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101)
나름의 각오를 다진 후.
나는 루스의 두 손으로 어깨를 그러쥐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지금 내 힘으로는 너를 구해 줄 수 없어.]이런 말을 해야 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 화나지만, 루스에게 언제까지나 기대를 심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루스는 현실을 알아야만 했다. 내가 없어도, 제 곁에 아무도 남지 않아도 스스로 걸음을 옮길 수 있도록.
[어쩌면 앞으로도 몇 년 동안 이렇게 갇혀 지내야 할지도 몰라.]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그건 괜찮지 않은 거야, 루스.]괜찮지 않아야 하고.
내 말에 루스가 커다란 눈망울을 몇 번 끔뻑이며 눈치를 살폈다.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싶었다.
아직 이해하기 어렵겠지. 그럴 수밖에 없을 터다.
‘그간 계속 세뇌받아 왔을 테니까.’
태어난 순간부터 내내 세뇌당한 시간에 비하면 나와 만난 시간은 얼마나 될까.
새 발의 피 수준은 될까?
물론 루스는 나와의 만남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된 데다, 최근에는 제 욕망까지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지만…….
‘세뇌는 그렇게 쉽게 풀리는 게 아니야.’
특히나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어린아이 때 쌓아 올린 버릇과 세뇌는 더더욱 깨기 어려웠다.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 남은 트라우마는 평생 갈 정도니까.
그런 만큼 접근하는 방법도, 극복을 위한 방법도 모두 조심스럽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루스가 정확히 어떤 세뇌를 당한 건지도 알아야겠지.’
황제가 루스에게 바라는 것.
그는 이 어린아이에게 무엇을 바라고 이런 짓을 저지른 걸까.
어떤 소원을 빌라고 수없이 주입한 걸까.
“……루스.”
솔직히 말하자면 두려웠다.
루스의 사례를 맡기엔, 나는 전문 상담사도 의사도 아닌 만큼 잘못된 접근을 할 가능성이 컸으니까.
‘그래도 물러설 순 없어.’
당장 루스의 곁에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이 모든 건 결국 루스가 마음을 열어 줘야 가능한 일이지만.’
나는 부러 눈썹을 누그러뜨리며 힘없이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는 제법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하거든. 내가 아직 네게 제대로 된 신뢰를 쌓아 주지 못했대도 사실 할 말은 없지만…….] [아니에요, 미에나!]그러자 루스가 격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
[저는 미에나를 믿어요. 미에나가 하는 모든 말을 믿어요!]앗, 그건 좀 감동인데.
사실 그런 맹목적인 신뢰는 서로에게 해가 될 뿐이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오히려 좋지.
[그러면 말이야, 루스.]나는 여전히 머뭇대는 기색으로 천천히, 진심을 담아 말을 건넸다.
[지난번에 네가 내게 보여 주지 않았던 그 장면, 네 비밀.] […….] [내게 알려 줄 수 있을까?]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스의 뽀얀 뺨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올려 두었던 양팔을 조심스레 내리고서 미소 지었다.
[너를 돕고 싶어서 그래.]이곳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하니까.
그가 원하는 게 정확히 뭔지, 이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완전히 손을 놓고 그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루스가 눈동자를 이곳저곳으로 굴리며 우물거렸다.
루스가 내게 알려 주지 않는대도 그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내 한계가 여기까지였을 뿐.
[죄, 죄송해요…….] [괜찮아, 루스. 어차피 대충 예상은 하고 있고, 방법은 더 있을 테니까―]괜히 강요했다간 역효과만 일어날 뿐이다.
우선은 한발 후퇴할 심산으로 다급히 말을 꺼낸 찰나, 정전이라도 된 듯 순식간에 하얀 공간이 훅,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래, 오늘도 잘 있었니?]동시에 내가 몇 번이나 되감으며 곱씹었던, 예의 그 소리가 귓속을 타고 흘렀다.
나는 순식간에 뒤바뀐 풍경에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 예상대로, 그 시선의 끝에는 지난번 마주했던 황제가 자리해 있었다.
‘나한테 죄송하다고 한 게 아니었구나.’
이곳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현실의 황제에게 용서를 구한 거야.
나는 이번에도 루스에 동화된 채 흘러가는 상황을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함께 공부하자꾸나.]회상 속 황제는 겉으로 보기에는 내게 그랬던 것처럼 무척이나 다정했다.
그러나 아이의 눈은 때로는 그 너머를 꿰뚫어 보는지라.
[복습부터 해야지?]상냥한 어조 이면으로 드러나는 본능적인 위압감, 공포심이 아이의 얇은 뺨을 타고 흐른다.
