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77)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나 지금 연기한테 먹힌 건가?
‘어떻게?’
어르신의 방어막이 일을 안 한 거야? 아니면 뚫린 건가?
펜던트를 열어서 뭔가를 발동시킨 것 같던데, 그 펜던트 안에 담긴 힘이 어르신의 방어막을 상회한다고?
그게 가능해?
“큰일 났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래도 이왕 벌어진 김에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해야지.
나는 빠르게 생각을 집어넣고서 앞에 펼쳐진 정보 값을 머리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연기에 먹힌 것치고는 별로 위험해 보이지는 않은데. 어두운 것 빼고는 나를 해치려는 기색도 느껴지지 않고.
환상 결계인가? 아니면 공간 이동?
‘그건 아닐 거야.’
그게 가능했으면 처음부터 나만 데리고 공간을 이동해 버리면 그만이었을 테니까.
드래곤의 방어 마법을 무시할 정도로 위력이 있으면서도, 이렇게까지 잠잠한 이유는…….
“오랜만이구나.”
그 순간, 청아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가 웅혼하게 공간 안에 울려 퍼졌다. 노래하듯 낭랑한 여자의 미성이었다.
“우둔한 나의 동족아.”
뒤이어 내 앞에 찬란한 빛이 터져 나온다 싶더니, 곧 전신이 새하얀 여자가 나풀나풀 내려섰다.
굳게 감긴 두 눈 위로 드리워진 속눈썹은 인간의 것이 아닌 듯 한없이 길고 아름다웠다.
우둔한 나의 동족아, 라니.
“네 눈 가려져 보고자 하는 것 보지 못하니.”
눈이 가려진 건 당신 같은데요.
아무리 봐도 나는 당신의 동족이 아닌 것 같은데요…….
헛기침이라도 내뱉어 내 존재를 일깨워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종언 도래할 제야 비로소 긴 형벌이 끝……, 어?”
길게 내리깔았던 속눈썹을 들어 올린 여자가 말을 내뱉다 말고 두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나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슬쩍 미소 지었다.
“아, 그. 저는 괜찮으니까 하던 거 마저 하세요…….”
보니까 뭔가 큰 떡밥 던지시는 것 같은데.
‘그래도 이왕이면 나를 이 공간에서 좀 벗어나게 해 준 다음에 예언이든 뭐든 해 주면 안 될까.’
밖에서 걱정하고 있을 사람들이 있어서.
“어머…….”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입술을 꾹 다물고 있으려니, 곧이어 여자가 허리를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고서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급기야는 내 목덜미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뭔데, 뭐야?
나한테서 무슨 냄새 나나?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친히 나와 봤더니.”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제야 눈처럼 새하얀 여자가 내 목덜미에서 얼굴을 떼고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 그 녀석의 계약자구나.”
“앗, 네엡.”
뭐가 뭔지 아직 제대로 파악은 못 했지만, 아마도 제가 어르신의 계약자는 맞을 겁니다.
“게다가 용케도 살아 있고.”
“아, 네에…….”
요즘 따라 너 나 할 것 없이 자꾸 아픈 데를 건드리시네.
동족이라고 했으니 아마 이분도 드래곤일 텐데.
‘드래곤은 내 몸 상태를 다 알 수 있는 건가?’
그럼 이 어르신도 나를 살릴 수 있나? 그런 건가?
“아쉽게 되었구나. 오랜만에 동족의 향기가 나 얼마 남지 않은 사념을 친히 드러냈는데.”
앗, 사념이면 안 되겠군.
혹시나 하는 희망을 깔끔하게 접어 버린 사이, 그녀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네 존재는 꽤 재밌구나.”
나는 내장된 사회성을 발휘하여 영혼 없이 맞장구쳤다.
“헤헤, 재밌으시다니 영광이네요.”
예예, 제가 높으신 분들한테는 재밌는 장난감? 뭐 그런 느낌이기는 해요.
“흐음, 그래. ■■■■는 그 형벌을 받았으니…….”
그녀가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잠자코 입 다물고 있기로 했다.
형벌이니 뭐니, 어차피 물어봐도 안 말해 주겠지. 이럴 땐 그냥 혼자서 생각의 나래를 펼치라고 놔두는 게 상책이다.
“아이야.”
그렇게 무념무상으로 그녀가 상념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리길 몇 분.
그녀가 몽환적으로 나풀거리는 흰 옷자락을 거두며 내게 말을 걸었다.
“이 사념은 본디 내 계약자를 위협하는 삿된 것을 제거하기 위한 찌꺼기란다.”
“앗, 그러시군요.”
“하나 너는 내가 제거할 수 있는 종류도 아닌 데다, 내 동족의 비호를 받는 그의 계약자고.”
“……?”
“무엇보다 이 나를 불러낸 이도 내 계약자 아니니.”
곧이어 나를 응시하는 금빛 눈동자가 사르르 휘어졌다. 사람을 홀릴 정도로 매혹적인 눈웃음이었다.
“작은 변덕을 부려 볼까.”
그러고서 그녀는 수려한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짧았지만 즐거움 주어 고맙구나.”
“아, 예……. 별말씀을요.”
전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었을 뿐인데요.
