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36)
이름이란 결국 존재의 증명.
‘나’라는 존재를 나타내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절대적인 수단이 아니던가.
단순히 가명을 쓴다고 해서 명패가 휙휙 바뀌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랬다면 이미 내 꿈속의 명패는 갖가지 별명이나 가명으로 넘쳐났겠지.
“오늘은 손님도 있어. 하마터면 내가 다 죽일 뻔했지만.”
이어 그가 빅토리아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장난기 다분한 목소리였으나, 조금만 늦었다면 정말로 저럴 뻔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내가 저 핏덩어리들을 해치려고 하다니, 혼나도 싸지.”
그렇지, 니케?
지크프리트 씨가 작게 키득거리며 농담하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미약한 숨소리만이 그녀가 아직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각인시킬 뿐.
“내 아내께선 아무래도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덜 된 것 같군.”
제 아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던 지크프리트 씨가 이내 굽혔던 상체를 펴고 우리 쪽으로 등을 돌렸다.
“우선 다시 나가지.”
* * *
“이걸로 이유는 충분히 설명된 것 같은데.”
잠시 뒤, 지크프리트 씨가 부엌 테이블에 기댄 채 입을 열었다. 다정함이 뚝뚝 배어나던 조금 전과는 완전히 딴판인 목소리였다.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랑 비교하면 훨씬 낫기는 하지만.
“나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어.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사실대로 이야기하자면 지금 너랑 이렇게 대화하는 것도 내게는 시간 낭비에 불과하고.”
“이해해요.”
기껏 찾아온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는 게 무정하다 싶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의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에게 나는 철저한 불청객이다. 그가 내게 뭐라고 하든, 나는 그에게 반박할 자격이 없었다.
아무리 내 아버지가 그와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상황을 알았으면 이렇게 찾아오지는 않았을 거야.’
이 시기를 어떤 마음으로 보내고 있을지, 일 분 일 초가 얼마나 소중한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러셀 경. 제가 너무 성급했어요.”
이런 상황에 빠진 사람에게 용병을 제안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설령 이 뒤로 다른 사람을 영영 못 구한다고 해도 그건 내가 감내해야지 어쩌겠어.
정 안 되면 레어 주변에 오두막을 지은 다음에 아버지를 혹사하는 방법도…….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바로 그때, 지금껏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있던 유스틴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의 은빛 눈동자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듯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게 실례가 되는 줄은 알고 있으나.”
이어 그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혹시 부인께서 떠난 후에는…….”
“대공자님.”
안 그래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사람한테.
“아니, 딱히 말조심할 필요 없어. 어차피 상황을 보여 준 건 나고.”
하지만 지크프리트 씨는 의외로 담담하게 그의 말을 받아들여 주었다.
세간에서 평판이 좋았다더니, 확실히 무던한 타입이구나. 인성이 바르다고 할 만해.
물론 처음에는 상당히 거칠었지만, 오해였다는 걸 안 이후부터는 유스틴한테도 나쁘게 대하지 않고.
‘지금이 가장 예민한 시기일 텐데도.’
나 같았으면 집 근처에 웬 기사들이 잔뜩 포진한 순간 냅다 쇠스랑 들고 달려들지 않았을까.
“니케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정도는 이미 잘 알고 있어. 그래서 거처도 이곳으로 옮긴 거고.”
“…….”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산책도 하면서 꽃 구경도 하고는 했는데.”
지크프리트 씨가 문득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그가 추억에 잠길 수 있도록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유스틴 또한 이번에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네가 보기엔, 얼마나 더 함께할 수 있을 것 같냐.”
지크프리트 씨가 여전히 창문 너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상태로 물었다.
나는 몇 번 입술을 어물거렸다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저는 의사가 아니라 함부로 추측할 수 없어요.”
“그래도 감이라는 게 있잖아.”
“……러셀 경은 제가 솔직하게 대답해 드리길 바라시나요?”
