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ne Deliver RAW novel - Chapter (84)
신들의 배달기사(84)
잿빛 하늘.
그 아래 녹빛이라곤 눈곱만큼도 비치지 않는 메마른 땅.
군데군데 쩍쩍 갈라진 자리에서 푸른 불길이 날름거리는 대지 위에, 우뚝 세워진 제단 가운데.
거대한 원탁을 사이에 두고 둘러앉은 세 인영은, 저 멀리 저벅저벅 걸어오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불편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 바쁜 시기에 모두를 불러놓곤, 정작 본인이 약속에 늦다니. 참, 웃기지도 않는구먼.”
개중 누런 거적을 뒤집어쓴 왜소한 체구의 노인은.
어느덧 제 의자를 찾아 자리에 앉는 파란 머리의 남자를 흘기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상대를 책잡았다.
“미안하군. 갑자기 계획이 틀어지는 바람에 따로 준비할 일이 생겨서 말이지.”
헐벗은 상체에 드문드문 푸른 비늘이 돋아나 있는 그는, 파충류처럼 길게 찢어진 금빛 눈동자를 지그시 감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후후, 뭐 어때. 그렇게 많이 기다린 것도 아니잖아? 그보다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우리 귀하신 분께 도대체 어떤 문제가 생겼길래, 근래 없던 소집까지 때렸는지 말이야. 물론 빈자리도 몇몇 보이긴 하지만…… 적어도 여기 모인 사람들은 그게 궁금해서 이렇게 시간을 낸 거잖아?”
그에 빙글빙글 손가락으로 머리를 꼬며 지루한 듯 기다리던 여자는, 이내 고혹한 미소를 지으며 제 보라색 머리를 찰랑였다.
“음, 그럼 바라는 대로 곧장 모두를 부른 이유를 설명하지.”
그리곤 흥미로운 눈빛으로 지그시 저를 올려다보는 새카만 염소 눈을 향해, 고맙다는 듯 고개를 주억인 푸른 머리의 사내는.
마지막으로 족히 두 사람은 앉을 수 있을 거 같은 의자가 다 갑갑해 보일 만큼 거대한 덩치에, 살집이 축 늘어진 남자를 한 번 살피곤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크레타에서 발아한 씨앗이 소멸했다.”
“……크레타? 그 소쟁이한테 붙여놨다는 놈 말이야?”
“그래. 올라오던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 아무래도 제대로 증식하기도 전에 본체가 당한 모양이더군.”
지난 수천 년간 저 하늘을 가리고 조심스레 준비해온 원대한 계획.
그 초석을 다지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물론 전체로 보면 그다지 틀어진 티도 안 났지만, 마냥 가만히 내버려두기엔 그 작은 비틀림이 언젠가 거대한 균열이 되어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여, 그게 뭐가 그리 문젠가? 미노타우로스야 어차피 시선을 끌기 위한 용도였을 터인데.”
사내의 말에 시큰둥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인 노인은, 어째 별것도 아닌 일에 괜한 걸음을 했다며 조용히 혀를 찼다.
“……단순히 놈이 죽은 게 문제가 아니야. 누가 죽였는지가 문제라는 거다.”
“허허, 누가 죽였는지가 문제라니. 크레타섬이라면 기껏해야 포세이돈이나 테세우스 아닌감?”
“아니. 그랬다면 굳이 번거롭게 모두를 모이라 할 필요도 없었겠지. 그놈들이야 제 신화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족속들이니까.”
그 건성건성인 태도에 눈썹을 꿈틀한 남자는, 그리 쉽게 볼 일이 아니라는 듯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흐응…… 그래서, 그럼 누가 녀석을 죽였다는 거야?”
“인간이다. 그것도 이야기 속 영웅이 아닌 지상에 사는 평범한 인간.”
“……평범한 인간이 이미 발아한 씨앗을 소멸시켰다고? 그것도 지상이 아닌 올림포스 산하에서? 그걸 지금 우리더러 믿으란 겐가?”
이어진 말에 슬그머니 일어서던 걸 멈추고 다시 자리에 앉은 노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야기 속 인물도 아닌 평범한 인간이 올림포스 속 세계를 돌아다닌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얘기던가?
농담을 치더라도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건 믿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벌어진 일이니까.”
“……뭐? 으음.”
하나 돌아온 답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그는, 자못 진지한 상대에 말없이 침음을 내뱉었다.
“해서, 하고 싶은 말이 무언가? 인제 와서 그 보잘것없는 인간 하나 때문에 그간 꾸려온 계획을 틀기라도 하란 게야?”
확실히 그게 사실이라면 경계할 만한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저들이 나서서 뭔가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저 높은 곳에서 반짝이는 성좌들이 함부로 지상의 일에 직접 손을 쓸 수 없는 만큼, 저들 또한 멋대로 이곳을 벗어날 수 없는 몸이었으니까.
