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34)
“아무래도 당신과 저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 같군요.”
내 추측을 방증하듯, 유스틴이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말을 꺼냈다. 시선은 내게 고정된 채였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미친놈.’
상황을 파악한 즉시, 나는 유스틴을 향해 빠르게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자 유스틴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작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유스틴은 독순술에도 능통하구나. 그럴 줄 알고 욕한 거다, 이놈아.
“저어, 러셀 경?”
어쨌든 지금은 일촉즉발의 상황을 진정시켜야만 한다.
나는 한번 깊게 심호흡하고서 내 앞을 가로막은 기사들을 지나쳐 발을 내디뎠다.
동시에 내내 기사들과 에버딘에게만 머물고 있던 살벌한 시선이 내게 닿았다.
이제야 나를 바라보는군요.
“여자애는 되도록 건들고 싶지 않은데. 너는 어쩌다 여기 온 거냐, 꼬마야?”
이어 그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저 반응을 보건대, 아무래도 나는 그의 안중에서 아예 벗어나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이렇게 작은 데다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니.
곳곳에 사냥개가 널려 있는데 고작 하루살이 따위가 신경이나 쓰이겠는가.
“설마 저 번견 자식이 끌고 다니는 건…….”
“아니에요, 아니에요!”
무슨 그런 끔찍한 발언을?
나는 곧바로 격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심지어 호칭도 귀족 나리에서 번견 자식으로 바뀌었잖아.
우리 유스틴이 암만 재수 없어도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거든요!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제가 이분들을 끌고 온 거예요. 제 호위를 위해서요.”
“에버딘 가문의 사람을 호위로 부린다고? 갓 태어난 황녀 전하라도 되시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나를 마주하는 동안 느슨하게 쥐고 있던 쇠스랑을 고쳐 잡았다.
황실과 연관된 인물을 특히 경계하는 것 같은데. 아까 전 발언도 그렇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지크프리트 씨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러셀 경. 저는, 콜록, 시두스 가문의 장녀 미에나 시두스라고 해요.”
“시두스 가문이라면, 디아센 형님의…….”
“저희 아버지를 아세요?”
형님이라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그가 덩달아 눈을 크게 뜨고서 나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유스틴을 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매사에 억울해 보이는 표정이 아버지를 쏙 빼닮았군.”
뒤이어 그가 제 나름대로 판단을 마친 듯 작게 중얼거렸다.
일부러 흘러넘치게 만들어 사람을 긴장시켰던 살기 역시 어느 정도 줄어든 상태였다.
무슨 바람이 분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저 사람이랑 우리 아버지랑 연이 닿았던 것 같은데.
이 소중한 기회를 놓칠 수 없지.
감사합니다, 아버지!
나는 어딘가에 계실 아버지에게 마음속으로 따봉을 날려 준 후 빠르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켈록, 저희는 딱히 황제의 명을 받아서 온 건, 콜록, 아니고요.”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살기가 거둬진 순간 온몸에 긴장이 풀린 탓인지 뒤늦게 지병의 고통이 찾아왔다는 점일까.
하필이면 이런 때에. 그렇다고 말하는 걸 멈출 생각은 없지만.
“진짜 순수하게, 쿨럭! 아, 죄송해요. 제가 몸이 안 좋은데, 커흠. 산이라 그런지 아직 좀 쌀쌀해서.”
어쩐지 다시 멀미도 시작되는 것 같고.
‘건네받은 아티팩트도 멀미 특효약인 줄 알았더니, 영 효과가 없잖아.’
그런 주제에 불난 집에 부채질이나 하고, 심지어 나한테 알아서 해결하라고 등까지 떠밀다니.
“괜찮습니까? 안색이 안 좋은데.”
유스틴 역시 이상함을 느꼈는지 내게 성큼 다가오고서 조심스레 내 이마에 손을 올렸다.
심지어는 나와 유스틴을 지키고 서 있던 기사들마저 완전히 내 쪽으로 등을 돌린 상태였다.
“열이 나는군요. 언제부터였습니까?”
“어, 잘 모르겠는데요. 마차에서 내렸을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아마 살기를 직접적으로 맞닥뜨린 것 때문이 아닐까. 순간적으로 긴장을 너무 많이 한 거지.
“하여간 미련하기는.”
곧이어 그가 나를 힐난하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은빛 눈동자 속에는 생명이 위협당하는 순간에도 잃지 않고 있던 여유 대신, 당혹과 걱정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지크프리트 씨 또한 나와 유스틴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갑자기 저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하는 사람들 때문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스틴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계속해서 내 상태를 진찰했다.
“마지막으로 약을 먹은 게 언제입니까?”
“쿨럭! 어, 아마 출발하기 전 아침에…….”
그러고 보니 마차 타고 오느라 약 먹을 시간도 지났구나. 어쩐지 아까부터 자꾸 가슴이 따끔거리더라니.
유스틴의 별장으로 요양 갔을 땐 의사도 같이 따라와서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는데.
“러셀 경, 실례지만 잠시 레이디를 집 안으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내 대답에 유스틴이 고개를 홱 돌리고서 지크프리트 씨에게 물었다.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한 음성이었다.
