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35)
나는 뒤를 돌자마자 보이는 문을 향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빛나는 문은 아니지만, 지금은 그냥 시간을 보낼 게 필요한 것뿐이니까.
[이름이……, 니케?]잘 안 쓰이는 이름인데 신기하네.
짧은 감상을 마친 후, 그대로 문을 열어 꿈속으로 진입했다.
곧이어 재빨리 몸을 숨긴 나를 맞이한 건 드넓게 펼쳐진 꽃밭이었다.
정원사가 공들여 가꾼 저택의 화원이나 식물원 같은 곳이 아닌, 정말 자연 그 자체의 꽃밭.
그 속에 서 있는 건 오직 두 사람이었다.
수채화처럼 번진 붉은 노을 아래 율동하듯 부드럽게 넘실거리는, 역시나 붉은 꽃들 사이에서.
[진지하게 할 말이 있는데.]그 모든 것보다도 붉은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달큼하게 속삭였다.
[이번엔 정말로 장난 아니야.]그와는 반대로 푸른 바다를 연상시키는 눈동자는 어찌나 깊고 진한지, 노을조차도 이를 살라 먹지 못하고 부유할 뿐이었다.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고서 작게 숨을 들이켰다.
‘지크프리트 러셀.’
불을 옮겨 놓은 듯한 새빨간 머리카락은 하나로 질끈 동여맸음에도 어쩐지 불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수염 자국 하나 없이 말끔했으며, 입고 있는 옷 또한 깔끔하고 단정했다.
‘저 제복 언젠가 본 적 있어.’
아주 옛날에, 아직 내가 아프지 않았던 어린 시절에.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수도 광장에서 황제의 행진을 봤을 때 보았던 제복이다.
즉, 그가 입고 있는 옷은 황실 근위대의 제복이었다.
[항상 그렇게 말해 놓고 실없는 소리만 늘어놓았으면서.]현재와는 너무나도 다른 그의 모습에 넋을 놓고 있는 사이, 그의 앞에 서 있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너는 언제나 허황한 말만 늘어놓지. 물론 그런 너를 좋아하지만, 지크. 지금은 그런 농담을 주고받을 기분이…….] [빅토리아.]이름이 빅토리아라고? 하지만 분명 문에는 니케라고 적혀 있었는데?
빅토리아가 아닌 제삼자의 꿈이라고 하기에는, 애초에 누군가를 지켜보는 시점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크프리트 씨의 꿈도 아니니, 남은 건 이 빅토리아라는 여자밖에 없는데.
[빅토리아.]또 한 번, 그가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언뜻 장난스럽게 느껴지면서도,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애정이 담긴 목소리로.
[우리 도망갈까.]그가 제 연인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서 다시 한번 속삭였다.
[도망치자, 우리.] [……지크.] [아무도 우릴 방해하지 않고, 누구도 우릴 갈라놓을 수 없는 곳으로.]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빅토리아의 황금빛 눈동자가 하릴없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노을을 머금은 그녀의 금빛 머리칼 역시 바람을 따라 굽이치고 있었다.
그러고서 그녀는 당황을 표해야 할지,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그를 다그쳐야 할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크프리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게 설령 지옥이라 할지라도?]결국 전혀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러자 지크프리트가 개구쟁이처럼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그녀의 말을 반복했다.
[그게 설령 지옥이라 할지라도.]그리고 동시에 내 손이 서서히 옅어진다 싶더니.
“……에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희미하게 파고들었다.
* * *
“미에나?”
이윽고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당연하게도 유스틴 에버딘이었다.
내내 곁에서 머물렀던 건지, 유스틴은 내가 눈을 뜨자마자 빠르게 말을 걸어왔다.
“정신이 듭니까? 지금 당장 근처 의원을 부르러 갔으니 우선은…….”
나는 흐릿한 시야를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 몇 번 속눈썹을 팔랑거리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분명 쓰러지기 전에 시끄럽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대공자님…….”
목소리가 쩍 갈라지지 않는 걸 보니, 쓰러진 지 얼마 안 지난 것 같은데.
“여기는…….”
침대도 아니고 소파라니.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슬쩍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고 하니, 유스틴이 조심스레 내 어깨를 누르며 대신 답했다.
“러셀 경의 집입니다.”
“다행히 칼부림 없이 잘 넘어간 모양이네요…….”
다시 일어났을 때 주변이 난장판 되어 있을까 봐 살짝 걱정했는데. 기사들은 여기 없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적당히 타협한 모양이지.
짐짓 장난스러운 태도로 말하자, 유스틴이 나를 흘겨보았다. 그의 손에는 작은 약병이 들려 있었다.
“약부터 마시세요. 응급처치는 해 놨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뿐이니까요.”
나는 그가 건넨 약병을 단숨에 들이켜고서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금방 일어나게 되더라니, 응급처치했었구나. 그런데 유스틴이 그런 걸 배울 일이……, 있나?
