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ne Deliver RAW novel - Chapter (83)
신들의 배달기사(83)
올림포스 궁전.
헤르메스의 방문에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라 오두막을 나선 하준은.
어느덧 그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건물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스쿠터를 멈춰 세웠다.
“하, 하준, 어떡합니깟? 루시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깟?”
“뭐? 그야 당연하지. 인제 와서 뭔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지금까지 잘만 같이 다녀놓고는.”
이윽고 앞서 가는 헤르메스를 쫓아 거대한 정문 앞에 선 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제 소매를 꾹 잡아당기는 루시오를 돌아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근래 들어 꽤 익숙해졌나 싶었더니, 처음 보는 신과 마주하는 자리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건 여전하구만.
“그, 그치만 요번엔 얘기가 좀 다르지 않습니깟! 자그마치 제우스 님입니닷, 제우스 님! 현 올림포스의 적법한 통치자시자, 그 무시무시한 티탄과 기간테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가장 위대한 분이시란 말입니닷!”
뒤이어 변명하듯 이유를 늘어놓는 녀석을 흘긴 하준은.
오면서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바짝 말라있는 입술을 보고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제우스가 어디 보통 신이던가?
올림포스의 열두 주신, 그중에서도 그들 모두를 이끄는 최고신이자 신들의 왕이지 않은가.
‘이전에 한 번 하데스를 만나본 나도 이렇게 떨리는데. 님프인 녀석은 오죽할까.’
끼이이익-
크그그그그긍-
“어서 들어와. 아버지께서 뭘 혼내시려고 그러는 게 아니고, 오히려 너희의 공적을 치하하려고 부르신 거니까.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말고.”
“……공적이요?”
“쉿! 이럴 땐 그냥 알겠다고 하는 겁니닷, 하준! 그, 그럼 실례하겠습니닷!”
공적이라.
그게 무슨 뜻인지 되묻는 저의 말에 황급히 제 입을 가로막는 루시오를 보며, 어색하니 안으로 들어선 그는.
잠시 흐뭇하니 저들을 살피곤 마저 걸음을 옮기는 헤르메스를 보고선, 머리를 긁적였다.
뭐, 어찌 됐든 좋은 일로 불렀다고 하니.
그렇게 딱딱하게 있을 필요는 없는 거겠지.
“저기, 루시오. 그런데 갑자기 나를 왜 부른 걸까?”
“으음, 제우스 님께서 하준을 부르신 이유 말입니깟?”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채 가시지 않는 의문에 조용조용 속삭인 하준은.
예상과 달리 저도 궁금했는지 진지하게 고민에 잠기는 님프를 보곤, 자못 놀란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대충 헤르메스 앞에서 괜히 수군거리지 말라고 타박을 놓을 줄 알았는데.
“오늘 아침에 미노스 왕이 다른 방법으로라도 꼭 보상해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깟? 아무래도 그것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닷.”
“……미노스 왕이? 아니, 그 양반이랑 제우스 님이 나를 보자고 하시는 게 무슨 상관이래?”
이내 짧은 고민을 마치고 입을 여는 루시오를 돌아본 그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얘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 올림포스의 영웅인 헤라클레스나, 신들의 왕자쯤 되는 아레스의 부탁도 아니고.
한 나라의 국왕, 그것도 자신이 아닌 포세이돈을 향해 제물을 바치는 미노스를 위해서, 그 제우스가 친히 움직여준다고?
“그야 미노스 왕이 제우스 님 아들이지 않습니깟?”
“뭐? 그 노인네가? 정말로?”
돌아온 답에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미노스 왕을 떠올린 하준은.
그저 조금 카리스마 있어 보이던 분위기를 제외하곤 평범한 노인과 다를 바 없던 그 모습에,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아무리 봐도 그렇게 대단한 피를 이은 사람 같진 않던데.
“……몰랐습니깟? 그것도 보기보다 꽤 총애하고 계시는 겁니닷. 무려 부탁 한 번에 제우스 님께서 직접 아테네에 기근과 역병을 돌려주셨을 정도니깟.”
이윽고 한술 더 뜬 발언에, 저와 마찬가지로 보상이 밀린 테세우스를 기억한 그는.
어쩐지 장사하러 왔다는 것치곤 별말 없이 물러서던 그를 떠올리며 나지막이 침음을 내뱉었다.
그때는 그냥 보는 눈도 많고 생각보다 도시의 상태가 엉망이기도 해서, 테세우스가 관용을 베풀어준 줄 알았더니.