“그럴 리가. 단순히 염두에 두고 있으란 얘기다. 당장은 하잘것없어 보일 작은 날갯짓이라도, 언젠간 큰 태풍이 되어 돌아올 수 있으니까.”
남자는 노인의 얼굴에 드리운 근심을 보며, 만족한 듯 고개를 주억였다.
먼저 알고 대비하는 것과, 나중에 가서 아무것도 모른 채 문제를 맞닥뜨리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였으니까.
“그럼, 모임은 여기까지 하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는, 곧바로 원탁을 돌아서며 신전을 나섰다.
짧지만, 오늘 일은 단순한 경고일 뿐이었으니까.
계획은 굳건해야 했다.
이번에도 기회를 놓친다면, 또 이 황폐한 땅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갇혀 있어야 할지 몰랐으니까.
* * *
“나 참, 신들의 제왕이 부른다 해서 잔뜩 기대를 했더니만.”
헤르메스의 안내를 받아 제우스를 만나고, 추가 보상을 손에 넣어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침대를 뒹굴거리던 하준은, 부엌에 나가 냉수를 한잔 떠 마시며 아쉬움에 착잡한 미소를 흘렸다.
‘드디어 나도 최강 S급 헌터가 되나 싶었는데.’
세계 최강.
무릇 사내라면 헛된 망상으로나마 한 번쯤 꿈꿔보는 그 자리.
솔직히 당장 월세 하나 못 내서 끙끙대던 예전과는 달리 삶의 여유가 생긴 지금이야, 굳이 헌터 같은 걸 고집할 필요는 없긴 했지만.
진짜로 최고가 될 수만 있다면야 언제든지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었다.
한데 그런 기회를 바로 코앞에서 놓쳐버리다니.
‘아니, 정확히 따지자면 놓친 것도 아니지.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셈이니까.’
그 아레스와 계약한 헌터만 하더라도 랭킹 3위를 꿰차고 있을 정돈데, 자그마치 제우스의 권능이라니.
물론 헌터라는 게 단순히 강력한 성좌와 계약한다고 해서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게 본인의 노력과 실력 그 이상으로 중요한 요소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마 제우스 정도 되는 성좌라면 계약만 해도 A급까진 무난하게 닿을 수 있었겠지.
거기에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슈트에 퀴네에의 능력까지 더한다면, 정말 랭킹 1위가 되는 것도 꿈이 아니었을 테고.
‘에휴, 차라리 그쪽에서 얘기라도 꺼내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인제 와서 생각해봐야 부질없는 이야기에 나지막이 한숨을 푹 내쉰 하준은, 곧 어제 식탁 위에 올려놓은 상자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터트렸다.
아예 처음부터 권능 소리 없이 이것만 떡하니 내줬더라면, 마냥 기뻐서 난리를 쳤을 텐데.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기 그지없구만.
“그래도, 이게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란 말이지?”
달칵-
이내 아쉬움을 뒤로하고 걸쇠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그는.
은은하게 반짝이는 구슬을 바라보며, 전날 궁전을 떠나고 다시 찾았던 헤파이스토스의 얘기를 떠올렸다.
「응? 형씨, 궁전에서 볼일은 벌써 다 끝난 거요?」
「아, 네. 그냥 공적을 치하하신다는 의미로 뭣 좀 주려고 부르신 거였더라고요. 그런데, 이게 받은 물건을 얻다 써야 할지 모르겠어서.」
「거참, 도대체 뭘 받았길래 그러는 거요? 어디 한번…… 으응? 이, 이건!」
「왜,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혹시 무슨 문제라도…….」
「허어, 정말로 이걸 주셨단 말이요? 아버지께서도 형씨가 어지간히 마음에 드셨나 보구만.」
「……이게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아니, 그보다 방금 뭐라고 하신 거예요? 아버지?」
올림포스의 열두 주신 중 하나조차 진짜가 맞나 곰곰이 살펴보았을 정도로, 귀하디귀한 성물.
과연 그 제우스가 고심 끝에 제 권능 대신 가져왔을 만큼 대단한 녀석을 흘긴 하준은, 이어진 설명을 되뇌며 마른침을 삼켰다.
「흐흐, 몰랐수? 비록 내놓은 자식이긴 하지마는. 이래 봬도 한때는 올림포스의 적통이었다, 이 말이오. 뭐, 아무튼. 그 구슬은 내가 알기론 번개 면역과 모든 정령에게 잔뜩 호감을 사는 효과가 있을 거요. 게다가 또 무슨, 어둠으로부터 지켜준다고 했던 거 같은데…….」
번개 면역에 정령 친화력 그리고 웬 어둠이 어쩌고 하는 효과까지.
