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107)
“사무엘?”
특유의 음울함이 가셔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사무엘 맞는 것 같은데?
낯익은 인영에 자그맣게 중얼거리자, 곧 남자의 고개가 번뜩 내 쪽을 향했다. 나는 순간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귀 진짜 밝네!
“무슨 일이야, 사무엘? 갑자기 왜 그쪽을…… 레이디?”
사무엘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이내 사무엘의 뒤편에서 자그마한 소녀가 불쑥 튀어나왔다.
당연하게도 클레어 에카르트였다.
나는 곧바로 팔을 들어 그들에게 손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에카르트.”
케이프 안 입고 있어서 다행이다.
“여기서 이렇게 뵙다니 저, 정말 반가워요!”
곧이어 클레어가 내 쪽으로 다가오며 해맑게 미소 지었다.
잔뜩 위축되어 있던 지난번과는 달리 좀 더 밝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사무엘도 그렇고, 클레어도 그렇고.
‘그 악몽에서 벗어난 것 같아.’
잘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네.
“저번에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미처 못 전했습니다. 큰 도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사이 사무엘이 저번과는 달리 깍듯한 존댓말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심지어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까지 걸친 채였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사람이 바뀔 수 있다니.
“에이, 뭘요. 그때는 경황이 없었잖아요. 그래도 재판이 잘 끝난 것 같아 다행이네요.”
“모두 신경 써 주신 덕분입니다. 그곳에 있던 아이들을 따로 챙겨 주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이고, 은혜라뇨. 그냥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저번부터 자꾸 구원이니 은혜니, 거창한 단어를 듣는 기분인데.
나는 황급히 손을 홰홰 내젓고서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는 두 사람, 축제 즐기러 왔나 봐요. 여기서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 제국 귀족들은 건국제 기간에 저들끼리 사교 연회를 벌이고는 하니까.
“아, 네에. 그곳에서 나가면 다 함께 건국제를 구경 가자고 약속했었거든요.”
내 말에 클레어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나는 자그마한 입술 끝에 걸린 씁쓸함을 발견하고서 그녀를 따라 작게 웃어 보였다.
극복하되 잊지는 않는 거구나.
곧이어 클레어가 다시금 밝은 미소로 입을 연 찰나였다.
“레이디께서는……, 히끅.”
특유의 연둣빛 눈동자가 자연스럽게 옆쪽을 향했다가 갑작스레 팝핀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내 옆에 있는 소년을 기억해 내고서 이번에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빼 당겼다.
어쩐지 주눅이 안 든다 싶더니, 아예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안 보였던 거구나.
“죄, 죄, 죄송해요! 제가, 제가 두 분의 시간을 방해해 버려서……!”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클레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와 유스틴이 동시에 부정했다.
그 와중에 유스틴은 ‘괜찮다’라고 해 버리네. 지독한 약혼자 콘셉트 같으니라고.
나는 큼큼 헛기침을 내뱉고서 친절하게 덧붙여 말했다.
“음, 레이디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에요. 가족과 함께 구경 왔거든요. 마음 같아서는 동행을 제안하고 싶은데, 불편하시겠죠?”
“부부, 부, 부, 부, 부, 불편이라뇨! 그렇지 않아요!”
내 말에 클레어가 고장 난 기계처럼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
‘부를 대체 몇 번이나 말한 거야?’
아무리 봐도 불편해 보이는데.
“제, 제안은 감사드리지만, 해방 후 첫 건국제는 저희끼리 보내기로 오래전에 약속해서요.”
곧이어 그녀가 조금 안정을 되찾고서 쑥스럽다는 듯 말을 건넸다.
나는 그녀의 손에 꼭 쥐어진 로켓 달린 펜던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말로 여러분의 좋은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닐까 싶네요.”
“그, 그렇지 않아요. 이렇게 뵈어서 정말로 반가웠는걸요! 다, 다음 건국제는 꼭 함께 구경해요, 레이디.”
말을 마친 클레어가 여전히 부끄러운 듯 눈 밑에 작은 홍조를 띠고서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몇 번 곱씹다가 끝내 옅게 미소 지으며 화답했다.
“……네, 좋아요.”
부모님이 지금 안 계셔서 다행이야. 이 말을 들었으면 대로에서 눈물바다가 펼쳐졌을 뻔.
“그럼 즐거운 건국제 되세요.”
“레, 레이디도 행복한 건국제 되세요!”
그렇게 클레어와 사무엘을 배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늦어서 미안하구나, 미에나! 네가 먹어도 될 것들을 추리느라 그만…….”
부모님이 품에 갖가지 음식들을 안아 들고서 내게 다가왔다.
‘저게 다 몇 개야.’
뭘 이렇게 많이 사 오셨대?
“저는 그냥 글라세 정도만 먹어도 되는데…….”
“네가 직접 무언가를 먹어 보고 싶다고 했는데 그럴 수야 있겠니. 이외에도 더 먹고 싶은 게 있다면 말만 하려무나.”