단순히 미노스가 아닌 그의 뒷배를 믿고서 물러난 거였나.
“물론, 어디까지나 다 추측일 뿐입니닷. 왜냐면 굳이 미노스 왕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제우스 님께서 하준을 찾으실 만한 이유는 차고 넘치니깟.”
잠시 충격에 빠져 혼자 중얼거리는 하준을 가만히 바라보던 루시오는, 이내 피식 웃음을 흘리곤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 타이밍을 봐서는 확실히 미노스 왕의 청으로 불려 왔다 보는 편이 맞긴 했지만.
사실 그 전에도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딱히 언제 이곳을 찾을 날이 왔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간 어지간한 영웅들 못지않게 쌓아온 업적은 둘째 치더라도, 당장 하준의 도움을 받은 제우스의 자식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아레스 님에 헤라클레스 님. 게다가 루시오가 함께하기 전에, 헤베 님에다가 아프로디테 님까지 도와드렸다고 들은 겁니닷.”
못해도 한 번, 곤란함을 풀어준 상대가 무려 네 명.
하물며 사실상 그에게 가장 많이 신세를 지고 있는 헤파이스토스가 제 어미인 헤라에게 미운털이 박혀서 그렇지, 본디 아레스보다 먼저 나온 올림포스의 적통이란 걸 생각해보면.
도리어 여태껏 왜 찾지 않았는지가 더 궁금할 지경이었다.
“자, 내 역할은 여기까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니까, 바로 들어가면 돼.”
그러는 사이.
중간중간 마주치는 신과 님프를 지나, 어느덧 궁전의 가장 최상층에 도착한 둘은.
고풍스럽고 거대한 문을 눈앞에 두고 멈춰 선 헤르메스를 보며 어리둥절하니 고개를 기울였다.
“저, 저희끼리만 들어가는 겁니깟?”
“그러면 헤르메스 님은…….”
“뭐? 하하!”
당연히 같이 들어가는 줄 알았건만.
자연스레 한 걸음 슬쩍 옆으로 빠지는 소년을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본 하준은, 무슨 그런 얘기를 하냐는 듯 너털웃음을 지어 보이는 그를 보고선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진짜로 그 제우스를 독대해야 하는 건가?
“아버지께서 너희를 보자고 마련하신 자린데, 내가 거기 껴서 무얼 하겠어?”
뒤이어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계단을 내려서는 헤르메스를 바라본 그는, 잔뜩 떨리는 눈빛으로 멍하니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아, 맞다. 이하준.”
“예?”
그리곤 곧 마음을 다지고선 문을 돌아보려던 찰나.
깜빡했다는 듯 다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흠칫 멈춰 선 하준은.
계단 중간에서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저를 쳐다보는 소년을 마주하곤, 무슨 일인가 눈을 끔뻑였다.
“지금까지, 아주 잘하고 있어. 그것도 기대했던 것보다 깜짝 놀랄 만큼 훨씬.”
“아…… 네.”
난데없이 이어지는 칭찬에 어색하니 머리를 긁적인 하준은.
자못 대견함이 묻어 나오는 그 말투에, 조그맣게 고개를 주억였다.
대강 저를 올림포스로 이끈 것이 헤르메스일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본인 입으로 확답을 받으니 어딘가 모르게 신기한 기분이었다.
거기에 속은 몰라도 겉모습은 어린아이인 그에게 잘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 또한 묘한 느낌이었고.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그리고 그 아이, 너무 그렇게 미워하지 마. 그래 보여도 정말로 착한 애니까.”
끝으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마저 발길을 옮기는 소년을 살핀 그는.
마지막 말에 일전에 리자드맨의 늪지에서 함께했던 최서윤을 떠올리며, 조용히 입을 떼었다.
“……그 아이라니. 혹시 그 도둑 말하는 건가?”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깟?”
나 참, 그때도 기어코 리자드맨들 몰래 보물을 훔치고 나온 녀석을 두고 뭐가 그리 착하다는 건지.
하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들의 윤리관에 나지막이 혀를 내둘렀다.
뭐, 그렇다고 딱히 사람을 미워하는 건 아니지마는.
똑똑-
곧바로 헤르메스를 보내곤 문을 돌아보며 손을 들어 올린 그는, 잠깐 심호흡을 마치곤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끼이익-
기다렸다는 듯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슬그머니 문을 열어젖힌 하준은.
