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134)
“리처드 8세 말입니까?”
“걔도 참 오랜만이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스틴과 지크프리트 씨가 차례로 말을 내뱉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퍽 다른 반응이었다.
그러고 보니 유스틴은 이미 리처드 8세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 지크프리트 씨도 오랜만이라고 하는 걸 보니, 이미 만난 적 있는 걸 테고.
내 성격상 아무에게나 전설 속의 동물을 보여 주고 다니지는 않았을 테니…….
‘와이번의 존재를 알 정도로 친밀했다는 건데.’
지난번에 나눈 대화로 루스와의 관계는 대강 파악했다지만, 지크프리트 씨나 유스틴과는 대체 무슨 사이였던 걸까.
유스틴은 시두스 가문과 합동 사업을 이것저것 벌인 걸 보면, 아마 동업자 관계였을지도.
“이 인원을 데리고 멀리 순간 이동을 하는 건 어르신 때문에라도 불가능하니…….”
“네 발아래 마법진이 떠오르는 순간 널 데리고 레어로 돌아가련다.”
“네, 저런 이유로 와이번을 타고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게다가 방금 이곳에 온다고 한 번 마법을 썼지.”
“쩨쩨하게 그런 거 일일이 세지 마세요, 어르신.”
명색이 드래곤인데 배포를 크게 가집시다, 좀.
물론 이 마력의 주인은 어르신이니 까라면 까야겠지만.
“황성에 난데없이 와이번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큰 혼란에 빠질 텐데요.”
역시나 유스틴이 희미하게 굳은 표정으로 딴죽을 걸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루스가 넌지시 말문을 열었다.
“그거라면 괜찮네. 이 후원과 영공 일대에 결계를 둘러 뒀으니, 와이번이 드나드는 모습은 보이지 않을 거야.”
“예?”
“사실 폐하와는 어느 정도 이야기가 끝났거든요.”
나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며 멋쩍게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영공까지 미치는 결계를 둘러 뒀다니, 저번에도 생각한 거지만 능력 참 좋네.
역시 드래곤의 축복을 이어받은 자손이라 이건가?
“그런 건 대체 언제…….”
곧이어 유스틴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입을 연 찰나였다.
“아무튼, 그 녀석은 지금 어디 있는 건데? 오랜만에 얼굴 좀 보자.”
그보다 한발 앞서, 지크프리트 씨가 요란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는 그를 향해 몰래 엄지를 들어 올리고서 씩 미소 지었다.
훌륭한 조력이었습니다, 러셀 경.
“아마 이 위를 배회하고 있을 거예요. 부르면 내려올 텐데, 부를까요?”
“좋지, 나 걔랑 친했거든.”
내 말에 지크프리트 씨가 호쾌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가슴을 툭툭 쳤다. 퍽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우리 리처드 8세가 저 성격을 좋아할 리 없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일단 목걸이에 마력을 불어넣어 리처드 8세를 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쇄액 하는 소리가 허공을 가르더니.
콰앙!
육중한 몸집의 와이번이 후원 바닥에 맹렬히 추락했다. 그 기세가 어찌나 거센지, 주변은 이미 초토화된 지 오래였다.
“……보수 공사 대금은 제 쪽으로 청구해 주세요.”
수배 전단으로 받은 내 돈, 곧이곧대로 황궁에 돌아가게 생겼네.
“제가 그럴 리가 있겠어요, 미에나. 어쨌든 더 강한 자재로 보강하긴 해야겠지만요.”
내 말에 루스가 해사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건넸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여느 때보다도 맑게 반짝이고 있었다.
“와, 어째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커진 것 같은데? 나 기억해?”
그사이 지크프리트 씨가 스스럼없이 리처드 8세에게로 다가가며 살갑게 말을 걸었다.
동시에 리처드 8세가 몇 번 귀를 팔락거리다 말고 이를 드러내더니, 곧 거칠게 포효했다.
“어, 아무리 봐도 친한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내가 봐도 아닌 것 같다.”
이내 지크프리트 씨가 쏜살같이 내 등 뒤에 숨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옛날에는 나를 등 뒤에 숨겨 놓고 어떻게든 앞장섰…….
잠깐만, 옛날?
“크르르륵!”
그사이 리처드 8세가 다시 한번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생각을 멈추고서 도통 진정하지 못하는 와이번에게 다가갔다.
일단 리처드 8세를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다.
“으응, 착하지. 우리 리처드가 갑자기 무슨 일일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까지 인간을 싫어하지는 않는데. 천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구네.
“그 아이도 결국 내 권속이니, 당연하지 않겠니.”
계속해서 리처드 8세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는 사이, 어르신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게다가 그 찌꺼기의 후손이 직접 만든 결계에 스스로 갇힌 꼴이니.”
“오.”
요컨대 루스 때문이라는 거군.
나는 여전히 방긋방긋 웃고 있는 루스를 일별하고서 작게 입을 오므렸다.
그나저나 앞으로 계속 루스와 마주쳐야 할 텐데, 처음부터 이러면…….
“아하.”
