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72)
“히잉, 후원이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은 몰랐어요…….”
짐짓 너스레를 떨며 말하자, 마담 아페르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고개를 이리 갸웃 저리 갸웃대며 다시 한번 그녀의 인내심을 갉작였다.
“음, 역시 그냥 하지 말까요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담 아페르타의 아랫입술이 또 한 번 갈피를 잃고 움찔거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말을 건넸다.
“후원은 어디까지나 마음에서 우러나야 가능한 일이지요. 제가 강요한다 한들, 레이디께서 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게 맞습니다.”
이 정도로 속을 박박 긁는데도 저 정도에서 그치다니.
10년 넘게 같은 주제를 연구하는 사람의 인내심을 내가 얕봤군.
‘그래도 정말로 놔줄 줄은 몰랐는데.’
보통은 어르고 달래서라도 제 아가리에 들이려고 안달할 텐데. 내 존재가 그 정도로 간절하지는 않나?
그렇다면 계산 실수인데.
“하물며 레이디께서는 이 일에 관해 저 말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잖습니까.”
바로 그 순간, 마담 아페르타가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말끔히 정돈한 채로 입을 열었다.
“알고 있는 이가 없으니, 무른다고 하여도 레이디를 탓하고 깎아내릴 사람도 없지요.”
나는 곧바로 플랜 B를 실행하려다 말고 멀뚱히 두 눈을 끔뻑였다.
아하, 방금 건 그냥 나한테 낚싯대를 던지기 위한 발판이었군.
‘그럼 장단 좀 맞춰 줄까.’
그쪽은 무슨 맛 미끼 쓰는지 좀 알아봅시다.
“헤헤, 그쵸…….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 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나는 곧바로 쑥스러움 가득한 미소를 띤 채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대공자님은 물론이고 부모님도 모르실 거예요. 나올 때 항상 광장 구경하고 오겠다는 핑계를 대서…….”
“흠, 그렇다기엔 동행인이 레이디의 일과나 목적지를 보고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특히나 두 사람의 고용인인 에버딘 대공자님이라면 더더욱…….”
유스틴이라면 당장 내 뒤에 사람을 붙이고도 남았을 거란 이야기지.
‘확실히 지크프리트 씨가 없었다면 그랬을 수도……?’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었다.
“아무래도 요즘 대공자님께서 워낙 바쁘셔서요. 저와 편지를 주고받지 않은 지도 꽤 되었는걸요.”
“하긴, 최근에 에버딘가에서 사업을 크게 벌인다는 소문이 돌았지요.”
“저도 자세한 건 알지 못하지만요, 제 편지에 답장조차 없으신 걸 보면 아주 많이 바쁘신 것 같아요…….”
짐짓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마담 아페르타의 입가에 다정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도 레이디를 생각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을 테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에헤헤, 그런가요?”
애초에 사라질 마음이 없을 텐데.
나는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가, 이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부끄러움을 한껏 표출해 냈다.
그럼 이번엔 내가 낚싯대를 드리울 차례인가.
“그래도 아버지께서 저한테만 살짝 말해 주셨는데, 조만간 대공자님께서 바쁜 일을 얼추 끝내실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아, 그렇습니까?”
“네에, 헤헤. 돌아오시면 멀리 여행 가자고 말해 볼까 생각 중이에요. 대공자님께서 받아들여 주실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 이것도 비밀이에요, 마담!”
수줍게 미소 짓다 말고 깜짝 놀란 척 눈을 동그랗게 뜨며 덧붙이자, 마담이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해맑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핏빛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때, 조금 초조해지지 않아?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텐데?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너무 늦게 돌아가면 아버지께서 의심하실 거예요.”
뒤이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쐐기를 박았다.
“대공자님이 일을 모두 끝내시면 앞으로는 이렇게 몰래 찾아올 수도 없게 되겠어요. 일탈하는 것 같아서 두근거리고 재밌었는데…….”
동시에 마담 아페르타의 두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고 아름답게 휘어졌다.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말씀하시네요. 꼭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언제든 놀러 오셔도 좋아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뻐요.”
“다음에 놀러 오실 땐 레이디가 좋아할 만한 것을 더 준비해 놓을게요. 그때는 후원 대신 각자 취미 생활에 관해 이야기 나눠요.”
이어 그녀가 아이를 어르듯 나긋나긋한 어조로 덧붙여 말했다.
혹여나 내가 이 이상 저를 찾아오지 않을까 안달하는 모양새였다.
‘각자의 취미 생활이라니.’
꽤 노골적으로 드러내는데.
“그럼 며칠 뒤에 또 놀러 올게요, 마담!”
그렇다면 나도 친절하게 다음 방문 일자를 드러내 줘야겠지.
“그럼 우선 오늘은…….”
곧이어 마담 아페르타가 나를 배웅해 주기 위해 응접실의 문을 연 순간이었다.
“주인님, 잠시…….”
마담 아페르타의 집사가 우리 앞으로 다가오더니, 허리를 굽혀 그녀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마담이 미안한 듯 눈썹을 누그러뜨리며 내게 말을 건넸다.
“이런, 급하게 일이 생겨 직접 배웅해 드리지 못하게 되었네요. 괜찮으실까요?”
“앗, 그럼요. 당연하죠.”
“잭, 레이디를 배웅해 드리렴.”
