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19)
리넥스에서 믿는 신의 이름은 ‘베르단디’로, 성국인 리넥스 이외에도 대륙 전역에 신자가 제법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성국 리넥스가 풍족한 마정석 매장량에 비해 비교적 약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여태 다른 국가에 공격받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신을 건드렸다가는 왕이고 나발이고 전 대륙의 신도 손에 끝장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리넥스에서도 저렇게 당당하게 갑질을 할 수 있는 거겠지.
“성전은 따로 필요 없습니까? 성화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텐데요.”
“그건 이미 다 확인했어요. 그나저나, 역시 여러 사람이 그리다 보니 생김새에 차이가 좀 있네요.”
“최근에는 거장 리오넬이 그린 베르단디 성화의 모델을 따르는 추세입니다.”
“그렇대도 너무 성화의 모습만 똑 떼 가면 위화감을 느낄 거예요.”
신앙도 넓게 보면 덕질이라고, 그중에서도 특히 진성 덕후인 리넥스 측에서는 최근의 유행 따위는 나 몰라라 한 채 ‘내 캐해석은 그렇지 않아! 인정 못해!’라며 불합격을 내릴 수도 있었다.
“역시 고전으로 가야 하나.”
역시 태초에 빛이 있으니 전법으로 가는 게 최선인 것 같은데.
이렇게 세심하게 신경 써 준 건 감사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쓸모없었다는 말을 어떻게 우아하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레이디께서는.”
유스틴이 성화를 관찰하다 말고 불현듯 말을 꺼냈다.
“신을 믿습니까?”
“아뇨?”
그랬으면 지금 이렇게 벼락치기 공부를 하고 있지는 않았겠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냉큼 답하자, 유스틴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예상했던 답이지만, 그래도 조금 의외군요. 보통은 신에게 의지하며 삶의 희망을 얻지 않습니까.”
“아니, 뭐…….”
만약 신이 정말로 존재한대도, 나를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병에 몰아넣은 작자를 어떻게 믿겠는가. 당장에 이단이 되어서 평생을 저주하겠지.
아, 설마 그래서 아픈가? 그렇다면 오늘부로 개종합니다.
“그러는 대공자님은요?”
사실 안 들어도 뻔하지만.
짐짓 궁금한 척 묻자, 유스틴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답을 내놓았다.
“저도 믿지 않습니다. 실존 여부조차 불확실한 존재를 믿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 자신을 더 믿는 편이죠.”
“앗, 넵.”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하여간 자기애 넘치는 녀석 같으니라고.
유스틴의 말에 영혼 없이 맞장구치자, 그가 여전히 생긋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신이니 초월적인 존재니 하는 것들은 믿지 않는 편이나, 사실 이곳 솜니움에도 전해져 내려오는 오랜 전설이 있습니다.”
“초대 황제가 드래곤과 계약하여 영원한 풍요를 약속받았다는 그 전설 말인가요?”
건국 설화로 자주 등장하는 레퍼토리지. 황제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선 이런 설화 하나쯤은 있어야 하기는 했다.
그래야 눈먼 반역자가 대신 왕좌를 차지하려 들지 않을 거 아니겠는가.
[“드래곤은 실재한다” ……실종 후 50년 만에 생환한 마법사의 주장, 사실인가?>그러고 보면 저번 월간 신문에도 드래곤을 봤다고 주장하는 마법사에 관한 이야기가 실렸었지.
마법사가 지목한 장소로 갔을 땐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아 결국 낭설로 판명되었더란다.
“민간에는 딱 거기까지만 전해지고 있죠.”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황족 사이에서만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더 있기는 하죠.”
유스틴이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며 말을 건넸다. 어쩐지 장난기가 다분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황족 사이에서만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설이라니.
“그걸 저한테 말씀해 주시려고요?”
나는 황족도 아니고, 그저 당신의 딱딱한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인데?
황족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거라며, 그거 비밀 아니야?
나 혹시 뭐 돼?
“이번엔 예상했던 것과 조금 다른 반응이군요. 동등한 위치에서 동등한 정보를 공유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런 스페셜 임페리얼 시크릿까지 듣고 싶다는 소리는 아니었는데요.
나는 갈피 잃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짧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물론 궁금하긴 하다. 황족한테만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라며. 뭐가 있어도 있으니까 굳이 비밀로 하는 거겠지.
근데 이거 들었다가 ‘이런 특급 비밀을 알아 버리다니! 가만히 둘 수 없다!’라며 멸문이라도 당하면 어떡해.
나야 곧 죽을 목숨이라지만, 우리 부모님은 죄가 없잖아.
“대공자님.”
역시 이건 안 듣는 게 낫겠어.
나는 눈알을 굴리다 말고 결연히 입을 뗐다.
