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146)
“이렇게요?”
내 말에 루스가 강아지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무심코 뻗어지려는 팔에 힘을 주고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음. 폐하께서는 제가 기억을 되찾기를 원한다면 모두 알려 주신다고 했고, 저는 하나씩 차근차근 들춰 보자고 했잖아요.”
“네, 그랬죠.”
“그렇게 추억을 하나씩 되살피고 모든 기억이 돌아왔을 때, 그때 대답을 들려드리는 건…….”
너무 늦나?
나는 우물쭈물 말을 늘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이런 식으로 기약 없는 약속을 하는 건…….’
방금은 반사적으로 나를 좋아하냐고 물어보기는 했지만, 막상 정말 ‘좋아한다’라는 대답을 들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무엇보다 아직은 내 마음을 섣불리 속단할 상황도 아닌 것 같고.
“좋아요.”
하지만 이런 내 걱정이 무색하게, 루스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늘 그렇듯 입가에는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저도 미에나가 제 감정에 휩쓸려 잘못된 선택을 하기를 바라지 않아요.”
곧이어 그가 바다처럼 깊고 푸른 눈동자를 내게 고정하며 말했다.
“그러니 저는 좋아요. 저 정말 기다리는 거 잘해요.”
“자그마치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저를 기다린 것처럼요.”
“알아주시니 기뻐요.”
내 말에 루스가 또 한 번 환하게 미소 지었다. 어느새 속속들이 박힌 별빛과 퍽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다가도 그는 곧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죄책감에 젖은 얼굴로 넌지시 말을 건넸다.
“가끔은 조금 질투할지도 몰라요. 방금 말했다시피, 이건 저조차도 아직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라―”
“…….”
“차, 차라리 그런 건 제가 못 보는 곳에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런 모습을 보여 주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보지 않는 곳에서 해 달라니.
‘당돌하게 굴거나 소심하게 굴거나 둘 중 하나만 하라고.’
자꾸 귀엽게 굴지 말란 말이야!
“공작님 같은 경우에는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 사람은 그냥 인재를 사랑하는 것뿐이니까.”
“미에나는 의외의 부분에서 눈치가 없네요…….”
“그런 게 아니에요. 이미 몇 년 전에 물어본 적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바로 개소리하지 말라는 듯한 반응을 얻었지.
내 말에 루스가 가느스름하게 눈매를 늘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덧붙여 말했다.
“아까는 공작님께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희는 어디까지나 이익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 동업자 관계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설령 당신이 에버딘 공의 진짜 약혼자라도 저는 상관없어요, 미에나.”
“아니, 그건 좀 신경 쓰셔야죠.”
그 부분은 신경을 많이 쓰셔야 할 텐데요.
“아,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제야 내 말뜻을 알아차린 듯, 루스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황급히 부정했다.
“제 말은, 제 감정 자체는 그런 거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였어요.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겠다는 건 아니에요. 제 감정을 강요할 생각 없다고 했잖아요.”
“…….”
“저를 그런 파렴치한으로 보지 말아 주세요…….”
곧이어 그가 고개를 푹 숙이고서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툭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어찌 감히 솜니움의 황제를 파렴치한으로 볼 수 있겠어요.”
“미에나…….”
“장난이에요, 장난. 그런 식으로 오해한 적 없으니 고개 드세요. 한 나라의 수장이 그렇게 고개를 쉽게 숙이면 어떡해요.”
외교 무대에서 그러면 큰일 납니다, 폐하.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하자, 루스가 푹 숙였던 얼굴을 조금 들어 올렸다.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 새로 드러난 짙푸른 눈동자 속에는 부끄러움 대신 묘한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음, 이것도 정정이 필요할 것 같아요…….”
곧이어 루스가 이번에는 제대로 내 손을 향해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원래 고개를 잘 숙이지 않아요. 그럴 수 없는 자리기도 하고, 약해 보이고 싶지도 않아서요.”
그러고서 그는 곧 내 손을 끌어당겨 제 뺨에 갖다 대더니, 그대로 다시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미에나라서 그런 거예요.”
“…….”
“당신만이 저를 완전히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서.”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부터 심장까지 은은하게 번져 나간다.
나는 이번에도 반사적으로 숨을 멈추고서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저를 데미안이 아닌 루스로 존재하게 해 주는 사람이라서.”
루스는 맞닿은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미에나가 누구를 사랑하고 어떤 삶을 택해도,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
“제게 미에나는 그런 사람이에요.”
* * *
“아무래도 사람을 홀리는 데 확실히 재주가 있다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말을, 내 눈을 보면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할 수가 없어!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리처드야?”