이어 그녀가 응접실 바깥에 서 있던 남자에게 명령하고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는 그녀를 따라 예를 갖춰 인사한 후, 마담 아페르타가 먼저 자리를 뜨고 나서야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지크프리트 씨도, 클레어도 모두 별일 없어 보이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도 같아 보이고.
“……가시지요.”
지크프리트 씨와 무언의 눈빛을 나누던 중, 머리 위로 낮고 음울한 목소리가 뚝 굴러떨어졌다.
나는 시선을 돌려 잭이라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음울하기 그지없는 얼굴에서는 그 어떤 미소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뚝뚝함을 넘어, 보고 있으면 덩달아 우울함에 갇힐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이 사람은…….’
나는 그의 안내를 따라 발을 옮기는 동시에, 슬쩍 눈동자를 굴려 클레어 에카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금 전과는 달리 연신 안절부절못하는 태도로 남자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지만 말할 수 없는 사람처럼.
“잭이라는 사람 말이에요.”
이윽고 저택을 완전히 빠져나온 후.
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 말문을 열었다.
“전생에서 레이디와 함께 갇혀 있던 사람, 맞죠?”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나중에 떠올려 보니까 꿈에서 보았던 아이랑 상당히 닮았더라고.
흉터도 그렇고 인상도 그렇고, 사람이 너무 달라져서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지만.
“……네, 맞아요.”
내 말에 클레어가 살짝 입술을 깨물고서 시인했다. 그러자 지크프리트 씨가 미간을 좁히며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아까 밖에서 계속 그 녀석한테 자꾸 말을 걸었던 거구나. 그 여자한테 세뇌당한 건지 확인하려고?”
“네에…….”
클레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도 지크프리트 씨가 조금 무섭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가 더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레이디의 반응을 보니 결과는 안 들어도 알겠네요. 세뇌를 풀 방법이 있으면 좋을 텐데요.”
“그런 마법적 세뇌는 본인이 의지가 있는 이상 오래 유지되지 못해요. 그런데도 계속 세뇌가 유지되고 있다는 건…….”
그녀가 말을 흐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는 그 뒤에 이어질 말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본인 스스로 세뇌를 풀 의지가 없다는 것.
“잭……, 아니, 사무엘은 저희 중에 가장 활기찼던 아이였어요. 웃음도 많고, 그 상황 속에서도 가장 희망찼고…….”
“…….”
“처음에는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클레어가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그러쥐고서 천천히 말을 건넸다.
“그러니 자유롭게 해 줘야죠. 사무엘도, 저기에 갇혀 있을지도 모르는 아이들도요.”
“…….”
“그러기 위해 온 거잖아요.”
맞잡은 손등 위로 굵은 물방울이 톡톡 떨어져 내렸다.
이어 흘러나온 목소리는 그와는 달리 더없이 강인했다.
“꼭, 그렇게 해요.”
* * *
며칠 뒤, 오후.
마담 아페르타의 저택 앞.
“네 말대로라면 오늘이란 건데.”
지크프리트 씨가 허리춤에 찬 검집을 매만지다 말고 넌지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이 계획도 그렇고, 그걸 위해 네가 준비한 것들도 그렇고.
그가 푸른 눈동자를 내게 고정하며 투덜대듯 말을 꺼냈다.
“이 아가씨야 이번 일의 당사자라고 쳐도, 너는 아니잖아. 기껏해야…….”
클레어 에카르트의 꿈을 엿본 게 다일 텐데.
나는 끝맺어지지 못한 그의 말을 추측하고서 생긋 미소 지었다.
그사이 지크프리트 씨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다른 건 다 네 가문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넘어갔는데, 이번 건 아예 상관없는 일이잖아. 왜 굳이 나서는 거야?”
클레어가 옆에 있다는 사실은 가뿐히 무시한 듯한 발언이군.
나는 여전히 입가에 띤 미소를 떼지 않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지크프리트 씨는 사람을 구할 때 이유를 따지는 편인가요?”
“…….”
“그냥, 그런 거예요.”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는 알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남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 주지 않을 테니까.
공감하고 위로해 주되, 실제로 행동에 나서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으니까.’
지난 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나를 살리기 위해 발 벗고 나서 준 사람들을 기억한다.
내게 희망을 주기 위해, 내가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노력해 왔던 이들의 피와 땀을 기억한다.
나는 내내 그 속에서 자라 왔고, 그 따스함 곁에서 눈을 감았으니.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겠어요.”
활짝 웃으며 대답하니, 클레어가 녹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런, 내 매력이 또 누군가를 수렁으로 이끌고 만 모양이군.
“……일이 잘못되면 어쩌려고.”
잠깐 착각에 빠진 사이, 지크프리트 씨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한 발짝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럴 일은 없어요. 이것저것 준비해 둔 것도 많고, 경우의 수도 다 따져봤고.”
혹시 몰라서 지원군까지 요청했으니, 이쯤 되면 안 건드는 게 더 화날 정도인걸.
“이제 그만 들어가요. 마담께서 기다리시겠다.”
지금쯤 애간장이 타들어 갈 텐데.
슬쩍 웃으며 말하자, 지크프리트 씨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서 나를 따라 발을 옮겼다.
당연하게도 아페르타 저택의 집사는 살뜰하게 우리를 반겼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레이디께서는 응접실 안으로 드시지요.”
“그럼 조금 이따 봐요.”
그렇게 마지막으로 두 사람을 향해 손 인사를 해 준 후, 나는 집사가 이끄는 대로 응접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직후, 모든 시야가 암전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