바로 그때, 루스가 이쪽으로 한 발짝 다가오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나는 너를 해치지 않아.”
“크륵…….”
“미에나가 바라지 않으니까.”
잠깐만요, 마지막 말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아, 물론 전 동물을 정말 좋아해요, 미에나. 특히 토끼나 고양이……, 눈꼬리가 내려간 강아지나…….”
그러고서 그는 갑작스레 고개를 휙 돌려 내게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발걸음은 착실하게 리처드 8세를 향해 가고 있었다.
마치 저 커다란 와이번이 제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는 듯.
“어쨌든, 도와주지 않으련.”
이윽고 리처드 8세의 앞에 도달한 루스가 자애롭게 미소 지었다.
리처드 8세는 제게 다가온 저보다 한참 작은 남자를 마주하며 위협적으로 으르렁대다가.
“……끼잉.”
결국 앞발을 모으고서 절을 하듯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자 내내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크프리트 씨가 작게 중얼거렸다.
“굴복했네, 굴복했어.”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음, 내가 봐도 이건 굴복이긴 해.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내 앞에서 내 권속과 힘겨루기하다니.”
그래, 바로 이거지.
나는 내 옆에 서서 형형하게 눈을 빛내는 어르신을 연신 흘끔거렸다.
루스는 별생각 없이 한 행동 같은데, 도전의 의미로 받아들이면 어떡하지? 저번에 결계 안으로 전령 새를 보낸 것도 그렇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어르신한테 찍히는 거 아니야?
“그 찌꺼기의 머릿속이 더더욱 궁금해지는구나.”
이내 그가 한쪽 입매를 비틀어 웃으며 혼잣말했다.
다행스럽게도 어르신의 관심사는 내 예상과는 사뭇 다른 쪽인 듯싶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서 유스틴과 지크프리트 씨를 향해 손짓했다.
한 손으로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어르신의 옷자락을 슬며시 붙잡은 채였다.
“어쨌든, 나름 정리된 것 같으니 빨리 출발해 봅시다.”
오늘도 늦게 돌아오면 플라멘이 저녁 안 해 준댔어.
* * *
황도 람파스를 기준으로 동남쪽에 자리한 오베론은 와인 생산지로 유명한 넓은 평야 지대였다.
포도밭이 어찌나 넓은지, 리처드 8세를 타고 날아오면서도 몇 번이나 탄성을 내뱉었더란다.
“아직 수확 시기가 되려면 멀었을 텐데, 포도가 꽤 알맞게 익었네요.”
“모두 마법 덕분이죠. 리넥스에서 마정석을 주기적으로 수입하게 된 이후로, 농업도 많이 발달했어요.”
“그것도 당신의 공입니다.”
내 말에 루스와 유스틴이 차례로 입을 열었다.
수입이라면 무역 쪽일 텐데, 그것도 내 공이라니.
한참 작은데다 몸도 안 좋았을 애가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온갖 데에 손을 뻗었단 말인가.
“저는 정말로 별걸 다 하고 다녔네요…….”
“지금도 별걸 다 하는 중이고요.”
뒤이어 유스틴이 불퉁하게 되받아쳤다. 나는 눈을 세모꼴로 뜨고서 그를 흘겨보았다.
그러고 보면 이 사람은 저번부터 자꾸 내 말에 부정적으로 대답한단 말이야. 걸핏하면 인상 쓰고, 루스나 나를 막아서기만 하고.
“공작님.”
마을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유스틴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저희 10년 전에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나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사사건건 시비를 걸 수 있나?
“얼씨구.”
유스틴이 내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지크프리트 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황도 귀족들이 네 말을 들으면 다들 웃음을 터뜨릴 거다.”
“네? 왜요?”
“왜긴 왜야, 저 도련님처럼 너한테 지극―”
“조용히 하십시오, 러셀 경.”
하지만 지크프리트 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스틴이 짓씹듯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서 그는 특유의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저는 먼저 말할 생각 없습니다.”
이내 짧게 말하고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 말고 허, 작게 숨을 내뱉었다.
먼저 말할 생각이 없다니, 그럼 내가 기억할 때까지 버티겠다는 건가?
‘내가 언제 기억할 줄 알고?’
그건 내 의지가 아니란 말이에요.
나는 결국 그에게 더 말을 걸지 않고 성실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몇 분이 더 지나고.
“아, 사람이다.”
곧이어 우리는 마을 어귀에서 수레를 끌고 들어가는 사람 한 명을 발견했다.
제법 익숙한 얼굴인 걸 보면, 며칠 전 내가 꽃을 뽑은 사람 중 한 명인 듯싶었다.
꿈에서 깨자마자 다시 일을 시작하다니, 조금은 쉬어도 괜찮을 텐데.
“저, 실례합니다.”
일단 상태도 살필 겸 그에게 말을 건 순간이었다.
“무슨……, 헉!”
나와 시선을 마주친 남자가 수레의 손잡이를 놓고서 그대로 입을 틀어막았다.
“성녀님……, 성녀님이 강림하셨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