새까만 등을 쓰다듬으며 작게 중얼거리자, 리처드 8세가 불쑥 고개를 돌리며 그르륵 소리를 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손을 휘휘 내저었다.
“앞에를 봐야지, 리처드.”
아무리 하늘 위에 우리밖에 없다고 해도, 운전 중 전방 주시는 필수 사항이라고.
어디서 떠오른 건지도 모를 상식을 곱씹은 후, 나는 다시 아득하게 펼쳐진 어둠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분명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깊은 마음인데.’
평소 같았으면 지레 겁부터 먹고 도망갔을 텐데, 이상하게 루스 앞에서는 그게 잘 안 된단 말이야.
“의무감이라기엔 기억이 없고, 한눈에 반했다기에는…….”
내가 지나치게 얼굴을 보는 것 같잖아. 게다가 솔직히 내가 잘생긴 얼굴을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닌데.
“대체 내 마음은 뭘까?”
“그걸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면 인간들이 그리 어리석겠느냐?”
바로 그 순간, 귓속으로 느른한 미성이 파고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발을 굴렀다.
그러자 어르신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장난기 어린 말을 건넸다.
“네게 권속을 해하는 습관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아이고, 리처드, 미안해!”
물론 너한테는 기별도 안 가겠지만! 그래도 미안하다!
“내 정신 빼고 다니지 말라고 그리 말해도.”
리처드 8세에게 연신 사과를 건네는 사이, 어르신이 앞으로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귀 뒤에 꽂아 주며 말했다.
나는 그제야 다시 어르신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투덜거렸다.
“어르신이 갑자기 나타나셔서 그런 거잖아요. 솔직히 안 놀랄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요?”
“내 심장을 가졌으면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 않아야지.”
“네네, 앞으로 더 정진하겠습니다.”
내가 말싸움에서 어르신을 이겨 봤자 뭐 하랴.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제를 돌렸다.
“더 살펴보겠다 하시던 건 다 확인하셨어요?”
“옛적에 끝냈지. 더 볼 것도 없더구나. 어차피 나는 ‘형벌’을 받은 형편이니.”
“아하……, 그럼 왜 바로 오지 않으시고?”
“바로 오지 않았다고 누가 그러니? 내가 없는 동안 네 얼마나 바보같이 지낼지 확인해 보려 했을 뿐이다.”
“네? 잠깐만요. 그럼…….”
“너는 그런 쪽으로는 영 재주가 없더구나. 그나마 찌꺼기의 후손이 계속 당기는 성격이라 망정이지.”
뒤이어 어르신이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나는 순간 목이 턱 막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그걸 다 보고 있었다고?
“그, 그걸 왜 몰래 봐요!”
“몰래 보다니, 내 마력을 제때 눈치채지 못한 네 잘못이지. 그러게 평소에 수련을 열심히 하래도.”
“요즘엔 수련할 시간도 별로 없었잖아요. 아니, 그보다는, 언제부터 거기 계셨던 거예요?”
루스와 있었던 일은 차치하고서라도, 설마 클레어와 나눴던 대화까지 들은 건 아니겠지?
‘내 마력이 위그드라실의 마력과 비슷하다고 했던 말까지 들었다면.’
어르신은 위그드라실의 마력을 감지할 수 없다. 그러니 당연히 내게 깃든 마력 일부도 알아채지 못한 것일 터였다.
그런데 만약 어르신이 클레어가 내게 건넨 말을 들은 거라면.
“표정 한번 살벌하구나.”
바로 그 순간, 어르신이 내 이마를 톡 치며 상념을 일깨웠다.
“네 그 녀석에게 직접 너를 좋아하냐 물었던 순간부터 들었다. 그게 그리 부끄럽더냐?”
“아.”
나는 순간 긴장이 탁 풀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물론 저걸 본 것도 말도 안 되게 부끄럽긴 하지만, 어쨌든 다행이야.
“왜, 그거 말고도 내게 숨기는 게 또 있는 것이냐?”
내 반응이 제법 이상하다고 느낀 건지, 이내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빠르게 휘젓고서 헤헤 웃음을 터뜨렸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아닌 게 아닌 것 같다만.”
하여간 눈치 빠른 드래곤 같으니라고. 한 번을 그냥 넘어가 준 적이 없어요.
‘……확 그냥 한번 물어봐?’
너무 노골적으로는 말고, 자연스럽게 떠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을 마친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서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요. 어르신.”
“그래.”
“위그드라실을 찾는 이유가 정확히 뭔가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