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130)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하기 위해선 몇 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정확히는 유스틴이 ‘해야 할 일’을 언급한 시점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이요?”
조사에 끼워 달라고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바로 임무가 내려올 줄은 몰랐는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되물었다. 그러자 유스틴이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방금 이야기했다시피, 황궁에서 공식적으로 조사 명령을 내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하나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아무에게나 이 일을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으렇긴 하죠.”
“게다가 이 병은 한 지역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니, 정보를 모으는 데만 해도 많은 자금이 필요할 겁니다.”
은색의 눈동자가 묘한 눈빛을 띤 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언뜻 장난스러운 듯싶으면서도, 동시에 추억을 더듬는 듯 아련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괜스레 손끝으로 어르신의 나풀나풀한 옷깃을 만지작거리며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플라멘이 그랬지.’
누군가 서론을 길게 말한다는 건 곧 이어지는 본론이 말도 안 되기 때문이라고.
“물론 다행스럽게도, 이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우군이 있기는 합니다. 전 제국에 지부를 설립한 덕에 필요한 정보를 빠르게 모을 수 있고, 심지어 제국 외의 상황까지 파악할 수 있죠.”
곧이어 그가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어 웃었다. 순간 나는 묘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입만 웃고 있던 사람이 황제처럼 눈까지 활짝 접어 웃다니.
“문제가 하나 있다면…….”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스틴이 부러 말꼬리를 슬쩍 늘이고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딱 한 명뿐이라는 사실이죠.”
그 순간, 나는 이 불안감이 어디에서 기인한 건지 직감적으로 눈치챌 수 있었다.
“재단의 설립자.”
“…….”
“그리고 시두스 가문의 장녀.”
그가 한 점의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며 선언하듯 말을 건넸다.
“미에나 시두스.”
* * *
“엄마랑 아빠는 잠깐 외출하셨어. 금방 돌아오실 거래.”
“으응.”
“사람들이 이렇게 주변에 모여 있는 거, 나 처음 봤어. 평소에는 다들 바쁜데.”
내 오른쪽에 바싹 붙어 앉은 여자아이가 발을 앞뒤로 구르며 조잘거렸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내 왼쪽에 앉은 유스틴을 한 번, 그 곁에 선 어르신과 지크프리트 씨를 한 번, 그리고 응접실 문을 가득 에워싼 사람들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중 가장 앞에 선 여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울컥 울음을 터뜨렸다.
“진짜로, 미에나 아가씨가……!”
“티나가 저렇게 우는 것도 처음 봤어. 나한테는 울면 안 된다고 했으면서.”
“가끔은 눈물을 참을 수 없을 때도 있단다, 마일리.”
유스틴의 차분한 발언에, 마일리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서 그녀는 유스틴을 빤히 바라보다가, 곧 내 어깨를 톡톡 치고서 손을 파닥였다.
나는 그녀가 바라는 대로 상체를 슬쩍 숙여 마일리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에버딘 공이 저렇게 기뻐하는 얼굴은 처음 봤어. 지크프리트 아저씨도, 평소에는 절대 저렇게 안 웃는단 말이야.”
곧이어 내 귓가에 재빠르게 속삭인 마일리가 얼굴을 떼고서 해맑게 미소 지었다.
나는 유스틴의 얼굴을 흘깃 바라보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게 기뻐하는 얼굴이라고?
“난 잘 모르겠는데…….”
“마일리는 다 알아. 다들 언니가 와서 정말 기뻐하고 있어.”
마일리가 앞니 빠진 입 안을 환히 드러내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사실 마일리도 정말 기뻐.”
나는 불현듯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숨을 멈춘 채 내 옆에 앉은 여자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사이 마일리는 천진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내뱉었다.
“엄마 아빠가 언니 얘기 많이 해 줬거든. 언니는 정말 예쁘고, 착하고, 똑똑하고, 또, 음…….”
“…….”
“모두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그랬어.”
나는 막혔던 숨을 간신히 풀어내고서 다시 한번 주변을 조심스레 둘러보았다.