“당연하지. 어린애가 벌써 거짓말하는 거 아니다. 빈말을 듣는다고 해서 정말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가 어렴풋하게 웃음기 섞인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저건 최후의 방어기제였다.
그 말인즉, 지크프리트 씨도 이미 모든 상황을 인지하고 있다는 이야기였고.
그렇기에 나는 더더욱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레이디에게 답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유스틴이 나 대신 입을 열었다. 물론 그 역시도 차마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지만.
“내가 너무 무거운 질문을 했나 보군.”
곧이어 지크프리트 씨가 고개를 돌려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며 씩 미소 지었다.
저 표정을 보건대, 아무래도 유스틴이 내 상태를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지난달에 왔던 의원은 일주일을 예상했지. 하지만 니케는 한 달을 더 버티고 있어. 그래서 처음에는 설마 하는 희망에 기대 봤지만, 나는……, 그래.”
이어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니케에 관한 건 모르는 게 없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에는 직감적으로 알게 되더군.”
“…….”
“이제 정말로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걸.”
깊게 잠긴 목소리 끝이 처절하게 갈라진 채 정적을 흩트렸다.
그러고서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그래서, 이후에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지? 아마 작은 도련님께서는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혼자가 될 거란 걸 알고 다시 제안할 겸 물어본 거겠지만.”
“러셀 경, 그건.”
“나는 니케와 약속한 게 있어. 그러니 그걸 지킬 생각이다.”
미안하다는 듯 붉은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올리며 답했다.
나는 드러난 눈동자 안에 깃든 고통과 절망, 그런데도 사라지지 못한 애정을 마주하고 그대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 약속은 절대적이다. 나는 그것을 깰 수 없다.
아니, 깨고 싶지 않았다.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는 게 좋겠네요. 귀중한 시간을 빼앗아서 다시 한번 죄송해요, 러셀 경.”
역시 더 괴롭히지 말고 빨리 돌아가는 게 좋겠어.
나는 유스틴의 옷자락을 조심스레 끌어당기며 고갯짓했다. 그러나 유스틴은 꼼짝도 안 하고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아니, 얘가 갑자기 왜 그래?
이건 이 이상 우리가 끼어들 수 있는 영역이 아니란 말이야.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래, 조심히 돌아가라.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시기가 좋지 않았네.”
그사이 지크프리트 씨가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네 아버지께도 안부 전해 드려. 그때 일도 정말 고마웠었다고도 해 주고. 아마 알아서 알아들으실 거다.”
“감사 인사 정도는 직접 편지하셔도 게 좋을 것 같은데, 저택 주소 알려 드릴까요?”
“……아니, 됐다. 어차피 다시 만나지도 못할 텐데.”
내 말에 지크프리트 씨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 순간, 유스틴을 잡아끌던 행동을 멈추고 멍하니 지크프리트 씨를 바라보았다.
빅토리아와 한 약속.
눈치 빠른 유스틴이 굳이 그 이후의 일을 물어보고, 떠나려는 나를 막아선 이유.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에게 건네는 안부 인사.
“설마.”
불길한 예감이 손가락 끝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 머릿속을 잠식한다. 아니, 어쩌면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어 손가락 끝까지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걸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간신히 숨을 토해 내듯 지크프리트 씨에게 질문했다.
“따라 죽으려는 건 아니죠?”
지크프리트 씨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었기에.
“그러지 마세요, 러셀 경. 제발 목숨을 함부로 버리지 마세요. 세상에 어느 누가 자기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걸 원하겠어요?”
“넌 모른단다, 얘야.”
“아니요, 알고 있어요. 적어도 빅토리아가 그걸 바라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결국 참지 못하고 쏘아 대듯 말을 토해 냈다.
동시에 내내 누그러져 있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더니.
“……그 이름은 어떻게 안 거지?”
지크프리트 씨가 살기를 머금은 음성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떨리는 어깨를 심호흡으로 진정시키며 숨 막히는 위압감을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물러서면, 지크프리트 씨는…….
나는 다시 한번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이번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빅토리아 씨의 꿈에 직접 들어갔으니까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