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141)
“곡창지대네요.”
그러고 보면 며칠 전 갔던 오베론 지역도 일대가 모두 포도밭일 정도로 유명한 와인 생산지였지.
“맞습니다.”
내 말에 유스틴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었다.
“발병 시기는 저마다 상이했습니다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더군요.”
“한 차례 수확이 끝난 뒤였나요?”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당신에겐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어 좋군요.”
특유의 차분한 은빛 눈동자가 잠시 내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 역시 그의 눈 밑에 스민 짙은 그늘을 바라보다 말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이제부터는 단서를 조합할 차례네요. 다행스럽게도 이렇게 공통점이 나와 줬으니…….”
특별한 공통점 없이 전부 제각각이었으면 상당히 골치 아팠을 텐데.
“첫 발병지가 전부 곡창지대에, 발병 시기 역시 수확이 끝난 직후였다면…….”
“수확한 작물의 문제일 수도 있겠군.”
곧이어 루스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동시에 나는 손가락을 움찔 떨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번에 있었던 일이 너무 고자극이었어.
‘단순히 목소리만 듣는데도 계속 의식하게 되잖아.’
자꾸만 그가 내 손가락에 입을 맞추던 장면이, 그때 지었던 웃음이 떠올라서…….
“내 말하지 않았더냐.”
바로 그 순간, 차가운 손가락이 내 이마를 톡 밀어냈다. 나는 곧장 정신을 차리고서 어르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어르신이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며 내게 말을 건넸다.
“네 할 일을 잊지 말라고.”
“아, 넵.”
하여간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귀신같이 알아맞히신다니까.
나는 머쓱하게 웃음을 흘리고는 다시 본래의 화제로 되돌아갔다.
“작물의 문제라면, 왜 그 작물에 문제가 생긴 건지 확인해 봐야겠네요. 물론 그전에 정말로 재배된 작물이 문제인 건지 먼저 살펴봐야겠지만요.”
“그거라면 이미 어느 정도 답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유스틴이 이번에는 또 다른 지도를 꺼내며 말했다.
아까부터 지도가 끝없이 나오네. 하나로 모여 있으면 한눈에 보기 어려운 건 맞지만.
“수확된 작물의 유통지를 추적한 지도입니다.”
곧이어 그가 피곤한 듯 미간을 꾹 누르며 설명했다. 나는 지도 위에 색색의 선으로 그려진 유통로를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래서 잠을 못 잔 거군.’
정보와 자료를 수집하는 건 아랫사람에게 시킬 수 있어도, 분류하고 취합하는 건 죽어도 저 스스로 하는 성격이니.
이 방대한 정보를 혼자 정리하느라 며칠 동안 무리했을 게 분명했다.
“차라리 절 부르지 그러셨어요.”
“됐습니다. 이 정도는 일한 축에도 안 드니까요.”
“그렇다기에는 공작님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요.”
“이건 그런 이유가 아니라…….”
또 한 번, 은을 녹인 듯한 눈동자가 나를 담아냈다가 황급히 옆으로 비켜 나갔다.
“됐습니다. 자꾸 딴 길로 새지 말고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죠.”
“앗, 넵.”
당연하게 드는 걱정도 이렇게 바로 쳐 내다니, 과연 유스틴이야.
나는 그가 바란 대로 유스틴에게서 시선을 떼고서 다시 지도를 바라보았다.
‘끝없는 밤의 병이 퍼진 지역과 유통지가 상당히 일치하는군.’
확실히 유스틴이 직접 ‘답이 어느 정도 나왔다’라고 자신할 만한 수확이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작물이 문제였다는 소리인가?
“고려할 사항이 눈에 띄게 줄어든 건 좋지만…….”
“정말로 작물의 문제라면 더 골치 아파지겠군.”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지크프리트 씨가 눈에 띄게 굳은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말 그대로 곡창지대잖아. 작물에 문제가 있다고 소비를 제한하는 건 결국 굶어 죽으라는 소리밖에 더 되겠어.”
“이 병을 정말 누군가 고의로 퍼트린 게 맞다면, 상당히 악질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먹을 거에 장난치는 사람만큼 잔인하고 악랄한 사람이 없지.
“러셀 경의 말이 맞습니다. 저희로서는 상당히 골치 아픈 문제죠. 이 모든 가정이 진짜라면, 앞으로도 환자는 계속 늘어날 겁니다.”
“그런 만큼 내 깜찍한 계약자는 가만히 있지를 않을 테고.”
유스틴의 말에 어르신이 입꼬리를 살짝 빼 당기며 말했다. 나는 그의 얼굴에 피어오른 미소를 바라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와, 저 살기 어린 미소는 제법 오랜만에 보는데.
