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153)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제 신전의 사람이 연루되는 이상 언제 태도를 바꿀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꼭 감싸려는 마음이 아니라도, 제 치부를 드러내는 건 언제 어디서든 부담되는 일이기도 하고.
“첩자라…….”
내 말에 성황이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곧 천천히 입을 뗐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사실 저는 타인의 과거를 엿볼 수 있습니다.”
“어……, 몰랐는데요.”
아무리 지금은 클레어가 같이 없다고 해도, 이렇게 밝혀도 되는 건가요?
‘가뜩이나 어르신도 같이 있는데.’
물론 어르신은 나 말고 친구 없으니 괜찮겠지만.
“아차, 과거의 기억을 잃었다고 했죠. 이제 다시 알았으니 된 일 아닐까요?”
이어 그가 능청스럽게 말하고서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나는 더더욱 어이가 없어 허, 하고 작게 숨을 들이켰다.
저렇게 제멋대로 자기 비밀을 밝혀도 되는 일인가? 내가 누구한테 말하면 어쩌려고?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요. 아무래도 아직 레이디는 저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듯해서, 우선은 신뢰를 보여 주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거니까.”
“그렇군요…….”
“게다가 저도 어제 당신의 비밀을 알게 되었잖아요. 거래는 공평해야죠.”
그가 초여름의 수국 같은 눈동자를 아름답게 접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 비밀을 다시 꺼낸 건, 작금의 대신전 상황을 알려 주기 위함이에요. 정확히는 제 주변의 인사들이라 해야 할까요.”
“성하 주변이요?”
“저는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오르고 난 후에도 계속 제 능력을 사용해 제 곁에 둘 사람을 골라냈어요.”
썩은 부분을 제거하기 위해 꽤 지난한 시간을 보냈어야 했더라며, 그가 가볍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제 능력으로 살펴보는 것 이외에도 사람의 성품이나 기질도 꼼꼼하게 살폈죠. 물론 신앙심이나 충성심도 빠트리지 않고요.”
“…….”
“꽤 공을 들인 만큼, 개인적으로는 대신전 내에 배후가 숨어들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고서 그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듯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턱을 톡톡 두드렸다가.
“제 능력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한 자락을 잡아내는 것. 현재의 생각이나 미래까지는 알 수 없죠.”
여전히 웃는 낯으로 조곤조곤 말을 건넸다.
“바람은 바람일 뿐이고, 저는 전지하지 않아 사람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 수 없으니.”
“…….”
“신전 내에 배후가 있든 없든, 당신을 향한 지원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에요. 그게 바로 이 자리에 앉은 자가 해야 할 일이니까.”
말을 마친 성황이 걱정 말라는 듯 부드럽게 입꼬리를 빼 당겼다.
이를 따라 반달처럼 접힌 유순한 눈동자 이면에는 묘한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물론 아니길 바라지만, 만에 하나라도 정말 이곳의 사람이 끝없는 밤의 병에 관여했다면 조금 충격을 받을 것 같긴 하네요.”
“아무래도 믿었던 사람이 그런 짓을 꾸미면…….”
“그보다는 제 무능한 안목이 탄로 나는 셈 아니겠어요?”
“아하.”
그게 충격이었구나.
나는 성황을 따라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성황이 몇 번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어쨌든, 걱정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나를 구원한 뒤부터, 언제나 이 자리에 걸맞게 살아가고자 하고 있으니.”
“에이, 구원이라니 그런 거창한 단어 붙이지 마세요.”
“그때나 지금이나 레이디의 반응은 똑같군요. 모두가 이렇게 한결같으면 참 좋을 텐데요.”
“하나 내 계약자는 인간 중에서도 특히 별난 녀석이지.”
“그러니 이렇게 지고하신 분의 비호를 받을 수 있는 거겠지요.”
이윽고 성황의 눈길이 나를 지나쳐 어르신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어르신이 기다렸다는 듯 툭 말을 내뱉었다.
“네 그 혀를 함부로 놀렸다가는 편히 눕지 못할 테다.”
어르신은 왜 잘 나가다가 갑자기 그렇게 경고를 날리고 그러세요?
“하나뿐인 친우를 곤란하게 만들 일은 하지 않을 테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황이 이전과 달리 살짝 긴장되는 기색으로, 그러나 여전히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어르신은 무심한 낯을 기울이며 그를 마주 바라보다가, 이내 흥 하고 짧게 코웃음을 내뱉었다.
나는 이 미묘한 어색함에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가, 결국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서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원하는 답변을 얻었으니,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일이나 하자.
“그나저나 이런 자료로는 배후를 찾아내기 어려울 것 같은데.”
