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129)
“조건이라면…….”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스틴이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꼭 하기 싫은 일을 마주한 직장인 같은 표정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조건을 경계해야 하는 건 나나 어르신 쪽이 아닌가.
‘어르신은 신경도 안 쓰실 것 같지만.’
저거 봐, 정작 당사자는 또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잖아.
“미에나는 아마 발병 지역을 직접 찾아가 조사하려는 거겠죠.”
그사이 황제가 여전히 산뜻하게 미소 짓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때 저도 함께하게 해 주십시오.”
“안 됩니다.”
동시에 유스틴이 이미 예상했다는 듯 재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황제가 자리를 비우다니, 안 될 일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순시를 나간다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폐하. 저희는 지금―”
“그래, 물밑에 있는 것들을 사냥하고 있지.”
짙푸른 눈동자와 서늘한 은빛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닿았다. 나는 덩달아 침을 꼴깍 삼켰다.
곧이어 황제가 또 한 번 눈꼬리를 해사하게 휘며 말을 이었다.
“이왕 수면 위로 드러낸 걸 조금 부추긴다고 해서 나쁠 건 없겠지. 오히려 깊숙이 숨어 있던 자들까지 끌어올릴 수 있지 않겠어.”
“스스로 미끼가 되지 말라고 불과 몇 분 전에도 간언하지 않았습니까, 폐하.”
“가진 능력을 쓰지 않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고 말한 자는 바로 그대야.”
한 치의 물러섬 없는 공방이 고요한 실내에 가득 울려 퍼졌다.
나는 지크프리트 씨를 한 번, 금세 흥미를 잃고 고개를 뒤로 치켜든 어르신을 한 번 바라보고서 빠르게 두 눈을 깜빡였다.
‘조건을 수용할지 말지 판단하는 건 나와 어르신이어야 하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요.
마음 같아서는 그냥 두 사람이 알아서 원만히 합의 보기를 바라고 싶지만…….
“저기, 두 분 말씀 중에 실례지만.”
나는 결국 하는 수 없이 한숨을 푹 내쉬고서 입을 열었다.
“그게 조건이라면 저도 조금 어려울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조사는 은밀하게 진행하는 게 좋을 듯해서요.”
그쪽에서 되니 안 되니 얘기하기 전에, 일단 당사자의 의견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제의 순시라면 지방 관리까지 맨발로 달려 나와 접대할 텐데, 그렇게 시끄럽게 조사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요…….”
황제의 도움을 받고 싶다는 건 어디까지나 내가 놓칠 수도 있는 지역의 정보까지 얻으려는 이유에서였을 뿐.
‘안 되면 발로 뛰면 되니까.’
몸이야 조금 힘들겠지만, 이왕 어르신한테 들킨 마당에 거리낄 게 또 뭐가 있겠는가.
남몰래 짜 두었던 계획을 전면 수정할 생각으로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린 찰나였다.
“그렇지 않아요, 미에나.”
황제가 조금 전과는 달리 잔뜩 주눅 든 얼굴로 내게 한 발짝 다가오며 말을 내뱉었다.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 생각은 전혀 없어요. 그런 만큼 당연히 제 신분을 속이고 동행할 예정이고요.”
“폐하.”
“요란하게 다니지 않을게요. 조용히, 곁에 있는지도 모를 만큼 얌전하게 당신의 옆을 지키기만 할게요.”
나는 순간 또 한 번 침을 꿀꺽 삼키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슨 늑대처럼 살벌했으면서.
‘왜 갑자기 앙증맞은 강아지가 겹쳐 보이는 거지?’
설마 그 짧은 사이에 내 눈에 콩깍지라도 씐 건가?
“사실 저는…….”
이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황제가 급기야 촘촘한 속눈썹을 가지런히 내리깔고서 말을 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황도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어요. 그런 제가 어떻게 백성의 삶을 알고 그들을 보듬어 줄 수 있겠어요.”
“어, 그…….”
“부디, 제가 제 백성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네, 그래야죠…….”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조했다. 그러자 옆쪽에서 헛웃음이 차갑게 튀어나왔다.
당연하게도 유스틴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아니, 하지만 어떻게 거절하냐고.’
구구절절 옳은 말에다, 심지어 저렇게 비 맞은 강아지처럼 말하는데!
“당신은 아직 황궁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그런다 쳐도, 이건 그렇게 손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곧이어 그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황제가 여전히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되받아쳤다.
“공식적으로 순시를 나가는 게 문제가 되는 거라면, 방금도 이야기했지만 비공식으로 만들어 버리면 되는 일이야.”
