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138)
“도서관에?”
남자의 말에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다름 아닌 유스틴이었다.
“이번에는 조금 의외군.”
루스 역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손가락으로 턱을 감쌌다.
나는 그에 따라 사르르 흘러내리는 백색의 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이 분위기, 뭔가 내가 빠져야 할 타이밍인 것 같은데.
가뜩이나 외부인이 황제와 함께 있는 걸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그러고 보니 옆에 계신 분은 설마.”
이런 내 생각을 방증하듯, 남자가 나와 어르신을 흘긋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때 폐하께서 제게 명하신 수배 전단의…….”
그 요상한 외관 묘사를 그대로 적어야만 했을 불쌍한 부관이 누구인가 했더니, 당신이었군요.
나는 머리카락 끝으로 얼굴을 가리며 멋쩍게 웃음을 흘렸다.
“아하하, 하하.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갈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리고 다음부턴 주위에 누가 있는지 살펴보고 말을 꺼내시길 바라요.
안 그러면 이 험악한 황궁에서 살아남기 힘들 겁니다.
“그러면 폐하, 저는 이만…….”
곧이어 어르신의 손목을 그러쥐고서 빠르게 자리를 뜨려던 순간이었다.
“잠시만요, 미에나.”
그보다 한발 앞서, 루스가 내 다른 손목을 조심스레 붙잡고서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동시에 그의 앞에 있던 남자가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입을 떡 벌렸다. 당연히 나도 입을 떡 벌렸다.
“황궁 내에 아직 침입자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해요.”
“그, 저는 어르신도 있고, 정말로 괜찮아요.”
“어쩌면 아직 도서관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잠깐만, 이거 혹시 내가 아니라 네가 위험하다는 뜻이었냐.
나는 멍하니 루스를 바라보았다.
옆에 선 남자는 기절할 지경으로 나와 루스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미에나가 함께 있으면 그래도 조금 괜찮을 것 같은데…….”
곧이어 그가 비 맞은 강아지처럼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속삭였다.
덩치는 나보다 훨씬 커서, 어떻게 이런 되도 않는 수작을 부릴 수 있는 거지?
왜 나는 이 모습에 마음이 넘어가는 거지?
“그, 그럼 그쪽까지만 함께 사, 살펴보죠…….”
어차피 수습은 그른 것 같은데, 알아서 입막음이나 잘해 주십시오.
결국 한숨을 내쉬고서 말하자, 어르신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너는 특히 저 인간에 한해서는 한없이 물러지는구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네 볼일 끝나면 부르거라. 나는 이 냄새 나는 곳에 더 있고 싶지 않구나.”
말을 마친 어르신은 루스를 한 번 흘끗거리더니, 시야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거의 졸도하기 직전인 불쌍한 남자를 못 본 체하며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자 루스가 화사하게 웃다 말고 고개를 슬쩍 돌려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보고가 끝났으면 이만 가 보도록. 도서관은 내가 직접 살펴보겠다.”
“네? 네.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본 건 함부로 발설하지 말도록.”
유스틴 또한 살벌한 기색으로 남자에게 경고를 건넸다.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루스에 관한 기억은 거의 없으니 그러려니 해도, 유스틴까지 저렇게 쌀쌀맞게 굴다니.
역시 황궁은 무서운 곳이구나.
“에버딘 공도 못다 한 업무가 많을 텐데, 이만 들어가도록 해.”
곧이어 루스가 여전히 웃는 낯을 띤 채 유스틴에게 말을 건넸다.
유스틴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서 자리를 벗어났다.
저렇게 불만 가득한 표정을 하고도 별말 없이 자리를 뜨다니.
“황제의 지위가 정말 대단하긴 하네요…….”
“정작 제게는 별 필요 없는 자리지만요.”
작게 중얼거리자, 루스가 소년처럼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지크프리트 씨가 고개를 설설 내저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저도 쫓겨날 게 분명하니, 제 발로 떠나겠습니다.”
“러셀 경이 없으면 침입자는 누가 잡아요?”
“너는 모르는 것 같아서 얘기하자면, 여기서 가장 센 사람은 내가 아냐. 너 완전히 속아 넘어간 거라고.”
“네?”
“어휴, 진짜. 좋을 때다.”
말을 마친 지크프리트 씨는 양손을 들어 올리고서 빠르게 자리를 떴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가, 삐걱삐걱 고개를 돌려 다시 루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천사 같은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갈까요, 미에나?”