아무리 봐도 그냥 권능이 더 쓸모 있어 보이긴 했지만, 이미 받아 온 걸 어찌 돌려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준은 그저 제게 더 어울리는 물건으로 준비했다는 제우스의 말을 기억하며, 조용히 구슬을 들어 올렸다.
‘분명 이대로 먹으면 된다고 했던가.’
“하준, 거기서 뭐 합니깟?”
“응?”
그렇게 막 구슬을 입에 넣으려던 찰나.
잠에서 깬 듯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온 루시오를 마주한 그는, 가만히 서서 멀뚱히 저를 쳐다보는 녀석을 보곤 말없이 고개를 기울였다.
“앗, 그거 아직도 안 먹은 겁니깟?”
“아, 안 그래도 지금 먹으려고.”
툭-
이내 제 손에 집힌 구슬을 발견하곤 의아한 듯 묻는 님프를 본 하준은.
곧 망설임 없이 보상을 입으로 던져 넣었다.
“음? 으읍!”
“왜, 왜 그럽니깟, 하준? 혹시 무슨 문제라도…….”
이윽고 나지막이 탄성을 터트리는 하준의 모습에, 어딘가 잘못되기라도 했나 걱정스레 살피던 루시오는.
우물우물 구슬을 굴리다 금방 꿀꺽하고 삼켜버리는 그를 보며, 어찌 된 일인가 눈을 끔뻑였다.
“와! 이거 엄청 맛있는데?”
“마, 맛있……. 뭐야, 그런 거였습니깟? 루시오는 또, 뭔가 부작용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않습니깟.”
뒤이어 눈을 반짝이며 감탄을 흘리는 하준을 본 녀석은.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에이, 부작용은 무슨. 제우스 님께서 잘했다고 보상으로 내려주신 건데, 먹어서 괜히 탈 나는 물건을 주셨을 리가 없잖아.”
그에 괜한 걱정을 다 한다며 피식 웃음을 터트린 하준은, 아직도 혀끝에 남은 단맛에 입맛을 다시며 비어있는 상자를 슥 훑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인 것입니닷. 제우스 님께선 그럴 의도가 없으셨더라도, 그냥 하준의 몸이 안 받아줄 수 있는 거니깟.”
“……뭐, 약효가 너무 세서 도리어 독이 된다든가. 그런 거야?”
돌아온 말에 상자를 닫으며 루시오를 살핀 그는, 제법 진중한 녀석의 얼굴을 보고선 조용히 침음을 흘렸다.
‘평소에 신과 영웅한테 그리 깍듯한 녀석이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걸 보니, 실제로 그런 경우가 종종 있긴 한가 보네.’
“아무튼. 이번엔 몸이 잘 받쳐줬다니 다행인 겁니닷. 그보다 뭔가 달라진 건 없습니깟?”
“으음, 글쎄다. 딱히 그런 건 없는 거 같은데?”
이어진 질문에 정신을 차리곤 자신을 살핀 하준은, 예상과 달리 아무런 변화가 없는 제 몸을 보고선 어색하니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야 원, 정말 면역이 됐는지 안 됐는지를 시험해보겠답시고 젓가락을 한번 콘센트에 꽂아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오히려 너야말로 바뀐 거 없어?”
개중 그나마 여기서 시험해볼 만한 효과를 떠올린 그는, 알쏭달쏭한 눈빛으로 저를 살피는 루시오를 내려다보았다.
“루시오 말입니깟? 먹은 건 하준인데 루시오가 달라질 게 뭐 있습니깟?”
“……그래?”
이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빡이는 녀석을 마주한 하준은,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반응에 당황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이상하다. 분명 모든 정령에게 호감을 사게 될 거라고 했는데. 엄연히 따지고 보면 님프도 정령 아니었나?’
올림포스나 북유럽은 물론 지상에서도 분류상 정령으로 들어가는 몬스터가 많았기에, 그나마 기대하고 있던 효과였건만.
맥 빠지는 결과에 씁쓸하니 미소를 지은 그는, 부디 그냥 흡수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리는 것이길 바라며 재차 냉수를 들이켰다.
“흐아, 어쨌든. 일어났으면 슬슬 준비해. 빨리 안 가면 주말이라 좀 붐빌 수도 있으니까.”
“……나가다니, 어딜 말입니깟? 설마 또 배달하러 가는 겁니깟?”
배달은 무슨.
방금 깨서 그런가, 영 기억을 못 하는 루시오를 흘긴 하준은.
금세 피식하곤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뭔 소리야. 네가 어제 그랬잖아.”
라비린토스에서 미노스 왕을 옮긴 보상으로, 그렇게 가보고 싶은 데가 있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텁-
멀뚱멀뚱,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는 녀석의 머리를 마구 헝클인 하준은.
곧 몸소 전날의 약속을 상기시켜주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물고기, 보고 싶다며?”
그만치 일했으면, 놀 때는 확실히 놀아야 했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