내 안색이 그렇게 안 좋아 보이나.
하긴, 내가 느끼기에도 내 몸 상태가 확실히 좋지 않기는 해.
‘세상이 도네, 돌아…….’
요즘에는 약 기운이 떨어지기 전에 다시 진통제를 복용해서 이렇게까지 아픈 적 없었는데.
고통이 잘 느껴지지 않았을 뿐, 내 몸은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죽음으로 향하고 있었구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더니, 역시 겪지 않으면 모른다니까.
“아니, 하지만…….”
“저희는 당신에게 죄를 물으러 온 게 아닙니다. 애초에 그런 것 따위는 알 바도 아니에요!”
지크프리트 씨가 미적거리는 사이, 유스틴이 화난 기색으로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나는 두 개로 쪼개졌다가, 하나로 뭉쳤다가, 다시 흐릿하게 희미해지는 유스틴의 인영을 눈에 담으며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대공, 자님. 콜록!”
“뭐가 필요합니까? 당장 의원을―.”
“제가 들고 온, 가방에, 약이…….”
“알겠습니다. 요한! 당장 마차에서 미에나의 가방을 꺼내 와!”
“그리고 당신, 너무, 쿨럭, 시끄러워서……. 머리가, 울려…….”
아, 아무래도 아침 약빨은 여기까지인가 봐. 이참에 몇 시간이나 효력이 가는지 체크해 놓고 다음부턴 꼭 잘 챙겨 먹어야지.
잠깐 떠오른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 *
[결국엔 여기네.]현실에서 정신을 잃었으니 당연히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지만.
나는 광활히 펼쳐진 검은 통로를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꿈속으로 들어온 걸 보면 다행히 내가 쓰러지고 난 후에도 별일은 안 생긴 것 같긴 한데.
‘살벌했지, 진짜.’
어르신의 살기를 받는 것도 상당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꿈과 현실은 달랐다.
정확히는 내 몸이 달랐다.
아무리 그래도 드래곤이 내뿜는 살기가 몇 배는 더 지독할 텐데, 현실의 몸뚱어리는 두부처럼 연약하기 그지없어서 지크프리트 씨의 살기에 영향을 더 받을 수밖에.
[어쨌든 능력 하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그 깐깐한 유스틴이 직접 선별한 기사를 단신으로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물론 직접 붙어 보지는 않았지만, 세상에는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보통은 본능적으로 알게 되지. 특히나 나는 죽음을 한 번 겪어 봐서 그런가, 이런 쪽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더라고.
[흠, 어쩌면 좋을까.]어쨌든 꿈에서 깨기 전까지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재로 들어가서 책이나 읽을까.
그러고 보니 월간 신문이 새로 발간되었을 텐데. 바빠서 슬쩍 훑기만 하고 제대로 확인해 본 적은 없었지.
특히나 유스틴이랑 협업하기로 한 이후부터는, 신문을 읽는 것보다 그에게서 정보를 얻는 게 더 빠르고 정확해서…….
[아니!]하지만 이번엔 네가 틀렸다, 유스틴 에버딘!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조금 전의 기억에, 나는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나를 그 살벌하고 무서운 상황에 달랑 던져 놓을 수가 있어? 그것도 기름까지 부어 가면서?
[개자식, 나쁜 자식.]친구라면서, 파트너라면서.
친구를 그렇게 대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나는 허공에 몇 번 주먹을 날리며 분을 풀었다가, 뒤이어 떠오르는 기억에 천천히 행동을 멈췄다.
그래도 정신을 잃기 전에는 제법 나를 챙겨 주는 것 같았는데.
‘다급해 보였던 것 같기도……?’
당황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심지어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했지.
내가, 정확히는 모두가 지크프리트 씨의 쇠스랑에 찔릴 직전까지 갔을 때도 여유를 잃지 않았었는데.
[하나만 해라, 하나만.]내가 자기를 완전히 미워하거나, 혹은 완전히 좋아할 수 있도록.
괜히 힘이 쭉 빠지는 기분에, 나는 곧 팔을 툭 떨어트리고서 다시금 느릿하게 숨을 내뱉었다.
유스틴이 괜히 그런 짓을 한 게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여유로웠던 이유 역시.
내가 모르는 안전장치를 마련해 놨으니 그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었던 거겠지.
그래도 괜히 지크프리트를 자극한 건 역시 용서할 수 없다.
생각을 마친 나는 서재로 향하는 문에서 천천히 시선을 뗐다.
들어가서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주변을 좀 둘러보다 가는 게 더 낫겠지.
겸사겸사 어르신의 의뢰도 수행해 보고.
나는 주섬주섬 펜과 종이를 소환해 ‘위그드라실’이라는 이름을 적어 날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이비행기는 맹렬히 바닥으로 추락했다.
[음, 역시.]이렇게 금방 해결되면 그건 기적이지. 나는 떨어진 종이비행기를 다시 주워 들고서 주위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꿈 투어려나.
이 시간에 잠자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느냐만…….
[오?]예상외로 바로 가까이에 있었군요, 따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