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ne Deliver RAW novel - Chapter (97)
신들의 배달기사(97)
띠링-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 말없이 꼴깍 침만 넘기길 잠시.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알림에 슬그머니 스마트폰을 꺼내 든 하준은.
보상을 수령하라는 듯 내비게이션에 떠오른 목적지와 함께 왕궁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확인하고선, 조용히 폰을 다시 집어넣었다.
‘일단 배후 찾기는 이쪽이 정답이었던 거 같은데.’
지하 감옥 깊숙한 곳, 숨겨진 공간에 묶여 있던 여자를 발견하기 무섭게 배달 정보가 갱신된 것을 보아하니.
모르긴 몰라도 결국 제 판단이 옳기는 옳았던 모양이었다.
물론 앞서 도시를 떠난 경비대와 헌터들이 타이밍 좋게 그쪽 배후를 밝혔을 가능성 또한 완전히 배제할 순 없었지만.
아직 그들이 성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보면, 끽해야 이제 동굴 입구나 지났을 성싶었으니까.
‘그런데…… 이 여자는 어쩌지?’
데려가야 하나.
워낙 끔찍한 몰골에 괜한 오해를 살까,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살피던 하준은.
막상 업고 가려고 해도 절그렁거리며 양 손목을 묶고 있는 사슬을 보며, 나지막이 침음을 내뱉었다.
슈트를 쓴다면야 힘으로라도 그냥 부숴버릴 수 있겠지만.
그러기엔 자정까지 남은 시간 동안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노릇이었으니까.
“하준, 이쪽에 뭔가 있는 겁니닷!”
그렇게 난감한 표정으로 가만히 고민에 빠져있기도 잠시.
수갑 열쇠라도 찾는지 저 대신 비좁은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루시오의 말에, 슬쩍 구석에 놓인 책상을 바라본 그는.
웬 헤쳐진 공책과 그 옆에 굴러다니는 볼펜을 보고선, 조용히 그를 집어 들었다.
사락-
“……뭐야? 뭐라고 써져 있는 거야?”
조심스레 첫 장을 넘기기 무섭게, 안쪽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요상한 글자들.
그러고 보니 처음 게이트에 휘말렸을 적에, 통 알 수 없던 문자로 새겨져 있던 비석을 떠올린 하준은.
당황한 눈빛으로 촤라락 페이지를 넘기며 머리를 긁적였다.
“잠시만 이리 줘보는 것입니닷!”
탁-
그 모습에 답답하다는 듯 공책을 뺏어 간 루시오는.
필기체치곤 꽤 정갈하게 쓰인 글귀를 보며, 지그시 눈살을 좁혔다.
“이건…….”
“읽을 수 있겠어? 아침에 비석에 있던 글자는 힘들다면서.”
“그건 비석부터가 많이 훼손되어 있었지 않습니깟. 이 정도면 완전히 해석하긴 힘들어도, 대충 문맥은 알아볼 수 있는 겁니닷. 세이렌들이 쓰는 언어랑 얼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말입니닷.”
하준의 물음에 자신을 뭐로 보는 거냐는 듯 자신감을 내비친 님프는.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해석한 내용을 입에 담았다.
[막내 공주님께서 돌아오셨다. 바깥과 이어진 동굴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그분은, 비록 만신창이가 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몰골을 하고 계셨으나. 허리 아래까지 길게 내려오는 금발과 지그시 감긴 눈꺼풀 사이로 희미하게 비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철없던 시절, 아직 평범한 꼬마에 불과했던 자신을 귀엽게 봐주던, 자애롭고 또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였다.]사락-
사락-
[본래대로라면 바로 대왕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했지만. 나는 고민 끝에 그간 오래 알고 지내던 간수장에게 부탁해, 이 숨겨진 방에 잠시 공주님을 옮겨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 막내의 비행에 충격을 받고서 몇 날 며칠을 시름시름 앓아누웠던 대왕님이, 수십 년 만에 이런 몰골로 돌아온 딸의 얼굴을 보셨다간. 그날로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으니까.]사락-
[하나 단순히 공주님의 상태가 좋아지면 올려 보내 드려야겠다는 내 계획과는 달리, 현실은 무자비할 정도로 끔찍하게 돌아갔다. 막연히 무리해서 쉰 줄로만 알았던 목은, 누가 그랬는지 성대가 파내어져 있었고. 이미 삶의 의지를 모두 잃은 사람처럼 하루의 대부분을 퀭한 눈길로 보내던 공주님은, 이따금씩 발작을 일으키며 벽에 머리를 박고 자해를 시도하는 등. 날이 갈수록 상황은 악화되어만 갔다. 불경하나, 결국 죄인처럼 공주님을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사락-
[빈민가의 인어들이 정신을 잃고 날뛰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 모습이 흡사 병사들이 사냥을 위해 물고기를 부리던 것과 유사하다는 증언이 나왔다. 어류가 아닌 동족을 홀리다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디 왕실의 핏줄이라도 되지 않는 한.]사락-
[빈민들이 난동을 부리는 주기가 점점 짧아졌다. 처음엔 대여섯 남짓했던 인원도, 어느덧 스물을 넘긴 지 오래였다. 저번엔 병사들 사이에서 부상자가 튀어나왔다 했던가. 그리고 오늘, 어린 인어로부터 얘기를 받았다. 소름 끼치는 노랫소리. 누군가 자신을 죽여주길 바랐다고.]사락-
[이래선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 피해가 커지기 전에, 어서 이를 막아야 한다는 것도. 하지만 난 공주님을 죽일 수 없다.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한평생 왕가를 지키며 살기로 맹세한 창으로서, 한때나마 남몰래 그녀를 마음에 담았던 남자로서.]사락-
[그렇기에 이 모든 일을 일기에 적어 남긴다. 언젠가 이곳을 발견해, 내 죄악을 밝혀줄 영웅을 기다리며.]“……부디 그대가, 우리 공주님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툭-
그 말을 끝으로 공책을 덮은 루시오를 바라본 하준은.
