻔한 전적이 있던 미노스가 도대체 무슨 깜냥으로 또 그런 짓을 벌인 건지.
도통 궁금하고 걱정돼서, 근래 일이 손에 안 잡힐 지경이었으니까.
“음, 그게 그러니까…….”
그에 전날 미궁에서 있었던 일과, 오늘 아침 미노스 왕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린 하준은.
되살아난 미노타우로스의 행패와, 녀석을 조종하듯 왼팔에 기생하고 있던 촉수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털어놓았다.
“……해서, 아예 도시가 쑥대밭이 되어버렸단 얘기요? 형씨는 기어코 라비린토스에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해치우고서, 놈한테 끌려간 미노스를 구출해 왔고?”
“원래는 그냥 몰래 인질만 구해서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테세우스 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죠.”
“허어, 그래도 대단하구만. 팔괘로에다가 세이렌 무리에 이어서, 이제는 미노타우로스까지. 이 정도면 어엿한 영웅이라 봐도 되겠수다.”
“에이, 무슨 영웅입니까, 영웅은.”
이내 사건의 전말을 모두 전해 들은 헤파이스토스는, 제법 놀란 눈으로 하준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감탄을 터트렸다.
이미 앞서 말한 팔괘로에 세이렌 무리를 격퇴한 것은 물론이고.
홀로 히드라의 독을 구해 온 데다가, 타르타로스와 헬헤임 두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역전의 용사였지만.
그럼에도 반신도 아닌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그 라비린토스의 악몽을 다시 잠재웠다는 건, 과연 믿기지 않는 업적이었으니까.
“아무튼, 정말로 고생 많았수다. 이번 부탁은 반쯤 내 억지나 다름없었는데도 이렇게…….”
똑똑-
“……으흠, 잠시만 기다리쇼. 금방 다녀올 테니.”
곧 그에게 감사를 건네며 약속한 보상을 준비해주려던 찰나.
노크 소리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헤파이스토스는, 잠깐 양해를 구하곤 부엌을 나서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거 미안하지만 선객이 있으니, 나중에 다시…….”
“헤파이스토스 형님! 접니다, 저! 헤르메스.”
“……헤르메스 꼬맹이?”
약속되지 않은 만남에 바로 손님을 물리고 돌아가려던 헤파이스토스는, 의외의 상대에 눈을 끔뻑이며 닫으려던 문을 멈추었다.
“헤르메스?”
“헤르메스 님께서 오신 겁니깟?”
그 소리에 무슨 일인가 슬그머니 현관 쪽으로 귀를 기울이던 하준은.
그토록 궁금했던 신의 방문에 마른침을 삼키며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혹시 저번에 맡긴 장비 때문이라면, 아직 납기일이 많이 남았을 텐데. 아! 아니면 또 헤베가 넥타르라도 보낸 건가? 흐흐.”
겉모습은 초등학생쯤 되었을까.
루시오보다 조금 더 자란 나이대에, 천진난만함이 묻어 나오는 금발의 남자아이.
“하하. 아쉽지만 둘 다 아닙니다. 왜냐면 이번엔 형님을 뵈러 온 게 아니거든요.”
“으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날 보러 온 게 아니라니?”
헤파이스토스의 물음에 어색하니 고개를 젓는 꼬마 신을 신기하다는 듯 살피던 하준은.
이내 어딘가 요상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당황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저요?”
그도 그럴 것이.
방금까지만 해도 장난스럽게 어린아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가던 헤르메스가.
“이하준.”
어느 순간 진지한 눈빛으로 떡하니 저를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아버지께서 부르신다. 따라오도록.”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