어머니가 내게 조각 파이 하나를 내밀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나는 그제야 근래 내가 식사를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맨날 입맛 없다고 하던 애가 갑자기 길거리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하니, 당연히 이런 반응일 수밖에.
“돌아다니면서 조금씩 천천히 먹을게요. 다 같이 나눠 먹어요.”
나는 파이를 다시 조금 잘라 내 유스틴에게 건네며 활짝 웃었다.
그러자 내내 굳은 얼굴로 서 있던 유스틴이 떨떠름하게 내가 건넨 파이를 받아 들었다.
나는 다시금 눈꼬리를 휘고서 가볍게 말을 건넸다.
“이 맛은 지금이 아니면 다시 느끼기 힘들 테니까요.”
이 조각 파이에는 단순히 밀가루나 사과 같은 것뿐만 아니라, 지금이 아니면 넣을 수 없는 재료도 들어가 있었다.
축제의 활기찬 분위기나 나누어 주는 사람의 호의,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 같은.
‘모두 빠짐없이 기억해야지.’
비단 나의 추억으로만 남기지 않고, 내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걸 루스에게 다시 전해 주고 싶으니까.
이 즐거운 분위기와 활기찬 사람들,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생명의 박동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루스에게…….
“미에나.”
바로 그때, 내 귓속으로 짤막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나는 삐걱삐걱 고개를 돌려 유스틴을 바라보았다.
“아, 부르셨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만은 말하면 안 되는 사람 생각? 우리의 폭탄 주제?
여기서 괜히 루스 얘기 꺼냈다가 분위기만 안 좋아질 것 같은데.
‘그냥 대충 얼버무려야겠다.’
생각을 마치고서 완벽한 변명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그 아이를 떠올린 겁니까?”
“어우.”
브레이크 없이 훅 들어온 물음에, 나는 순간 깜짝 놀라 날것의 반응을 내보였다.
아주 도사가 따로 없다니까.
당장 저쪽에 자리 깔고 점 봐준다고 나서도 삽시간에 사람 몰릴 듯.
“……그냥, 그 아이한테 제가 경험한 걸 그대로 보여 주고 싶어서요.”
나는 결국 하는 수 없이 한숨을 푹 내쉬고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미 다 들킨 마당에, 유스틴을 상대로 속여 봤자 뭐 하랴.
“그 표정으로…….”
그러자 유스틴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말고 인상을 작게 찌푸렸다.
뭐야, 내가 무슨 표정이었는데.
그러는 너는 왜 그런 표정인데?
“……됐습니다.”
급기야 그는 뾰로통하게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나는 일련의 행동들을 멀뚱히 바라보며 빠르게 두 눈을 깜빡였다.
가만 보면 얘도 요즘에 참 표정이 잘 읽힌단 말이야.
‘이거 지금 질투지?’
나를 연애 감정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못 박았으니, 이건 아마도 첫 친구를 빼앗겼다는 질투?
‘하긴, 쟤도 나 빼면 친구 없었지.’
판단을 마친 나는 곧장 유스틴에게 상체를 들이밀었다.
“제가 대공자님 말고 다른 친구 생각해서 기분 나쁘셨어요?”
“그런 거 아닙니다.”
“에이, 맞는 것 같은데.”
“아니래도요.”
얘니럐대얘~
이 새침한 녀석 같으니라고.
나는 그를 향해 생긋 미소 지으며 늘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저 말고도 마음 맞는 친구들 많이 만드세요, 대공자님.”
“…….”
“솔직히 대공자님은 마음만 먹으면 많이 사귀실 수 있잖아요.”
그 재력과 섬세함이면 누구든 안 넘어오고는 못 배길 텐데.
“아, 그런데 저한테 그러는 것처럼 너무 세심하게 대하지는 마세요. 그러다 약혼자가 백 명이라는 오명을 덮어쓰실지도 모르니까.”
기준을 나로 맞췄다가는 큰일 나는 수가 있겠어.
자못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자, 유스틴이 어이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합니까?”
“보통 사람들은 의외로 착각을 잘한단 말이에요. 저한테 대하듯이 굴면 오해하기에 십상이에요.”
“그럴 일 없습니다.”
곧이어 그가 은색의 눈동자를 내게 고정한 채 단언했다.
“제 약혼자는 단 한 명일 테니.”
“당연히 그래야죠…….”
그럼 약혼자가 하나지 둘이겠니?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다시 한번 덧붙여 말했다.
“그래, 방금 같은 말도 조심하셔야 해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당장 나랑 평생을 함께하는 건가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럼 당신은.”
동시에 유스틴이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당신은 그런 생각 안 했습니까?”
“저야 아까 대공자님께 확답을 들었으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확인하려 들지 않아도 다 뇌리에 박아 넣었다고.
너와 나, 우리는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
최고의 친구, 추천합니다!
“…….”
엄지까지 척 치켜세우며 말하자, 유스틴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표시로 한 번 고개를 끄덕인 후 소음이 울려 퍼지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앞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