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115)
내 유언이자 부탁을 들은 지크프리트 씨의 답은 이거였다.
‘너는 끝까지 참…….’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확답은 듣지 못했지만, 별로 걱정은 들지 않았다.
지크프리트 씨는 내 부탁을 들어줄 테니까.
‘어쨌든 지크프리트 씨도 만났고.’
다음은 역시 내 사업 동료지.
나는 오랜만에 유스틴의 이름을 종이비행기에 적어 날리고서 종종걸음을 옮겼다.
그때 이후로 유스틴의 꿈에 들어간 적이 없어서, 바뀐 꿈 문의 위치가 어디인지 감이 안 잡힌단 말이지.
[설마 다시 꿈에서도 일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말로는 맨날 쉰다고 하긴 했지만, 요즘 다시 눈에 그늘이 지는 걸 봐선 거짓말일 가능성도 없지 않고.
그러니 잠시 불시검문 있겠습니다!
[꼼짝 마, 수면과 자애의 천사다!]뒤이어 유스틴의 꿈에 들어간 나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으로 바꾸고 힘차게 외쳤다.
그런 나를 맞이한 건 그때와 같은 넓은 서재가 아니었다.
햇살이 부드럽게 들어찬, 채광 좋은 응접실.
그 가운데에 앉아 있던 유스틴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야 왔군요. 이리 와 앉으세요.] [어, 넵.]나는 머쓱하게 본 모습으로 돌아오고서 테이블 앞에 다가가 앉았다.
‘찻잔도 이미 두 잔이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제가 오늘 올 거라는 사실을 예상하신 건가요?]나는 처음 보는 응접실 풍경을 눈에 담으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유스틴이 이번에도 담담하게 답했다.
[아뇨,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딱 맞춰서……?] [딱 맞춘 것도 아닙니다.]그의 은빛 눈동자가 특유의 차분한 빛을 띠고서 내게 닿았다.
[언제 당신이 올지 알 수 없으니, 매일 이렇게 해 두고 기다린 거죠.] [와우.]나는 빠르게 두 눈을 깜빡이며 입술을 오므렸다.
언제 불시검문 올지 모르니 늘 대비해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로맨틱하게 말할 일인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괜히 제가 죄인이 된 기분인데요.] [그러라고 말해 봤습니다.]말을 마친 유스틴이 눈앞에 놓인 찻잔을 응시하며 다시금 덧붙여 말했다.
[최근엔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요.]나 역시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리며 그를 따라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영민하신 대공자님이시라면, 제가 이곳에 올 이유를 짐작하지 못할 리 없으니까요.] [이번에는 제 짐작이 틀렸으면 좋겠습니다만.] [아쉽지만 이번에도 정답이에요.]당신은 언제나 답을 정확히 짚어 냈으니까.
희미하게 웃으며 말하자, 늘 고요한 호수 같았던 유스틴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요즘 진짜 표정 변화 심하다니까.
[이건 그냥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요. 표정 숨기는 연습 다시 하셔야 할 것 같아요, 대공자님.] [필요 없습니다.]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스틴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표정을 정돈하고서 말을 내뱉었다.
그러게요, 할 필요 없겠네요.
나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다음 할 말을 골라냈다.
‘지크프리트 씨처럼 편안한 분위기도 아니고.’
내가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한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너무 어렵단 말야.
[……솔직히 실감은 안 나는군요.]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직도 뭐라고 말문을 열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사이, 유스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몇 년이 지나더라도, 당신은 늘 저와 함께할 것 같았는데.] [처음부터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맺은 협약이었잖아요.] [……그랬죠.]그가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몇 번 입술을 어물거리다, 이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꾹 다물었다.
나는 그 틈을 타 옅게 미소 지으며 대신 입을 열었다.
[그래도 대공자님 덕분에 많은 걸 하고 떠날 수 있게 됐어요.] […….] [게다가 대공자님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가문을 되살릴 수 없었겠죠. 늘 감사히 여기고 있어요.]로레인 존슨의 유산을 찾아냈으니, 어찌어찌 빚은 갚을 수 있었겠지.
하지만 거기서 무언가를 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게 손을 내밀어 준 유스틴이 아니었다면.
[제가 없었어도 당신은 어떻게든 해냈을 겁니다. 지금 당신을 둘러싼 모든 건 당신이 직접 일군 거예요.] [에이, 저는 아이디어랑 돈만 제공했을 뿐인데요. 실무자가 없었으면 한참 헤맸을 거예요.]아버지는 중간에서 지탱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이리저리 휩쓸리기 쉬운 사람이니까.
내 말에 유스틴이 다시금 입술을 꾹 깨물다 말고 천천히 말했다.