“그것도 문제입니다. 황제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적어도 불순한 생각을 품고 있는 자들은 솎아 낼 수 있겠지. 애초에 우리가 생각했던 계획과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일이고. 지금 내가 정무를 보지 않고 이곳에 있는 것도 결국에는 그 일환이 아닌가?”
“…….”
“나를 시해하려던 자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무엇보다 내 백성이 피해를 입고 있는 상황이고. 그런데도 그대는 내가 가만히 앉아서 보고나 받았으면 좋겠다는 건가?”
이윽고 황제가 내내 내 쪽으로 반쯤 굽히고 있던 상체를 바로 세워 유스틴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과는 달리 위압감이 넘치는 태도였다.
그 모습이 어렴풋이 어르신을 떠올리게 해, 나는 무심코 내 뒤에 선 남자를 다시 바라보았다.
……음, 좋아. 지금 상황에 전혀 관심 없어 보이는군.
“황좌란 본디 그런 자리입니다.”
“그게 황좌라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해.”
그사이 또 한 번, 두 사람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지크프리트 씨도 이 상황을 굳이 말릴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결국 이번에도 내가 정리해야겠군.
나는 큼큼 헛기침을 내뱉고서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런 거면, 자리를 오래 비우지 않으면 되는 일 아닐까 싶은데요.”
이럴 땐 절충안을 보여 주는 수밖에는 답이 없지.
“제 순간 이동 마법을 사용하면 먼 거리도 한 번에 이동 가능하니까요. 한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도 없으니, 한 지역의 조사가 끝나면 폐하를 다시 안전히 황궁으로 모셔다 드릴게요.”
“내 앞에서 마법을 쓰겠다는 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안 되면 리처드 8세를 타도 되고요. 걔도 정말 빠르답니다.”
이 정도 인원은 다 태우고도 남으니, 리처드 8세도 괜찮겠지.
“저도 폐하의 공무를 방해할 생각은 없어요. 제가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이 현상을 조사하는 것뿐이니까요.”
이내 나는 유스틴을 빤히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도 이번 일은 폐하께서 직접 파악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보고는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
“게다가 제 생각으로는 폐하께서는 러셀 경이라도 꼭 제 곁에 붙여 놓을 것 같단 말이죠…….”
만난 지 얼마 안 된 마당에 이런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게 꽤 부끄럽지만, 나한테 하는 태도를 보면 왠지 그럴 거란 확신이 들어서.
내 말에 유스틴이 입을 꾹 다물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 발언이 옳다고 여긴 까닭일 터였다.
나는 그를 향해 힘없이 미소 지어 보였다.
“당신이 저를 탐탁지 않아 하는 건 알겠지만, 아마 제 곁에, 그리고 어르신 곁에 머무는 게 폐하께서도 가장 안전하실 거예요. 그러니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길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르신도 딱히 황제를 해칠 생각은 없는 것 같고.
‘무엇보다 밖에 한 번도 안 나가 봤다잖아.’
이 말을 들었는데도 차마 차갑게 내칠 수는 없었단 말이지.
황제를 너무 안으로 감싸고도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게 아니라…….”
내 말에 유스틴이 몇 번 입을 어물거리다 말고 손바닥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고서 그는 곧 평정을 되찾은 듯 더없이 차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 그렇게 확신하니, 저도 더 말리지 않겠습니다. 물론 저도 동행한다는 가정하에.”
“그야 당연하죠. 조건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저는 여기 있는 모두를 데리고 다닐 생각이었는 걸요.”
아무래도 지크프리트 씨도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고.
슬쩍 눈동자를 굴려 지크프리트 씨를 바라보자, 그가 씩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 죄라고 말한 후부터 줄곧 저런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었지.
“그리고 한 가지 더.”
그 얄미운 얼굴에 입술을 삐죽이고 있으려니, 유스틴이 또 한 번 말을 내뱉었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으로’ 조사하는 만큼, 황실의 이름으로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없다는 점도 알아주십시오.”
어, 그건 조금 곤란한데.
그러면 내가 굳이 당신들을 데리고 조사하는 의미가 없지 않나요?
“그러니, 미에나.”
이런 내 표정을 읽어 내린 건지, 유스틴이 전과는 달리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서 입을 열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 * *
그리고 얼마 뒤, 시두스 가문의 저택.
“그러니까, 이 언니가.”
금빛 머리카락을 앙증맞게 두 갈래로 묶은 여자아이가 올망졸망한 눈빛을 띤 채 입을 열었다.
“내 진짜 언니라고?”
나는 아이를 마주 바라보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미안한데, 나도 기억 안 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