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67)
나는 잠깐 걸음을 멈췄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서 소리가 난 곳으로 발을 돌렸다.
[으, 흑…….]점점 소리와 가까워질수록, 나는 이 목소리가 비단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숨죽여 우는 소리.
두려움을 참지 못해 때때로 내뱉어지는 자그마한 신음.
모두 어린아이의…….
[쉬이. 착하지.]바로 그 순간, 이번에는 제법 또렷한 음성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소리가 난 곳에 다다른 나는 슬며시 고개를 내밀어 방 안을 살폈다.
그곳에는 여러 아이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저마다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그 가운데에 앉아 다정한 자장가와 함께 아이들을 달래는 사람은, 기껏해야 그들보다 고작 몇 살 정도 더 많아 보이는 작은 여자아이였다.
[내가 이곳에서 너희를 빼내 줄게. 우리 같이 나가자.]여자아이는 지치지도 않는 것처럼 몇 번이고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며 부드럽게 속삭여 주었다.
[너희는 괜찮을 거야.]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믐이다.]별안간 등 뒤에서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방 안에 있던 아이들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숨을 멈추고 허공을 응시했다.
극도의 공포와 절망이 이리저리 뭉친, 허망한 눈빛들이었다.
[그래, 오늘은…….]나 역시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가, 곧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네가 좋겠구나, 캐서린.]땅딸막한 양초가 꽂힌 촛대를 든, 희미한 빛에 비친 모습이…….
* * *
바스락바스락.
보통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그마한 소리가 끊이지 않고 귓속을 간질인다.
이 자그마한 소란이 대체 몇십 분째 이어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지크프리트는 침대에 뉘었던 몸을 일으키고서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지금이 대체 몇 시길래.’
곧이어 지크프리트가 작게 울려 퍼지는 소리를 따라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평소라면 한창 잠들어 있어야 할 시간인데, 저 꼬마 아가씨는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꼭두새벽부터 서재를 뒤진단 말인가.
“이번엔 또 꿈에서 뭘 봤길래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이내 서재의 문을 열어젖힌 지크프리트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대체 무엇을 하고 있던 건지, 이리저리 널린 채 서재를 어지럽힌 수많은 신문.
그리고 그 가운데에 앉아 누렇게 바랜 신문 한 장을 든 소녀가.
곧 여명에 잠겨 사라질 푸른 달빛 아래에 앉은 채 막연한 기대를 품은 건지, 혹은 의미 모를 분노를 머금은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서.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를 천천히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 * *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난 작은 소동은 저택을 소소하게 뒤집어 놨다.
평소에는 어지르는 일 없이 조용히 책만 읽던 내가 서재를 개판으로 만들어 놨으니,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들 중 내게 화를 내거나 다그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는 무언가를 찾고 싶었으면 사용인을 불러 시키지 그랬냐고 말씀하셨지만, 그마저도 날카로운 핀잔은 아니었다.
“저택의 사람들은 저를 너무 오냐오냐 대하는 것 같아요.”
물론 아가씨더러 알아서 청소하라고 하는 게 더 이상하겠지만, 그래도 어지르지 말라는 말 정도는 해도 되지 않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자, 지크프리트 씨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입을 열었다.
“그야 네가 독립적인 성향이 너무 강하니까 그렇게 느껴지는 거지.”
“독립적이라뇨, 그냥 응석 부릴 나이가 지난 것뿐인데.”
“네 나이엔 원래 응석을 더 부려야 하는 거야…….”
이게 에버딘 대공자랑 붙어 다니더니 기준이 이상해졌나.
그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읊조렸다. 나는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려 넘기기로 했다.
그러자 지크프리트 씨는 쯧쯧 혀를 차더니, 이내 능숙히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얼마나 심각한 일이었길래 꼭두새벽부터 그 난리를 피운 거야? 갑자기 외출 나오자고 한 것도 그렇고.”
나는 괜스레 잘 땋아 내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심각해 보였어요? 딱히 그런 건 아닌……, 데.”
사실은 심각한 일이 아니었으면 하는 거지만.
“내가 널 본 세월이 얼만데. 심각한 일이 아니라고 하기엔 네 표정이 볼만하던데?”
“저희 알게 된 지 고작 몇 개월밖에 안 됐는데요.”
“넌 사람이 알기 쉬워서.”
“저처럼 알기 어려운 사람이 어디 있다고.”
하다못해 우리 부모님도 나를 완전히 알지 못하는데.
나는 한쪽 입꼬리를 씁쓸하게 빼 당겼다가, 이내 표정을 정돈하고서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어쨌든 지크프리트 씨를 여기 데려온 이상, 돌아가는 상황은 설명해 줘야 할 테니.
“이미 아시겠지만, 제가 어떤 사람 꿈을 조금 엿봤거든요. 아, 걱정하지는 마세요. 어렸을 때 이후로 저는 이제 웬만해선 주변 사람 꿈 안 들어가니까.”
“내가 언제 그런 걸 걱정했다고.”
“하긴, 요즘엔 그래도 잘 주무시더라고요.”
꿈에 안 들어간다고 해서 아예 신경을 안 쓰는 건 또 아닌지라.
장난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하자, 지크프리트 씨의 표정이 미묘하게 물들었다.