그렇게 계속해서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곧 나긋한 미성이 귓속을 간질였다.
나는 그제야 슬쩍 시선을 올려 성황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이렇게 숫자만 들여다보고 있는다고 꼬리를 잡을 순 없겠죠. 특히나 타국의 경우에는 마땅히 조사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요.”
“흐음.”
“그래도 솜니움의 실제 마정석 수입량과 서로 대조할 수는 있으니,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타국의 경우에는…….”
나는 한 번 침을 삼키고서 다시금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마 타국의 수작질은 아닐 거예요.”
이런 말은 조금 이상하지만, 내 직감은 대체로 잘 들어맞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 직감이 이 순간 외치고 있었다.
이번 일은 다른 나라가 엮여 있지 않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 감일 뿐이라, 가능성을 닫아 둘 수 없으니 자료를 모두 받아 둔 거지만요. 이 부분은 다시 한번 협조해 주셔서 감사해요.”
“뭘요, 이것도 결국에는 제 일인걸요. 베르단디의 신도는 대륙 곳곳에 퍼져 있으니, 응당 제가 살필 양들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다행이에요.”
나는 훑어 내린 서류를 품에 안고서 슬며시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어쨌든 자료는 챙겼고, 성황에게서 숨김없는 지원도 확답받았으니.
“이제부터는 발로 뛸 시간이군요.”
* * *
“저, 정말 죄송해요, 미에나! 제가 어제 긴장을 너무 많이 해서……!”
몇 시간이 지난 오후.
본격적인 리넥스 순찰을 위해 나온 거리에서, 클레어가 나를 마주하자마자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건넸다.
나는 뒤따라 굽혀진 그녀의 허리를 바로 세우며 손을 저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클레어. 저라도 당연히 긴장했을 거예요.”
심지어 요리가 끊이질 않았잖아. 그걸 마다하지 않고 모두 먹어 댔으니, 당연히 체할 수밖에 없지.
‘물론 조금 놀라운 점은 있었지만.’
이왕 말도 나왔겠다, 나는 그녀를 달래고서 어제부터 내내 궁금했던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클레어.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네, 네. 말씀하세요!”
“성황 앞에서는 그렇게 긴장했으면서, 어떻게 루……, 폐하 앞에서는 그렇게 멀쩡할 수 있던 거예요?”
남의 나라 왕보다는 자기 나라 왕이 좀 더 부담되지 않나?
그렇다기엔 루스 앞에서는 별로 뚝딱거리지도 않고 제법 잘 지냈던 것 같은데.
“아, 그게…….”
내 말에 클레어가 눈동자를 몇 번 깜빡이다가 설핏 미소 지었다.
봄날의 초원을 닮은 연둣빛 눈동자는 알 수 없는 쌉싸래함에 잠겨 있었다.
“폐, 폐하께는 어쩐지 제 동생들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요.”
“동생들이요?”
에카르트 가문에 클레어 말고도 동생이 많았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으려니, 그녀가 풋풋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친동생들은 아니에요. 게다가 이번 생의 인연도 아니고요. 저는 전생을 기억하고 있거든요.”
“아.”
오늘따라 사람들이 내게 자꾸 무거운 비밀을 털어놓는 것 같은데.
나는 곧바로 입술을 오므렸다. 그러자 클레어는 괜찮다는 듯 두어 번 손을 내저었다.
“조금 무거운 이야기일 수는 있지만, 저는 전생에 마력 실험의 피해자였어요. 마담……, 그 여자의 저택에 갇혀 고통스러운 실험을 받다 죽었죠.”
“……알 것 같아요.”
모든 게 떠오르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유스틴과 대화를 나눴던 부분만큼은 기억이 나니까.
내 말에 클레어가 또 한 번 처연하게 눈꼬리를 휘었다.
“제가 폐하의 모든 사정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분을 처음 마주한 순간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그 후로 그녀는 말을 고르는 것처럼 몇 번 입을 달싹이고서 재차 말문을 열었다.
“나와 같은 아픔을 겪었구나. 하지만 나에게는 내 동생과 사무엘이 있었는데, 폐하께는 아무도 없었던 거구나.”
“…….”
“주, 주제넘은 생각이라는 건 알지만요. 그 아픔을 알다 보니 조금은 동질감이 들어서…….”
곧이어 클레어가 그제야 내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 말을 흐렸다.
나는 충분히 이해했다는 뜻으로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어쩐지 조금 루스를 안아 주고 싶어지는걸.
‘일이 끝나면 잠깐 황궁에 들러서…….’
자연히 떠오르는 상념에 이것저것 생각하던 찰나였다.
― 미에나.
별안간 뒤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