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102)
특유의 나른하고 권태로운 목소리가 웅혼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이 세상이 약육강식인 건 맞다만.
[그건 올바른 통치 방식이 아닌걸요. 까딱 잘못했다간 암살당하거나 단두대에 끌려갈 텐데.]공포정치의 말로는 역사에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어서 잘 알고 있다고.
내 말에 어르신이 자못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꺾으며 말했다.
[고작 그런 철 덩어리 따위에 죽을 정도라면, 애초에 만물 위에 군림할 자격이 없는 것 아니겠니.] [그렇게 자꾸 어르신의 기준으로 말씀하시면 곤란해요…….]우리 인간은 툭 치면 쓰러질 정도로 연약하다고.
특히나 우리 작은 강아지는 말랑말랑 나라에서 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작고 소중하단 말이야.
[너는 결국 그 애를 황제로 옹립할 생각이로구나.]그사이 어르신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기울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는 곧바로 상념에서 벗어나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냥 정치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해 물었을 뿐인데.
[뻔하지 않으냐. 네 성정에 누군가를 다스릴 리는 없는 데다 네 최근 관심사는 그 아이 말고는 더 없으니.] [역시 어르신 눈은 못 속인다니까요, 헤헤.] [말이라도 못 하면.]그가 나를 밉지 않게 흘겨보며 말했다. 나는 몇 번 헤실헤실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루스를 황제로 추대하려는 건 아니에요. 애초에 저한테 그럴 능력이 있지도 않고.] [그러면?] [가능성을 열어 두는 거죠.]훗날 루스가 첫 번째 소원을 ‘황제에게 벗어나게 해 달라’로 빈다면, 혹은 그와 비슷한 소원을 빈다면.
가장 좋은 결과는 역시 루스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속박을 벗어던진 채로 그가 제 삶을 찾아 떠나는 거지만…….
[저번에 어르신께서 직접 말씀하셨잖아요. 소원 마법은 결과를 보장해 줄 뿐, 그 과정은 시전자 본인도 알 수 없다고.]루스가 어떤 식으로 황제에게서 벗어나게 될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황궁을 벗어나는 데에서 그칠지, 혹은 그를 속박하던 모든 것을 제거하게 될지.
[저는 단지, 그 아이가 어떤 방식으로든 행복해졌으면 할 뿐이에요.]내가 없는 세상 속에서도,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도록.
‘까딱 잘못하다간 애를 공부의 무한 굴레로 밀어 넣을 수 있는 생각이긴 하지만.’
루스 본인도 즐기면서 따라와 준 덕에 광기의 학부모 역할은 피할 수 있었더란다.
[그러고 보니, 너 말이다.]나의 귀여운 스펀지를 다시금 떠올리는 사이, 어르신이 조금 전과는 달리 퍽 불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몸도 성치 않은 녀석이 내 꿈까지는 어떻게 기어들어 온 게야? 설마 또 그 몸으로…….]나는 퐁퐁 솟아오르는 루스의 해맑은 얼굴을 한구석으로 밀어 넣으며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에이, 아녜요. 그랬으면 이렇게 꿈으로 찾아오지 않고 그냥 레어로 직행했죠. 저 집이에요.]그러니까 그런 살벌한 눈빛으로 쳐다보지 마시고, 좀.
[저번에 여행 다녀온 후로 며칠 앓고 나니까, 꿈 탐지 범위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더라고요. 그래서 어쩌다 보니―] [내게 닿았다는 거구나.] [바로 그거죠.]아주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했습니다. 조금만 더 멀었으면 안 닿았을 뻔.
연신 입꼬리를 빼 당긴 채 방긋방긋 웃으며 말하려니, 그가 눈매를 가늘게 늘이며 툭 말을 꺼냈다.
[그 정도면 당연히 몸이 성할 리 없을 텐데.] [헤헹.]쳇, 또 들켰군.
이래서 눈치 빠른 드래곤이란.
[안 그래도 조금 답이 없더라고요. 이제는 약도 안 듣고.] [남들 살리는 데에는 그렇게 진심이면서, 정작 제 몸 하나 돌보는 건 그리 건성이니.]나는 곧바로 반박했다.
[아이, 아녜요. 지금은 어디 안 나가고 집에만 박혀 있는걸요.] [흐음.] [어르신의 보물도 걸 수 있어요.]나도 내 몸을 돌보고자 하는 최소한의 양심은 있다고.
‘물론 집 안에만 박혀 있는 게 온전히 나의 의지는 아니지만.’
따지자면 온 가족이 힘을 합쳐 내 외출을 막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지크프리트 씨는 침실 앞을 지키고, 부모님과 티나는 수시로 내 방에 들어와 몸 상태를 살피고.
‘사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알아서 집에 잘 박혀 있을 생각이었는데.’
나는 부러 팔짱을 끼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 그래도 황제의 눈에 드는 것보다는 연약함을 어필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집에 가만히 있는 중이에요.] [조막만 한 것이 그새 우두머리까지 만나고 왔나 보구나. 네 그렇게 빨빨거릴 때부터 알아봤지.] [그으것도 맞긴 하지만, 황실에 연줄이 있기도 해서요.]물론 걔는 나를 황궁에 보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 썼지만.