잘못 건드렸다간 큰일 나겠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원인을 찾아 제거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이 사태는 계속 반복될 테니까요.”
나는 황급히 말을 내뱉었다.
“어쨌든 작물의 문제라면, 우선 그 곡창지대에서 재배한 작물을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혹시 그곳에서 얻어 온 시료는 없나요?”
“물론 있습니다.”
내 말에 유스틴이 기다렸다는 듯 품에서 주머니들을 꺼내 놓았다.
그냥 처음부터 꺼내 놓아도 되는 걸 저렇게 차근차근 공개하다니.
나를 시험하려는 건가?
“저는 마법에는 소질이 없어서, 두 분께서 살펴봐 주셨으면 합니다만.”
“제가 먼저 살펴봤을 때는 특별히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거든요. 아쉽게도 감지는 제 특기가 아니라…….”
루스가 미안하다는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확실히 반사적으로 ‘무죄’를 외치고 싶게 만드는 미모였다.
물론 이번에는 정말로 루스 잘못이 아니었지만.
“죄송하지만 저도 아직 마력을 다루는 데는 영 익숙지 않아서요. 어르신께서는…….”
“흐음.”
슬쩍 고개를 돌리자, 어르신이 못마땅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손을 들었다.
동시에 그의 주위 공기가 한 단계 낮게 얼어붙더니, 곧 희미한 빛줄기가 주머니 속 곡물을 감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글쎄. 특별히 이상한 점은 못 찾겠구나.”
어르신이 손을 거두고서 덤덤하게 말을 건넸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해서 바로 알 수 있는 정도였다면, 이미 오베론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챘겠지.
“그래도 작물에 문제가 있는 건 맞을 거예요.”
“…….”
“이 곡창지대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한 비료가 있는지, 혹은 곤충이나 동물이 옮긴 어떤 병균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재배 과정에서 어떤 행동을 한 건 아닌지 알아봐야겠어요.”
“그리고 내 계약자는 그 많은 지역을 직접 돌아보겠다고 하겠지.”
“어르신, 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알겠지만, 인간은 나 빼고 다 하찮은 미물로 보인다는 것도 알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좀 조용히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 찰나였다.
“확실히 추가 조사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유스틴이 한숨을 푹 내쉬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와이번을 타고 움직일 생각은 없습니다.”
“네?”
나는 다시 고개를 반대로 휙 돌리며 유스틴을 바라보았다.
우리 리처드 8세를 안 타겠다니?
“저는 어르신 때문에라도 장거리 순간 이동 마법이 불가능한데요. 폐하께서도 정무를 돌보면서 몸에 부담이 큰 마법을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해하지 못해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유스틴의 눈빛에 자그마한 웃음기가 서렸다.
“제가 고작 이런 정보를 모으기 위해 후원 재단에 당신의 이름을 드러냈다고 생각합니까?”
이내 그가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꺾으며 장난스럽게 질문했다.
나는 더더욱 그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고 유스틴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확실히 그렇긴 해.’
단순히 정보를 모으는 거라면 유스틴 개인의 정보망을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시간은 좀 더 걸렸겠지만.
“실은 지난번 후원 재단 측에 연락해, 조력자를 구해 왔습니다. 워낙 소리 없이 각 지역을 돌아다닌 탓에, 찾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요.”
곧이어 그가 오만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인재에 미친 유스틴이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걸 보면 정말로 능력 있는 사람들인 게 분명한데.
“저랑 연관이 있는 분들인가요?”
“적어도 당신이 아니라면 누구도 불러들일 수 없는 이들입니다.”
“오…….”
과거의 미에나가 불러 모은 미친 인맥의 연장선이로군.
“게다가 이 상황에서 굳이 말씀하시는 걸 보면, 이미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걸 테고요.”
그건 다시 말해서 루스와 지크프리트 씨도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저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물론 그들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요.”
슬쩍 주변을 돌아보려니, 루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이번에도 내 표정이 다 읽힌 모양이군. 나는 입술을 한 번 삐죽이고서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쨌든 저야 조력자가 더 모이면 좋죠. 그래서, 어디 계시는데요?”
유스틴이라면 지금 내 기억이 온전치 않다는 사실도 말해 줬겠지.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으로 물은 찰나였다.
휘잉!
별안간 거센 소용돌이가 휘몰아친다 싶더니, 찬란한 빛과 함께 두 사람의 인영이 내 바로 앞에 드러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장거리 순간 이동 마법?
“때마침 왔군요.”
곧이어 유스틴이 여전히 웃는 낯을 띤 채 말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작고 차분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