이 저택에 들어와 ‘미에나 시두스’라고 밝힌 이래로, 계속 내 주변을 맴돌고 있는 사람들.
내 모습이 많이 바뀌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 정도로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의심 없이 나를 ‘미에나 시두스’로 받아들인 사람들.
그러면서도 ‘기억이 온전치 않다’는 지크프리트 씨의 말 한마디에 내게 다가올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그 바보 같은 모습이…….
“역시 제가 발로 뛰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그들에게서 다시 눈을 떼고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유스틴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이래서야 꼭 물질적인 이유로 돌아온 것 같잖아요. 가뜩이나 저는 아무 기억도 없는데.”
“사실 부분적으로는 그게 맞지. 원래는 안 만나려고 했었잖아?”
동시에 내내 곁에 서 있던 지크프리트 씨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물론 난 이렇게 돼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만.”
“러셀 경.”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가뜩이나 당신은 기억이 없으니 그런 식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요.”
이윽고 유스틴이 담담하게 이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
“기억이 온전치 않아도 좋으니, 자신을 잊어도 좋으니,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미, 미에나라고 했나, 지금!”
응접실 너머에서 노호에 가까운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두 사람의 발소리가 어지러이 엉킨다 싶더니.
“신이시여…….”
곧 두 갈래로 갈라진 사람들 사이로, 옷차림이 잔뜩 헝클어진 중년의 부부가 나타났다.
나는 두 사람을 홀린 듯 바라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저분들이 내 부모님.’
분명 아무런 기억도 없건만, 저 얼굴을 보고도 어떠한 추억도 떠오르지 않건만.
단지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울렁이는 기분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나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아무리 그래도 나를 단번에 알아보기는 좀 그렇지 않을까?’
지크프리트 씨의 말을 들어 보니 머리카락 색도 눈 색도 모두 바뀌었다는데.
물론 두 사람이 내 곁에 있으니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네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두 사람이 황망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그러나 이내 늦으면 놓칠세라 다급한 뜀박질이 되어.
“네가, 네가……!”
이윽고 내 앞에 멈춰 서고서 내 뺨을, 손을 향해 팔을 뻗었다.
혹여나 세게 쥐면 부서질까 힘도 제대로 주지 못한 채, 형편없이 떨리는 손길이었다.
“네가, 네가 정녕…….”
“미아, 미에나, 맞니? 정말로……, 꿈이 아니고, 정말로…….”
차례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믿기지 않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나는 차마 그들의 손에 뺨을 기대지도, 손을 맞잡지도 못한 채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두 분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가, 기억이 없어요.”
“…….”
“저는 미에나가 맞지만, 두 분이 생각하시는 그런 딸은 되지 못할 거예요.”
그래서 일부러 더 당신들을 찾지 않았어요. 플라멘에게 물으면 바로 찾을 수 있었을 텐데도, 그러지 않았어요.
이 상태에서 다시 만나는 건 서로에게 상처만 될 뿐이니까.
“사실 목적이 없었으면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두서없는 낱말들이 여과되지 못한 채 경황없이 튀어나온다.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기대에 부응할 수 없어 미안하다고? 그렇지만 내가 가진 것들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냥 죄책감을 덜어 내려고.’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분명 두 분의 딸이 맞다고 말하면 되는 일인데도, 알량한 죄책감에 매몰되는 바람에.
“……죄송해요.”
손등 위로 와닿은 온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쑥 말을 꺼낸 찰나였다.
“다, 다…… 괜찮다.”
줄곧 내 뺨에 조심스레 얹어져 있기만 하던 손이, 완전히 내려앉아 내 얼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네가 기억을 잃었어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해도, 다른 목적이 있어 우리를 찾아온 거라고 해도.”
나는 조심스레 속눈썹을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는 두 쌍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네가 살아 있기만 하다면, 모두 신경 쓸 것 없는 이야기란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분명한 애정, 사랑이었다.
“어서 오렴, 내 아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