‘그러고 보니 유스틴하고도 요즘 통 연락이 안 된단 말이지.’
루스를 돌볼 시간이 늘어난 건 좋긴 한데.
어쨌든 그렇게 멍하니 집에서 요양하다 보니, 벌써 계절은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바람이 꽤 선선하더라고요. 새삼 시간 참 빠른 것 같아요.] [말을 돌리려는 시도치고는 주제를 퍽 잘못 골랐구나.] [엇, 그러게요.]딱히 화제를 돌리려고 한 말은 아니지만, 하필이면 드래곤 앞에서 세월을 논하다니.
짐짓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입술을 오므리자, 그가 자그마한 미소를 입술 끝에 걸쳤다.
가식은 됐으니 더 말해 보라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이런 표정도 구분할 수 있게 되다니, 새삼 정말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군.’
나는 눈썹을 한 번 으쓱이고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옛날부터 저는 항상 이번 겨울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는 진단만 받아 왔었거든요.] [순 돌팔이들이구나.] [그렇다기보다는 제가 잘 버틴 거죠. 부모님도 가산을 팔아 가면서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고.]사실 부분적으로는 돌팔이가 맞긴 했다. 요 몇 년간 받아 온 시한부 선고는 딱히 내게 위협이 되지 않았으니까.
‘스스로 알고 있던 거지.’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라는걸.
[그런데 이번 겨울은…….]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가끔 창문을 열 때마다 불어닥치는 소슬바람에서 죽음의 향기가 느껴진다는 말을.
내 몸이 버티지 못하는 걸 하루가 지날수록 여실히 깨닫고 있다는 사실을.
‘후회는 하지 않아.’
사람을 살린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반복할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아주 조금 아쉽고 불안했다.
[제가 잘 버틸 수 있을까요?]기대하면 안 되는데. 어르신께 이 이상으로 무언가를 바라는 건 사치인데.
이미 그에게서 많은 것을 얻은 마당에 목숨까지 바라는 건 염치가 없잖은가.
[네 생이 몇백 번은 반복될 정도로 오래전의 일이다.]그 순간 어르신이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경청 모드에 돌입했다.
우리 교수님, 아니, 어르신이 갑자기 화제를 돌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때 우리는 마음에 드는 인간의 생이 질 때까지 계약 관계를 맺는 걸 일종의 유희로 여겼지.] [오……, 어르신도요?] [당연히 나는 아니지. 너희가 뭐가 예쁘다고 내 힘을 주겠느냐?]그런 것치고는 저를 너무 예뻐하시는데요.
[어쨌든, 그때 남아 있던 찌꺼기 중 하나가 제 계약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일방적으로 계약을 어겼던 적이 있단다.]특유의 권태로운 금안이 나를 바라보며 사르르 휘어졌다.
[그 드래곤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으냐?] [어, 글쎄요…….]계약의 당사자기는 해도, 계약을 건 것도 본인이니 크게 손해를 입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애초에 계약을 끊으면 되는 일 아닌가.
내 표정에 드러난 답을 읽었는지, 어르신이 이전보다 더 매혹적으로 눈을 접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온몸이 얼어붙어 발톱부터 머리까지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단다.] […….] [이제 알겠느냐, 우리 일족의 계약은 일방적으로 깰 수 있을 정도로 가볍지 않아.]말을 마친 어르신이 웃음기를 거두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게다가 나는 내 영혼 일부를 네게 심어 두었지.”
그러고서는 자못 단호하게, 그러면서도 다정한 목소리로.
[아무리 작은 조각일지라도, 나는 나의 것을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긴단다.]그가 다시 한번 눈꼬리를 다정하게 휘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나는 그의 조각 같은 미소를 멍하니 응시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툭 질문을 던졌다.
[어르신은 제게 왜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거예요?]아니, 솔직히 그렇잖아.
나는 이 꿈에 어쩌다 들어온 인간이고, 사실 어르신 관점으로 보면 조금 흥미로운 미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텐데.
‘쓸모를 증명하기에는 뭐 하나 제대로 해낸 것도 없고.’
그런 주제에 창고에 있는 보물을 싹 쓸어 가고 있으니, 솔직히 나였으면 당장 계약 파기하고 내쫓았을 것 같은데.
[흥미롭고 재밌잖느냐. 이 작은 것이 뭐라도 하겠다고 빨빨거리는 걸 구경하는 것도 제법 즐겁고.] [아, 그런 이유라면 더 잘 돌아다닐 수 있어요. 맡겨만 주세요!] [되었다. 내 말했잖니, 나는 너를 오래 보고 싶다고.]이윽고 그가 내 볼을 꼬집고 싶은 것처럼 두 손가락을 모으더니, 이내 다시 팔을 거둬들이고서 고개를 꺾었다.
[굳이 명확한 대답을 원하는 거라면, 글쎄. 나조차도 잘 모르겠구나. 이 작고 하찮은 것이 뭐 그리 귀엽다고 이렇게까지 해 주는지.] [헤헤…….] [그런데 엎어 버린 물을 이제 와 어쩌겠느냐.]곧이어 어르신이 황금빛 눈동자 속에 나를 온전히 담아내고서 사르르 눈매를 휘었다.
[내 가진 모든 것보다 네가 더 반짝여 보이는 것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