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know nothingness? RAW novel - Chapter 207
73. 인외마경 (1)
유진은 노엘의 도움을 받아 제임스, 김비서, 박유원, 나상철과 함께 판타리아로 넘어왔다.
처음에는 좋았다.
소풍 느낌도 났다.
그도 그럴 것이, 생사경의 고수인 유진을 제외하더라도 제임스와 김비서가 이미 현경인데다가 박유원은 현경의 벽을 두드리고 있는 중이다. 최약체인 나상철까지 화경이다.
구멍이 없다.
어떤 괴물이 나타나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유원아. 육포를 씹으니까 내 군생활이 떠오르는구나. 정말이지 험난했지.”
“군대 별거 아니잖아요.”
“미쳤냐?”
나상철이 발끈하자 박유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인전형으로 군대 가면 할 만하다던데요?”
“나는 무인전형 아니었다.”
“아…….”
박유원이 히죽거렸다.
“무인전형도 못 드셨던 상철 형님이 화경이라니, 세상 많이 좋아졌습니다.”
“무인전형이든 뭐든 군대는 고달픈 거야. 너도 나중에 군대 가면 알 거다.”
“저는 안 갑니다.”
“왜?”
“심마 이력 있으면 면제예요.”
“네가 뭘 알겠냐. 쯧.”
나상철이 유진에게 말했다.
“어이, 홍유진 씨. 홍유진 씨도 군대 갔지? 무인전형 아니었지?”
유진은 멈칫했다.
그는 군필이다.
이력은 그렇다.
육체의 주인인 홍유진은 나상철처럼 무인전형에 합격하지 못해 생으로 입대한 바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유진에게는 어렴풋한 육체의 기억에 불과하다.
“뭐, 그렇지요.”
유진은 육체의 기억에 의존해 허세를 부렸다.
“집채만 한 멧돼지랑 그 멧돼지만 한 독수리가 있었죠.”
“이야, 전방 출신이야?”
“물론입니다.”
“역시 무사부라니까. 미필들이 뭘 알겠어. 김비서 코치는 어때?”
“저도 면제입니다.”
“왜?”
“고아라서 전시근로역입니다.”
“그, 그렇군.”
이제 모두의 시선이 제임스에게 모였다.
“뭐, 제임스는 당연히…….”
“나도 군인이었다.”
“뭐?”
“몇 번이고 사선을 넘었지.”
바위에 걸터앉은 채 칼로 나뭇가지를 조각하던 제임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서…….”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학비 때문에 입대하는 미국인의 이야기는 매체를 통해 누구나 한 번쯤 접해 보는 것이다.
제임스가 말을 이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서 맥도날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어스 오브 탱크라는 게임을 했었지. 난 정말 최선을 다했다. 따지자면 전차병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
나상철과 박유원이 바닥에 있는 조약돌을 그에게 던졌다.
“에라이.”
이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나 할 때는 고난이 닥칠 줄 몰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건사고가 생겨났다.
제일 먼저 이상증세를 보인 것은 뜻밖에도 김비서였다.
“김비서! 진정해!”
“비서 형님!”
마경을 헤매던 유진 일행은 나무 아래에 자라 있는 버섯을 발견했다.
김비서는 그게 먹을 수 있는 버섯이라고 주장했다.
청학동 출신으로서 산야초에 대해 일가견이 있다는 것이다.
“이건 먹을 수 있습니다. 식량을 아낄 수 있지요.”
하지만 아무도 버섯에 관심이 없었다.
김비서는 자신이 직접 증명하겠다며 그 버섯을 섭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비서는 중독 증세를 보였다.
그 중독 증세라는 게, 몸이 아픈 게 아니었다.
“시끄러워, 미국인 놈.”
“와, 왓? 헤이, 비서. 아 유 오케이?”
몽롱한 눈빛이 되어 독설을 내뱉고, 폭력성을 표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약에 취한 사람 같았다.
“어설픈 영어 쓰지 마, 양키 자식아. 양키 고 홈.”
제임스가 상처받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서자 박유원이 나섰다.
“에, 에이. 비서 형님. 왜 그러세요. 형님답지 않게…….”
“너는 빠져, 꼬맹아.”
“형님?”
모두 겁을 먹었다.
원래 이상하던 사람이 이상한 짓을 하는 것보다, 점잖고 멀쩡하던 사람이 이상한 짓을 하는 게 더 무서운 법이다.
나상철이 애써 웃었다.
“하하, 이거 재밌네. 김비서 씨, 그러니까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라니까…….”
“너는 닥쳐.”
“이, 이봐? 그래도 내가 연장자잖아. 김비서 씨는 경우가 바른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는 나보다 약한 놈의 말은 안 듣는다.”
“이, 이 자식이. 무공 좀 세면 다야?”
“더 지껄이면 제재하겠다.”
“때려! 어디 때려 봐!”
김비서가 나상철에게 발길질을 하자, 박유원이 끼어들어 대신 맞았다.
나상철이 감격한 눈으로 소리쳤다.