심란한 눈빛으로 제 뒤에 묶인 공주를 흘겼다.
띵동-
-배달의 만족, 주문!
설상가상.
분위기를 깨며 훅 치고 들어오는 알림에, 조심스레 스마트폰을 꺼내 든 그는.
특이하게도 아직 콜을 받지도 않았는데 떠오르는 내용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아틀란티스의 막내 공주에게 평안한 안식을 내리십시오.] [제한 시간: 3분] [주의 * 배달에 실패하거나 포기, 혹은 콜을 거절할 시, 아틀란티스에 재앙이 들이닥칩니다.] [배달 팁: 경비대장 플롭스의 완전한 신뢰]평안한 안식이라니.
지금도 사슬을 절그렁거리며, 연신 죽여 달란 얘기만을 되풀이하고 있는 그녀를 살핀 하준은.
고민 끝에 공책을 챙기곤 말없이 자리를 빠져나왔다.
“……하준, 정말 이렇게 그냥 가도 되는 겁니깟?”
“그럼 뭐, 거기 적혀 있던 대로 죽이기라도 하랴? 사정은 딱하지만, 이런 식으로 남한테 마무리를 바라는 건 좀 아니지. 더구나 그랬다가 인어대왕이 딸내미 시체라도 보고 회까닥 돌아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꾸물꾸물 제 눈치를 살피며 한마디 묻는 루시오의 이야기에, 그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친 그는.
잘못 엮였다간 괜히 덤터기만 뒤집어쓸 거 같은 부탁에 미련 없이 콜을 거절하며, 재빨리 통로를 빠져나왔다.
물론 아틀란티스에 들이닥친다는 재앙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차피 곧 받기로 한 보물만 챙기고 나면은 바로 게이트를 뜰 테니…….
콰아아아앙-!
“흐어어억! 뭐, 뭐야?”
그렇게 여전히 간수들이 돌아오지 않은 자리를 지나, 증거가 되어줄 공책을 들고서 왕궁으로 향하던 그때.
천지가 뒤틀리는 듯한 굉음에,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하준은.
이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어딘가를 가리키는 루시오를 보고선, 떨리는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저, 저, 저게 무슨…….”
날이 어두워 밤하늘처럼 시꺼멓게 비치는 심해로부터 아틀란티스를 지키고 있던 투명한 돔.
그 돔 위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거대한 눈알처럼 생긴 무언가와, 둥그런 반구 형태의 장벽을 타고 미끄러지는 기다란 촉수를 마주한 그는.
마치 그 아틀라스와 비견될 덩치의 몸뚱어리 사이로 비치는 태산만 한 크기의 눈을 보고선, 물밀듯이 차오르는 두려움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신이시여…….”
형용할 수 없는 공포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 그 이질적인 크기에, 사방에서 넋을 잃고 신을 찾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쩌어어어어억-!
쿠구구구-
흐느적거리던 촉수가 저 멀리 떨어졌다 다시 돌아오며, 채찍처럼 돔을 때렸다.
무너질 듯 격하게 흔들거리는 천장에 흠칫 정신을 차린 하준은,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문구에 식은땀을 주룩 흘렸다.
“설마, 아틀란티스에 들이닥칠 재앙이란 게…….”
재앙.
말 그대로 재앙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괴물의 등장에 입술을 저민 그는.
죽여 달라 죽여 달라 노래를 부르던 그 빌어먹을 공주를 떠올리며 미간을 꾹 짚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덤터기고 뭐고 그냥, 바라는 대로 정리해주는 거였는데.
재앙이라고 해봤자 산사태나 조금 터질 줄 알았던 하준은, 앞에 ‘대’ 자를 열 개를 붙여도 모자랄 것 같은 놈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크라켄.”
지하 감옥에서 나와 멍하니, 한참 동안 돔 밖을 올려다보던 루시오는.
나지막이 괴물의 이름을 되뇌며 달달거리는 몸을 겨우 진정시켰다.
크라켄.
바다와 관련된 수없이 많은 설화와 이야기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유명한 인지도와 막강함을 가진 전설적인 대괴수.
“하준, 빨리 도망치는 겁니닷! 저건, 저건 어떻게 막을 방법도 없는 것입니닷!”
헤라클레스나 페르세우스, 지그문트 같은 날고 기는 대영웅들조차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을 정도의 괴물.
설령 힘이 있더라도 저 말도 안 되는 덩치를 어찌 잡을지, 통 답이 안 나오는 상황에 지그시 고개를 저은 님프는.
황급히 게이트가 있는 동굴 쪽을 가리키며, 하준을 재촉했다.
“아니, 괜찮을 거야. 아직 왕궁에 비석 하나 남았잖아? 적어도 받기로 한 보물 하나 정도는 챙길 시간이…….”
그에 여기서 500m도 채 남지 않은 목적지를 바라보며, 오늘 하루 고생한 몫을 생각하니 쉬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흘기던 하준은.
이내 잠깐 밝아졌다 다시 제 머리 위로 내려앉는 그림자를 보고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우우웅-
콰자자자작-!
“……아이, 시팔.”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구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