[당신에게 더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나는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어허, 이 자식. 내가 너한테 사과받으려고 여기 온 줄 알아?
[그렇지 않아요. 대공자님께서 제게 해 주신 게 얼마나 많은데요.] [……하지만.] [게다가 ‘해 줄’ 것도 많고요.]말을 마친 나는 재빠르게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하늘에서 서류 몇 장이 나풀나풀 내려와 테이블에 안착했다.
[현실에서는 펜을 들기 어려워서요, 대공자님은 암기력도 좋으니 여기 적힌 건 모두 외울 수 있으실 거라 믿어요.] [이게 다 뭡니까?] [뭐긴요. 국외 은행과 후원 재단 관련 사안들이죠.]내가 떠난다고 이 사업까지 모두 접는 건 아니잖아. 장기적으로 봐야지!
[매달 발생하는 국외 은행 수입의 20퍼센트는 후원 재단으로 보내 주시고……, 이쪽 항목 보시면 민간 공공 의료 및 학업 지원 사업에 관해서 적혀 있거든요. 이것도 확인해 주시고. 아, 이건 모두 아버지와 사전 협의한 내용이거든요. 공식 문서는 나중에 따로 작성해서 나눠 가지시고.]평소 같으면 문서에 장난질하지 말라는 말까지 덧붙였을 테지만, 나는 유스틴을 믿으니까.
뿌듯한 미소를 지은 채 유스틴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가 서류를 읽다 말고 나와 시선을 맞췄다.
[당신은……, 제 앞에선 마지막까지 일 이야기만 꺼내는군요.]그 눈빛 속에 담긴 건 분명 서운함이었다.
그런 반응이 돌아올 거라는 사실은 일찌감치 예감하고 있었지.
나는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저희 관계의 시작은 동업자였으니, 이 이야기는 필연적인 거예요. 게다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고요.]아무리 그래도 우린 친구잖아.
[확인 다 끝나셨으면 이제부터는 정말 친구로서 하고 싶은 말 좀 할게요.]내 말에 유스틴이 이전과는 달리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응시했다. 나는 큼큼 목을 가다듬고서 말을 이었다.
[우선, 일 좀 줄이세요.] [당신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그래, 여기서 태클이 들어올 줄 알고 있었지.
[저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 거였고요.] […….] [원래 그 나이 때 아이들은 일 걱정 없이 뛰어놀아야 해요. 그 김에 친구도 좀 많이 사귀고. 마음 맞는 사람이랑 건전한 교제도 좀 하고.]뒤에 두 개는 나랑 애매하게 달성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모두 체험판이었잖아.
[밥도 잘 챙겨 드시고, 일한다고 끼니 거르지 마세요.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과로는 절대 금물이고.] [명심하겠습니다.]거의 잔소리에 가까운 내 당부에도, 유스틴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런 부분에서는 어쩐지 지크프리트 씨보다 더 초연해 보이는군.
‘역시 철혈 대공가라 이건가.’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런 걸지도.
[나중에 제가 떠났다는 사실을 실감하더라도, 너무 많이 슬퍼하진 마세요.]나는 유스틴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대답했다.
[글쎄요. 어쩌면 영영 실감 나지 않을지도 모르죠.] […….]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그 무엇도 제 일상을 해칠 수는 없으니.]유스틴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마저도 그의 배려라는 걸 알고 있기에,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그러면 이제 마지막 부탁만 남은 건가.
[그리고 혹시라도.]이걸 유스틴에게 말해도 될지, 괜한 부탁을 하는 건 아닐지 상당히 조심스럽지만.
[나중에 대공자님께서 그 아이를 만나게 된다면……, 만날 수 있게 된다면.]나는 유스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러니까, 그 아이가 무사히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면.]어떤 방식으로든, 누구의 방해도 없이 당당하게 세상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
[그 아이를 잘 부탁드려요.]루스에 관한 이야기는 당장 부모님께 말씀드릴 수 없었다.
정 많은 부모님은 내 말을 듣는 즉시 루스를 찾으러 다닐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내가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는 건 유스틴뿐.
‘게다가 만에 하나라도 루스가 황위에 오른다면, 유스틴의 도움이 많이 필요할 테니까.’
여러모로 루스를 부탁할 만한 사람이 유스틴밖에 없단 말이지.
[……그게 당신의 유언입니까?]한참의 정적이 지난 후.
유스틴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는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마지막 부탁이라고 하는 편이 어감이 더 좋지 않나요?] [마지막 부탁이라.]그러고서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리고서 나를 응시하다가.
[……노력해 보겠습니다.]끝내 짧게 긍정했다.
늘 그렇듯 완벽하게 표정을 숨기고서.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