“유, 유원아!”
“상철 형님을 위해서라면…….”
나상철이 쓰러진 박유원을 부둥켜안는 동안, 김비서는 그 둘을 조롱했다.
“약해 빠진 것들끼리 잘 노는군.”
김비서의 증세가 심각했다.
결국 유진이 나섰다.
“김 코치!”
그는 노기 어린 표정으로 김비서를 꾸짖으려 했다.
그런데, 김비서의 태도가 돌변했다.
“아, 무사부.”
그는 유진에게 아주 깍듯했다.
“저 쓸모없는 것들은 무시하십시오. 제가 수행하겠습니다.”
“으음?”
“존경하는 무사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 나한테는 왜 이러는 겁니까?”
“강자니까요. 강자를 따르는 건 무인의 의무.”
유진의 표정이 곧바로 온화해졌다.
“이런 김비서도 나쁘지 않군요.”
“감사합니다. 무사부를 모시게 되어 기쁩니다.”
김비서의 눈은 완전히 풀려 있었지만, 사람을 차별하는 태도는 아주 칼 같았다.
“저 약해빠진 떨거지들은 제가 관리하겠습니다. 가까이 있으면 방해만 되니 대충 뒤에서 따라오라고 하겠습니다.”
“훌륭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예. 제가 무사부의 칼이 되겠습니다.”
유진은 오히려 김비서의 차별을 부추겼다.
김비서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이, 거기 세 얼간이들.”
“왓?”
“김비서 씨?”
“형님!”
“잔말 말고 멀리 떨어져서 따라와라. 걸리적거리니까.”
그리고 그는 배낭에서 물통을 꺼내 유진에게 두 손으로 건넸다.
“무사부, 목이 마르실까 봐 물을 대령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역시 김 코치입니다.”
“별말씀을.”
“내 배낭이 무겁군요. 대신 매 주시겠습니까?”
“예.”
“물통도 들고 따라오세요.”
“존명.”
유진은 김비서에게 짐을 다 떠넘기고 뒷짐을 진 채 걸어갔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상철은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앞으로가 걱정되는데…….”
“에이, 곧 회복되겠죠. 설마 약효가 오래 갈라고요.”
“김비서를 말하는 게 아니야. 이 사건 자체가 마치 앞으로 일어날 사고에 대한 복선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지.”
“오우, 상철. 생각보다 어려운 말을 쓰는군. 복선?”
“제임스.”
“와이, 상철?”
“상철 형님이라 해야지.”
“나는 외쿡인이라 구런 거 몰라.”
“이 자식이…….”
어쨌거나, 그들은 마경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유진은 이종도의 기억을 통해 엘프들의 거점이 있던 위치를 특정했고, 그곳으로 일행을 이끌고 있었다.
문제는 얼마나 오래 걸릴지 그 역시 확실히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유진이 알아낸 것은 대략의 방향 정도였다.
“일주일만 지나도 식량이 부족한데…….”
“괴물이라도 사냥해서 먹으면 되죠.”
그 말을 들은 나상철이 미간을 모았다.
“그런데, 그랬다가 괴물 고기 같은 거 잘못 먹고 김비서처럼 되면 어떡해?”
나상철이 유진과 김비서를 가리켰다.
반쯤 드러누운 유진이 김비서의 안마를 받고 있었다.
마치 왕과 노예 같았다.
박유원이 몸서리를 쳤다.
“그러네요. 저는 결코 저렇게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정신 바짝 차려.”
하지만 다음날이 되자마자 그들은 새로운 문제와 맞닥뜨렸다.
이번에는 박유원이었다.
“그거 치워.”
“안 됩니다.”
“헤이, 유원. 그건 위험하다.”
“괜찮습니다!”
자그마한 새끼 괴물을 발견한 박유원이 괴물을 키우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이다.
그 마음은 이해할 만했다.
괴물이라지만 너무나 귀여웠다.
강아지와 고양이의 중간쯤 되는 생김새였는데, 말을 걸면 알아듣는 것처럼 접힌 귀를 쫑긋 세웠다. 쓰다듬어 달라는 듯 맑은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기도 했다. 그러다 손길이 닿으면 애교 부리듯 꼬리를 흔들었다.
말도 잘 알아들었다.
“바둑아, 손.”
“왕!”
박유원이 말하자마자 바둑이라 이름 붙여진 괴물이 앞발을 내밀었다.
“보세요. 엄청 귀엽잖아요!”
박유원은 기뻐했지만, 나상철은 오히려 위험을 느꼈다.
언뜻 보이는 바둑이의 발톱이 너무나 예리했던 것이다.
외모만 귀여울 뿐, 분명 위험한 괴물이 될 놈이었다.
“유, 유원아. 그 녀석은 그냥 보내 주자. 자연에서 살아야지.”
“하지만 계속 따라오잖아요.”
“발로 차면 안 따라와.”
“어떻게 바둑이를 차요!”
“끙…….”
나상철은 박유원을 설득하려고 했다.