저물어가는 태양 아래, 벌겋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배경 삼아 등지고 선 남자를 바라보며 말없이 감탄을 내뱉었다.
“그래. 네가 이하준이구나. 얘기는 많이 들었다.”
신들의 제왕 자리는 절대 딱지치기로 따낸 게 아니라는 듯, 보기만 해도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 만큼 쩍쩍 갈라진 등 근육.
남자답게 강인한 턱선을 두르고 난 멋들어진 수염과, 풍성한 은빛 머리카락.
“헤라클레스를 도와 재앙의 전조를 밝혀내고, 다른 영웅들을 대신해 북유럽에 내린 문제를 해결한 걸로도 모자라, 내 못난 후계의 억지를 들어주기까지 했다지? 몇몇은 우리 신들의 피를 이은 아이들조차 이루기 힘든 업적이었을 텐데. 대단하더구나.”
“……가, 감사합니다.”
제우스.
천천히 저를 돌아보며 미소 짓는 중년의 남자를 마주한 하준은.
저 멀리 떨어지고 있는 햇빛 탓인지는 몰라도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광채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물론 그 옆의 작은 님프, 루시오도.”
“제, 제우스 님께서 루시오의 이름을?”
마찬가지로 저를 부르는 제우스에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인 루시오는, 이내 벅찬 얼굴로 환한 웃음을 터트렸다.
“영광…… 말 그대로 가문의, 아니, 도랑의 영광인 것입니닷!”
보통 자신을 위해 일하는 님프의 이름조차 쉬이 외우지 않는 것이, 저 드높은 신이란 존재건만.
하물며 제 전속도 아닌 저를, 자그마치 올림포스의 지배자인 제우스가 기억해주다니.
“아직 크레타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피곤할 테니, 길게 잡아두지 않으마.”
그렇게 반짝이는 눈빛을 받으며 조용히 목을 가다듬은 제우스는, 멀뚱히 자리에 서서 어찌해야 할지 저를 살피는 하준을 보며 곧장 본론으로 들어섰다.
“내 미노스의 간절한 청이 있기도 했거니와, 앞으로 다가올 재앙에 맞서 네 활약을 더욱 기대하는 의미에서 준비한 상이다.”
이윽고 책상 서랍을 뒤적인 그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상자를 꺼내어 하준에게 건넸다.
“저, 이건…….”
“열어 보거라.”
공손히 두 손으로 상자를 받아 든 하준은, 어서 확인해보라는 듯 눈짓을 보내는 제우스를 보고선 조심스레 걸쇠를 풀었다.
달칵-
“……구슬?”
조그마한 상자 속에 고급스레 깔린 융 위로 놓인 은색 구슬.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보는 것만으론 도통 이해할 수 없던 그는.
설명을 요하는 눈으로 슬쩍 제우스를 올려다봤다.
“처음엔 적당히 다른 아이들처럼 권능을 내릴까 했다만, 아무래도 네겐 다른 것이 더 어울릴 거 같더구나.”
“예? 아니, 그…… 저도 권능이면 충분할 거 같은데요?”
그리곤 가만히 이어지는 얘기를 듣던 하준은, 순간 코앞까지 훅 들어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기회를 보며 당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하하! 그리 사양할 거 없다. 제법 귀하긴 해도 이쯤 되는 물건은 몇 가지고 있으니.”
그에 무언가 오해한 듯, 괜찮다는 얼굴로 웃음을 터트린 제우스는.
다시 내민 상자를 꾹 닫으며, 그의 품에 쥐여 주었다.
“아무튼, 모쪼록 그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구나.”
차마 제우스의 손을 뿌리칠 수는 없었기에, 반강제적으로 보상을 넘겨받은 하준은.
억울함에 속으로 울상을 지으며 입술을 꾹 씹었다.
아레스를 성좌로 두고 있는 박성준만 해도 전 세계 랭킹 3위에 달할 정돈데.
만일 그의 아비인 신들의 제왕으로부터 권능을 받을 수만 있다면, 과연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2위?
아니면 세계 최강의 자리인 1위?
“그럼 이만. 다음에 또 마주할 날이 오기를 고대하마.”
“그, 저기요? 저기요, 잠시만!”
번쩍-
하나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도, 매정하리만치 단호하게 등을 돌리는 그를 향해 손을 내뻗은 하준은.
이내 제 몸을 감싸는 빛과 함께 새하얗게 물들어가는 시야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아이 씨! 이딴 거 말고 나도 그냥 권능이나 달란 말이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