뒤이어 그가 내게 손을 내밀며 달큼하게 말했다. 나는 결국 설설 고개를 내저으며 손을 포갰다.
* * *
도서관 내부는 ‘황실’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굉장히 넓고 높았다.
끝없이 펼쳐진 책장과 높다란 사다리까지.
이런 곳에서 마음먹고 숨으면 찾는 것도 일이겠어.
“침입자 때문인가, 이렇게 넓은데도 사람이 별로 없네요.”
“황족과 허가받은 자를 제외하고는 출입이 제한되어 있는 곳이니까요.”
곧이어 루스가 빠르게 책장 사이를 지나치면서도 퍽 다정하게 답했다. 나는 그의 뒤를 느긋하게 따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원래 사람이 없었던 거군. 침입자가 숨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야.
“침입자가 걱정인 거라면, 긴장은 그만 풀어도 돼요.”
바로 그때, 루스가 어느 한 곳에서 멈춰 서고서 슬쩍 미소 지었다. 나는 그를 따라 발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하지만 아직 침입자의 행방을 모르는 거 아닌가요?”
“아마 그자는 지금쯤 황궁을 떠났을 거예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까요.”
“목적이요?”
“이 책장에 있는 책 말이에요.”
이어 그가 책 사이의 빈 곳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원래 이곳에는 ‘고대 신과 제사 의식’이라는 책이 있어야 해요.”
“그걸 어떻게 아세요?”
“이 도서관 안에 있는 책 목록은 다 외우고 있으니까요. 관리도 수시로 하고요.”
“여기 있는 걸, 다요…….”
나는 도서관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느꼈던 위압감을 떠올리고서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저 진실한 표정을 보면 장난은 아닌 것 같은데, 정말 그걸 다 외웠다고?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이 책만 훔친 건지, 이곳에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는지는 조금 생각해 봐야겠지만요.”
이윽고 그가 무언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 듯 슬며시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나고서 그를 걱정스레 올려다보았다.
“폐하께서는 계속 이런 식으로 위협을 받고 계셨던 건가요?”
그러자 루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며 답했다.
“이 정도는 별거 아니에요. 모두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고요.”
“폐하.”
“게다가 어느 정도는 이미 예상한 일인 걸요. 적어도 그들에게, 이 황좌는 제게 허락되지 않은 자리였으니.”
“…….”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요. 저는 미에나와 한 약속을 지켜야 했으니까요.”
지난 일상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한없이 담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그 음성을 듣고 있노라니, 불현듯 유스틴과 나누었던 대화가 조각처럼 머릿속에 불쑥 떠올랐다.
‘–는 평생을 창문도 없는 방에 갇혀 지내고 있었어요.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한 건지도 모른 채로요.’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으나, 이 대화 속의 주인공이 루스일 거라는 강한 확신이 피어올랐다.
만약 정말로 이 가엾은 아이가 루스라면, 눈앞의 이 남자라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내가 없는 동안, 내가 사라진 순간 동안 홀로 얼마나…….
“폐하께 저는 스승이자 첫 친구라고 했었죠.”
붉게 타오르는 노을이 도서관 창문 새로 비쳐 든다.
나는 그 붉은빛 아래 선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름을 주고, 빛을 알려 주고, 살아가는 법을 알려 줬다고요.”
노을에 담은 백색의 머리카락은 한없이 부드러워 보였다. 내게 향한 푸른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계속, 기다렸다고…….”
여전히 그와 관련한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스가 느꼈을 감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만약 내가 갇혀 있던 루스를 발견해 그에게 세상을 알려 줬던 거라면, 내가 그의 유일한 소통 창구였다면.
‘내가 없는 동안 혼자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렇게 아등바등 마주한 세상 밖에서, 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마나 슬펐을까.
기껏 만난 제 친구가 모든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모든 추억을 홀로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마나 서운했을까?
“기억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당신을 기억하지 못해서, 그래서 일찍 찾아오지 못해서.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 미에나가 제게 미안해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어요.”
바로 그때, 루스가 내 손등을 제 입가로 가져다 대며 온화하게 말문을 열었다.
심지어는 한쪽 무릎을 꿇어, 이번에는 그쪽에서 나를 온전히 올려다본 채였다.
나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손이 그에게 붙잡힌 탓에 완전히 물러설 수 없었지만.
“폐하?”
“그래도 미에나가 기억하고 싶어진다면, 저와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진다면.”
곧이어 그가 내 손가락 끝에 경건하게 입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제가 하나하나 알려 드릴게요.”
“…….”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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