“저러다 우리가 잘 때 목을 콱 물지도 몰라.”
“바둑이를 함부로 매도하지 말지요!”
“진짜라니까?”
“제가 책임집니다!”
“아니, 우리 목숨이 달려 있는데 네가 어떻게 책임져?”
“제가 잘 때도 데리고 있을게요!”
“아니…….”
박유원은 바둑이를 애지중지했고, 바둑이도 박유원을 잘 따랐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이따금 바둑이가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을 드러낼 때마다 나상철은 등골이 서늘했다.
“저기, 말려야 하는데…….”
하지만 유진과 김비서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제임스는 고양이 알러지가 있다며 애초에 바둑이를 멀리했다.
나상철만이 바둑이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탄식했다.
“벌써 세 그룹으로 나뉘었어…….”
버섯에 중독된 김비서와 이를 이용하는 유진.
바둑이에게 홀린 박유원.
그나마 멀쩡한 제임스와 나상철.
“제임스, 어째 우리만 상식적인 것 같은데.”
“우리?”
“응?”
“오케이, 그런 걸로 해.”
“왠지 기분이 나쁜데…….”
이 기묘한 상황은 밤이 되자 더욱 악화되었다.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친 것이다.
거센 바람과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유진 일행은 혼란에 빠져 밤을 보냈다.
“다 젖잖아!”
“제기랄, 텐트에 구멍이 났어!”
“내공으로 체온을 유지해!”
“물이 새는데요!”
“텐트는 그냥 버리자!”
“뭐야, 그 바둑이 새끼가 식량을 다 처먹었어!”
“바, 바둑이 짓이 아닐걸요?”
“맞아!”
“홀리 쉿!”
“약해빠진 것들…….”
“바둑이 어딨냐!”
“진정하세요, 진정!”
“으아아아!”
긴 밤이 지나고, 해가 떴다.
아침이 되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세상이 고요해졌다.
다섯 남자는 거지꼴이 되어 있었다.
“텐트는 이제 못 쓰겠네.”
챙겨 온 텐트는 넝마가 되었다.
“짐도 다 사라졌어…….”
모아 둔 배낭 몇 개가 폭풍에 휘말려 어딘가로 날아갔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들이 혼란에 빠진 틈에 바둑이가 식량을 전부 먹고 도망쳤다.
식량이 들어 있던 더플백은 바둑이의 이빨과 발톱에 의해 갈갈이 찢겨 있었다.
나상철이 이를 갈았다.
“바둑이 그 새끼, 애초에 쫓아 버렸어야 했어.”
“죄송합니다…….”
“네가 다 책임진다며, 유원아.”
“그냥 한 말이죠.”
“뭐?”
“배신의 아픔을 겪고 있는 저한테 너무 매정하시네요.”
“이 자식이…….”
버릴 것은 버리고, 챙길 것은 챙겨 짐을 정리하고 나자 그들의 차림이 가벼워졌다.
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요. 다들 마음 단단히 먹읍시다. 김비서는 일단 내 짐까지 들고, 내 어깨를 안마하면서 따라오세요.”
“알겠습…….”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김비서가 제정신을 차렸다는 점이었다.
“무사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내 짐을 들고 안마를…….”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으음?”
김비서가 머리를 짚고 비틀거렸다.
“큭, 기억이 흐릿하군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비서 형님! 돌아오셨군요!”
“내가 왜 여기 서 있는 거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박유원이 곧바로 김비서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일러바쳤다.
김비서가 경멸의 눈빛으로 유진을 쳐다보았다.
“버섯에 중독된 저를 아주 노예처럼 부리셨군요.”
“기, 김 코치가 자진해서 한 일 아닙니까?”
“실망스럽습니다.”
“아아니…….”
“제임스 씨, 나상철 씨, 그리고 유원. 버섯 때문이긴 했지만, 무례하게 굴었던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김비서는 유진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들이 박수를 쳤다.
“돈 워리. 그럴 수도 있다, 비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요.”
“제정신으로 쓰레기짓 한 건 저기 한 명뿐이지.”
“그러게 말입니다.”
유진이 항의했다
“여, 여러분. 판타리아에서 날 그리 함부로 대하면 안 될 텐데요.”
“뭐, 어쩌실 건데?”
“내가 길을 이상하게 안내한다든지…….”
“이미 길 잃은 거 아닙니까?”
네 사람은 유진을 의심했다. 나상철이 두 팔을 펼쳤다.
“홍유진 씨, 애초에 이 길 맞아?”
“물론입니다. 나는 별자리와 해의 방향을 보고…….”
“여긴 지구가 아니야. 홍유진 씨는 판타리아의 천문에 대해 모르잖아? 그걸 어떻게 읽어?”
“대강 보면…….”
“대강? 이 위험한 곳에 대강 왔다고?”
유진이 궁지에 몰렸다.
그때였다.
[웬 인간들이지?]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유진 일행이 동시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마경에 인간들이 어쩐 일로?]오르크가 서 있었다.
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