부드럽게 접히는 눈꼬리 속 채 감추지 못한 탐욕이 심장을 달음박질치게 만든다.
내가 마주했을 때 느꼈던 불쾌감과 본능적인 두려움을 루스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저번 꿈에서 레오날드 씨를 마주했을 때도 그렇게 두려워했던 거였어.’
황제와 레오날드 씨는 비슷한 연령대였으니까. 레오날드 씨를 보고 황제를 떠올린 거겠지.
달리 말하자면, 루스는 고작 모습이 비슷한 사람을 봐도 벌벌 떨 정도로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것이다.
[……자, 그래서.]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솜니움 제국의 역사, 유스틴이 지난번 내게 말해 주었던 수호룡과 초대 황제의 계약, 그리고 그 축복과 능력에 관한 이야기를 한바탕 늘어놓은 후.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겠지.]황제가 이번에도 노래하듯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동시에 루스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성인이 되면 솜니움을 위해 두 가지 소원을 빌어야 해요.] [어떤 소원을?] [이번 치세가 영원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제게 깃든 드래곤의 축복이 하인리히 미드가르트에게 귀속되게 해 주세요.] [옳지.]이 말을 내뱉을 때 루스에게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같은 말을 반복한 듯 기계적인 대답의 연속.
황제는 그런 루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무릎을 숙여 루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말을 건넸다.
[너는 특별한 존재니, 네 존재는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된단다. 아무도 너를 알아서는 안 돼.] […….] [삿된 것들은 네게 감히 말을 걸 수 없어. 언제나 말을 아끼고, 행동을 조심하고. 누구도 너를 감히 알 수 없도록 해야 한단다.]너는 특별한 존재니까.
그가 자못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그럴싸한 단어로 포장됐으나, 결국은 모두 헛소리였다.
일국의 황제가 되려면 개소리도 저렇게 멋지게 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는구나……, 는 개뿔.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보니 더 거지 같네.’
그러니까 저걸 계속해서 반복했다는 거지. 하루도 빠짐없이, 아이가 이상함을 느낄 틈도 주지 않고.
‘이번 치세가 영원하게 해 달라는 건 제 황권을 공고히 하기 위함일 테고.’
드래곤의 축복이 제게 귀속되게 해 달라는 건 스스로 소원권을 다시 얻기 위함인가?
아니면 흰 머리와 푸른 눈의 상징성을 얻기 위해?
‘둘 중 무엇이든 최악인데.’
그를 마주했을 때 느꼈던 역한 울렁거림이 또 한 번 몸을 훑고 지나갔다.
다행히 꿈속이었던 덕에 몸 상태가 나빠지진 않았지만.
[보여 줘서 고마워, 루스.]어느덧 원래대로 돌아온 풍경 속, 나는 여전히 눈치를 살피며 서 있는 아이를 마주하곤 힘없이 미소 지었다.
모든 행동과 생각을 제한당해 꿈조차 제대로 꾸지 못하던, 그러면서도 끝내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은 여린 아이를.
[그래서, 루스는 지금도 성인이 되면 그 소원을 빌 생각이야?] [그, 그래야 한다고 배웠어요.] [네 마음은 어떤데?] [저는…….]내 물음에 루스는 몇 번 입술을 어물거리며 눈동자를 굴리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자, 잘 모르겠어요.] [응. 말해 줘서 고마워.]좋아, 뭐부터 해야 할지 정확히 알겠어.
루스가 제 상황의 부당함을 깨닫고, 스스로 벗어나게끔 만드는 것.
현재 루스는 제 상황이 이상하다는 정도까지는 인지하기 시작했으니, 다음 단계인 ‘부당함을 느끼기’로 넘어가야 할 텐데.
‘지금 루스는 이 현실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으니까.’
사실 이건 단기간에 바뀔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아무리 앞에서 이끌고 뒤에서 받쳐 줘도 결국엔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는 일.
그러니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좋아, 이제부턴 조금 다른 걸 배워 보자.] [다른 거요?] [응, 다른 거.]이전까지는 루스에게 세상을 경험시켜 주는 체험형 학습이었다면, 앞으로는 자기 관리 역량에 치중한 교육을 진행해야지.
‘거기에 혹시 모르니 웅변이나 예법, 대인관계와 도덕, 주변 국가의 역사와 정치도…….’
다시금 루스의 커리큘럼을 짜 내려가던 도중, 나는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생각을 멈췄다.
‘어라, 그런데 나 정치는 배운 적이…… 없는데?’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