“이런 증상을 응급처치하는 방법도 알고 계셨어요?”
“제가 아니라…….”
유스틴이 무어라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내가 했다.”
그보다 한발 앞서, 낮고 건들대는 목소리가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여전히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슬그머니 눈동자만 굴려 지크프리트 씨를 응시했다.
지나치게 멀끔한 모습을 봐 버려서 그런가, 진짜 적응 안 되네.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 사정도 안 듣고 멋대로 판단하려 들었던 건 사과하마.”
뒤이어 그가 거침없이 내 쪽으로 걸어오고서 냉큼 사과를 건넸다. 나는 다시 눈동자를 또르르 굴려 유스틴에게 눈짓했다.
대충 이야기를 들었다는 게 어디까지 들었다는 소리지? 용병을 구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는 거? 아니면 내 건강에 대해서까지?
“몸도 성치 않은 애가 나 하나 만나려고 이런 험지까지 오다니, 네 아버지도 알고 계신 거냐?”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는 아마 모르실 거예요.”
대충 사업에 필요한 출장이라고만 말해 둬서.
“어딜 가서 누구랑 만나는지는 보호자한테 상세히 말해야지. 그렇게 사람 따돌리는 거 아니다.”
내 말에 지크프리트 씨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는 행동을 보면 영락없이 아버지 친구분 같은데. 우리 아빠랑 꽤 친했던 사이인가?
그럼 이렇게 개고생할 필요 없이 처음부터 아버지한테 연락 좀 해 달라고 부탁하면 되는 일……, 아니었을까?
“앞으로는 그래야겠어요…….”
사무치는 진심을 담아 중얼거리자, 지크프리트 씨가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여전히 앞머리가 그의 눈을 가리고 있어 정확한 표정은 알 수 없었으나, 입매만큼은 꿈에서 보았던 장난스러운 미소 그대로였다.
“어쨌든, 기껏 여기까지 찾아와 준 건 고맙다만.”
뒤이어 그가 미안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네 제안은 거절할 수밖에 없겠다.”
저 아직 제대로 된 이야기도 안 꺼냈는데요, 아저씨…….
나는 유스틴을 연신 흘끔거렸다. 하지만 유스틴은 불만 섞인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저,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정말 잠깐이면 되거든요. 1년, 아니, 어쩌면 1년도 안 채우고…….”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유스틴이 짧게 핀잔했다.
아니, 하지만 내 몸뚱이가 그런 걸 어떡하라고. 너도 봤잖아, 진통제 안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무래도 직접 보여 주는 편이 좋겠네. 안 그러면 포기도 안 하고 계속 찾아올 테니.”
그사이 지크프리트 씨가 깊게 숨을 내쉬고서 천천히 등을 돌렸다. 조용히 따라오라는 제스처였다.
그 짧은 사이에 내 성격을 잘도 파악하셨군.
나는 그제야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지크프리트 씨의 뒤를 따랐다. 유스틴 역시 나를 부축할 것처럼 내 곁에 딱 붙어 걸음을 옮겼다.
워낙 작은 오두막 같은 집이었던 탓에,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문 앞에 설 수 있었다.
“오늘 본 건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라. 특히 작은 에버딘 도련님은 더더욱.”
곧이어 그가 장난기 한 점 없는 목소리로 서늘하게 경고를 날린 후.
“쉬잇.”
누구보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그 순간, 나는 코를 파고드는 향기에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내게는 지독하게도 익숙한 냄새. 어쩌면 곧 내게서도 날지 모르는 향.
그래, 이건 망자의 향이었다.
침실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 간간이 들려오는 산새 소리가 오히려 불협화음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나는 여전히 문간에 선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미 한 번 마주한 적 있는 얼굴이었다.
‘빅토리아.’
하지만 꿈속의 그녀와 지금 내가 마주한 여인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존재했다.
바람결에 파도처럼 굽이치던,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은 어느덧 생기를 잃은 채 간신히 침대를 수놓고 있었다.
윤기가 흐르던 하얀 피부는 창백하게 바래고. 짙은 노을을 품은 채 빛나던 두 눈은 조용하게 잠겨 미동하지 않았다.
“니케.”
곧이어 지크프리트 씨가 간병인을 지나쳐 침대로 다가가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잠깐 눈썹을 씰룩였다가, 이내 표정을 정돈했다.
역시 니케와 빅토리아는 동일 인물이군. 만일 그가 중죄를 저지른 게 맞다면, ‘지크프리트 러셀’의 꿈을 내가 찾을 수 없던 이유도 설명할 수 있었다.
이름을 바꿔야 할 사람은 비단 빅토리아뿐만이 아니었을 테니까.
‘근데 이런 식으로 이름을 바꾼다고 꿈속의 명패도 바뀌……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