“저는 돈도 안 되는 주제에 쓸데없이 무거운 정보는 딱히 듣고 싶지 않아요.”
“돈이 되는 정보라면?”
“으……. 그래도 꼭 필요한 게 아니면 안 들을래요.”
내 가문 부흥시키기도 바쁜데 남의 가문까지 신경 쓸 시간 없다. 게다가 최근에는 강아지 같은 제자도 생겼다고.
“마음에 드는 답변이군요.”
곧이어 유스틴이 진정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나는 그의 입가에 달린 미소를 바라보며 주먹을 말았다가 폈다.
저거 처음부터 말해 줄 생각 없던 거지? 그래 놓고 내가 뭐라고 대답할지 떠본 거지?
이 자식은 무슨 허구한 날 나를 시험에 빠트리고 있어.
“동등한 위치에서 같은 정보를 공유한다고 해도 선은 존재해야 하는 법이죠.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아, 예.”
“너무 실망하진 마세요. 혹시 모릅니까, 언젠가 제가 레이디께 모든 비밀을 말해 줄지.”
“제가 죽기 직전이라면 대공자님께도 나쁘지 않은 대나무 숲이 될 수 있겠네요…….”
“대나무 숲?”
아차, 여긴 그런 속담 없지.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그러자 한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아차, 머리를 너무 격렬하게 흔들었나 보네.
유스틴이랑 있으면 실수할까 봐 긴장하게 돼서 몸이 덜 아픈 것처럼 느껴진단 말이야.
물론 그만큼 후유증이 심하지만.
“……시간이 다 됐군요.”
일의 효율을 위해 유스틴과 함께 일하는 게 좋을지, 요양을 위해 유스틴을 멀리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 사이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가시게요?”
“몇 시간 뒤에 열릴 경매에 참여하려면 지금 출발해야 해서요.”
“아, 오늘이구나.”
탈레스 폐광산이 경매에 나오는 게.
나는 곧바로 이해하고서 그를 따라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유스틴이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세우며 재빨리 덧붙여 말했다.
“배웅은 괜찮습니다.”
“앗, 저도 이제 침실로 돌아가서 쉬려고…….”
“아.”
내 말에 유스틴이 얼빠진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는 씰룩이는 입술을 애써 진정시켰다.
배웅하려고 일어난 거 맞는데. 나도 한 번쯤은 놀려 봐야지,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놀리겠어.
이젠 자애의 천사로 변신할 수도 없는데.
“그럼 경매 잘 부탁드려요, 대공자님.”
“이쪽 일은 걱정하지 말고 푹 쉬세요.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일전에 보낸 약도 잘 챙겨 먹고.”
“그거야말로 걱정하지 마세요.”
나도 아픈 건 싫거든.
더군다나 공짜 약재까지 받았는데, 당연히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지.
헤실헤실 웃으며 말하자 유스틴은 몇 번 고개를 젓고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내가 배웅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른 발걸음이었다.
* * *
황도 람파스에 위치한 샌더스 경매장. 그곳에 모인 여러 귀족과 상인들의 시선이 한곳에 꽂혔다.
“에버딘 대공자가 직접 이곳까지 오다니…….”
“그만큼 꼭 낙찰받아야 하는 경매품이 있다는 거겠지.”
“이번 경매엔 딱히 눈에 띄는 게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상한 일이지요. 그러고 보면 평소보다 사람이 조금 몰린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홀로 고고히 앉아 사람들의 쑥덕거림을 흘려듣고 있던 유스틴은 피켓을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미에나 시두스의 말에 따르면 탈레스 폐광산 주변을 얼쩡대다 걸린 사람이 다섯쯤 된다고 했나.
고작 그 정도 숫자로 사람이 몰렸다고 느낄 리는 없을 터.
이번 경매품 또한 그저 그런 수준의 것들뿐이었으니, 아마도 제 존재 때문에 괜히 사람이 많아 보이는 거겠지.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었다.
자신의 걸음이 닿는 곳이면, 그게 어디든 그 공간의 주인공은 저가 되고 말았으니까.
예외가 하나 있다면…….
‘그 아이.’
순간 유스틴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제 꿈에 나타난 천사, 미에나 시두스를 처음 ‘제대로’ 마주했던 날.
제 예상과는 너무나도 달랐던 모습에 당황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이었다.
오랜 지병 탓에, 사랑받고 자란 열두 살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작고 야윈 몸.
그 충격적인 첫인상 다음으로 느낀 감정은 괘씸함도, 놀라움도 아닌 ‘흥미로움’이었다.
저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푸른 눈동자 속에 깃들었던 당황과 혼란은, 제게 인사를 건넨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한두 번 연기한 솜씨가 아니었어.’
자신이 미끼를 던지지 않았더라면, 그 영리한 아이는 끝까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잡아뗐겠지.
그러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재인 것을.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