나는 고개를 까딱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튼, 꿈 내용도 그렇고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라. 저한테 익숙한 인물이면 신문에서 본 거겠지 싶어서 오랜만에 서재 좀 뒤져 봤어요.”
마음 같아서는 클레어 에카르트의 꿈에서 벗어나자마자 바로 뒤져 보고 싶었으나, 루스와 한 약속이 있었기에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주제에 마음은 또 콩밭에 가 있어서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못했지…….’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던 바람에 루스 꿈에서 나올 적당한 타이밍도 찾지 못해 플라네타륨에도 못 들어가고.
‘뭐, 그곳에 갔어도 제대로 된 자료는 못 찾았겠지만.’
플라네타륨에 쌓여 있는 건 대부분 전생에서 얻어 온 지식.
이번 생에서 얻은 정보도 방대한 편이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태어난 이후의 정보들에 불과했다.
물론 내가 얼굴을 보고 익숙함을 느꼈던 만큼, 그 속에서도 부분적인 정보는 찾을 수 있었겠지만.
‘진짜는 바로 거기에 있었지.’
15년 전 월간지에 실린 기사.
당시 최고로 아름다운 초상화의 모델이라고 소개된…….
“마담 아페르타, 알고 계세요?”
“아, 그 여자.”
내 말에 지크프리트 씨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꽤 유명하지 않았나. 초상화도 그렇고, 거기 얽힌 추문도 꽤…….”
“역시 아시는구나.”
“나도 그때는 나름대로 소문에 빠삭했었다고. 물론 믿지는 않았지만.”
그런 더러운 소문은 들어도 들은 걸로 치지 않았다며, 그가 곧장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슬며시 눈동자를 굴리며 새벽에 읽었던 약 15년 전 기사의 내용을 떠올렸다.
[대부호 헤르윈 아페르타의 청혼이 연일 화제다. 로맨틱한 프러포즈의 주인공은 「연인의 초상」의 모델인 마담 아페르타. 헤르윈 아페르타는 자신이 그린 첫 초상화를 제 모델에게 선물하며 청혼한 것으로 알려졌다.헤르윈은 그 정도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마담 아페르타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다며…… (중략)>
‘그건 다 개소리지.’
만약 그게 사실이면 헤르윈 아페르타는 세기의 천재가 아닌가. 붓 한 번 잡아 본 적 없는 사람이 그렇게 세밀한 터치를 할 수 있다니.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사망하고 가문의 재산을 모두 독차지하는 바람에 온갖 더러운 소문이 따라다녔지.”
곧이어 지크프리트 씨가 기억을 더듬었는지, 조곤조곤 말을 내뱉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문의 스캔들 역시 바로 그 부분을 다루고 있었다.
헤르윈 아페르타와 그 아내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급작스러운 남편의 사망. 그리하여 그녀의 손으로 들어가게 된 막대한 재산.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대중이 물어뜯기 딱 좋은 가십거리였다.
“뭐, 어쨌든 모두 헛소문이었고.”
금방 재혼할 거라는 추측과는 달리, 마담 아페르타는 재혼은커녕 다른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제 남편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언제나 검은 드레스와 베일 달린 모자를 쓰고 다녔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이 가진 돈을 낭비하지 않고 고아를 대상으로 한 후원 사업을 벌이기까지 했으니, 그리하여 몇 년이 지난 후에는 모든 추문이 사라졌더라…….
라는 후속 기사가 있지만.
‘모든 조건이 다 성립되어 있잖아.’
돈이 많고, 후원 사업을 벌여 아이들과 접점이 있고.
무엇보다 꿈에서 본 그녀의 인상착의가 후속 기사에서 말한 것과 일치해서.
“그 여자가 지금 상황이랑 무슨 상관인 건데?”
“꿈에서 본 상황대로라면, 그녀가 아이들을 가두고 무언가 하는 것 같았어요.”
“그냥 상상에 기반한 꿈이면 어쩌려고? 어쨌든 꿈이잖아.”
“그렇다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조금 있어서요.”
물론 지크프리트 씨의 말처럼, 현실이 아닐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직감은 그럴 리 없다고 외치고 있었다.
마담 아페르타와는 안면이 없을 클레어 에카르트가 굳이 그 꿈을 꾸었다는 점. 그 꿈이 마치 빅토리아의 꿈처럼 선명했다는 점.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울고 있었어요.”
깜깜한 방에 갇혀 서로를 부둥켜안고 공포에 찬 신음을 애써 틀어막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그 순간 내 눈에는 그 아이들이 모두 루스로 보였다.
밝고, 잘 웃었을. 하나 그 모든 기회를 박탈당한, 작고 연약한 루스로.
“그래서 일단 살펴보러 온 거예요. 딱히 뭘 하려는 것도 아니고.”
참고로 마담 아페르타의 현 거주지 위치는 유스틴이 알려 줬다.
아침 일찍 전서구를 날려 보내니 점심도 안 돼서 답장을 주더라고.
나중에 꼭 설명해 줬으면 좋겠다는 추신도 굳이 굳이 덧붙여서.
‘안 그래도 이번 건 말할 예정이었는데.’
아무래도 우리 사이에 불신이 싹튼 모양이군. 이건 빨리 뽑아야지.
생각을 마친 나는 지크프리트 씨를 향해 다시금 말을 건넸다.
“우선 저희의 목표는 저택 내부에 들어가는 거예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