“내 네게 행운을 빌어 주마.”
이윽고 여자가 손톱 끝으로 내 이마를 슬쩍 내리눌렀다.
“네 길을 잃지 않도록.”
그 말을 끝으로, 어두웠던 공간이 유리가 깨지듯 하나씩 조각 나 부서지기 시작했다.
이내 내 시야를 가득 채운 건 조금 전과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펜던트를 꺼낸 마담, 내 앞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
“미에나!”
경악한 지크프리트 씨는 나한테 달려들고 있었고,
“레이디!”
잭을 끌어안은 클레어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늦게 내게 방어 마법을 둘러 주려 하였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
금방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듯한 검은 연기가 내가 아닌 마담 아페르타를 향했다는 점이었다.
오우, 이번엔 진짜로 내 탓 아님.
“커, 흑.”
자신이 당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지, 늘 평온하던 마담 아페르타의 핏빛 눈동자에 의아함이 스쳤다.
나는 순식간에 중심을 잃고 피를 토하는 마담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멍하니 현실감각을 되찾았다.
그러니까 원래는 저걸 내가 당할 뻔했다는 소리네.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그사이 내 쪽으로 다가온 지크프리트 씨가 내 겨드랑이를 덜렁 안아 들어 몸을 살폈다.
나는 집게에 널린 빨래처럼 그의 손길에 몸을 맡기며 대답했다.
“다친 곳 없어요. 저한테는 무적 방어막이 있으니 괜찮다고 오십 번쯤 말했잖아요.”
이번 경우엔 방어막이 작동을 안 하는 불상사가 일어날 뻔했지만, 어쨌든 좋게 좋게 끝났으니까.
“그보다, 지금 검에 묻은 거 피예요? 내가 사람은 최대한 죽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내 말에 러셀 경이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뱉더니, 나를 팔 위에 앉히고서 검에 묻은 피를 털기 시작했다.
“안 죽였어, 이거 다 가짜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러셀 경이야말로 다친 곳 없어요?”
“조무래기 상대하는데 생채기 생기면 그날로 검 부러뜨려야지. 애초에 왜 다들 날 뒷방 늙은이 취급하는 건데? 나 아직 현역이야.”
그러고서 그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바닥에 쓰러진 마담을 살벌하게 응시했다.
“나를 어지간히도 물로 보았더군. 고작 그 정도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러셀 경이, 쿨럭, 예상을 벗어날 정도로……, 괴물이었던 거겠지요.”
마담이 검은 피를 울컥울컥 토해 내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눈에 힘이 풀린 걸 보니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
“눈빛 봐라. 설마 저런 사람까지 살리자고 하는 건 아니지?”
말없이 마담 아페르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지크프리트 씨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 잭과 클레어를 차례로 바라보며 답했다.
“……그런 생각 안 했어요.”
이 여자는 타인의 생명을 스스럼없이 빼앗고, 그 죄악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려 했던 사람이다.
나는 그런 사람까지 모두 포용할 정도로 군자가 아니었다.
‘내 손을 더럽힐 생각은 없지만.’
괜히 연민하지도, 살아서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그녀가 바라는 건 생존일 테니까.
“어, 떻게, 알았나, 했더니…….”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붉은 눈동자가 희미하게 깜빡이며 클레어와 잭을 응시했다.
그 눈빛 속에는 여전히 포기하지 못한 옅은 갈망이 담겨 있었다.
“그건, 실험, 의 부작용인가.”
“…….”
“이런 쪽, 으로 연구를, 했어도……. 쿨럭, 괜찮, 았겠지. 그랬다면, 나도, 그도…….”
그러고서 그녀는 어쩐지 회한에 젖은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조, 심해야 할, 거예요.”
언제 그랬냐는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당신의, 능력이, 쿨럭! 얼마나……, 출중하든. 그 뒤에, 누가 있든. 당신은, 나를, 건드린……, 순, 간부터.”
“아까도 말했던 것 같은데요.”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난 나보다 덜떨어진 사람의 협박 따위는 듣지 않는다고.”
“하하, 하……!”
웃는 건지 숨을 토해 내는 건지 알 수 없는 피 끓는 소리가 복도에 가득 울려 퍼졌다.
“덜떨어졌다, 덜, 떨어졌다…….”
마담 아페르타는 그 후로도 눈을 희번덕 뜨며 내 말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그, 말이, 맞군요. 눈앞의, 유혹, 에, 넘어가……. 이런, 실책을…….”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지 마라.”
곧이어 지크프리트 씨가 한 손으로 내 눈앞을 막으며 나지막이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여러 명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대신 내 귓속을 채웠다.
“레이디 시두스를 찾아!”
나는 그제야 마담에게 향해 있던 고개를 돌려 퍽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여기예요, 대공자님!”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헤헤, 이렇게 직접 얼굴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네요.”
“미에나……!”
갑자기 뜻 모를 편지를 보내와서 꽤 놀랐을 텐데.
나는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는 땀을 바라보며 볼을 긁적였다.
유스틴은 몇 분이나 내 상태를 살피듯 빤히 바라보고 나서야, 주위를 둘러보고서 서늘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설명을 들어야겠군요.”
나는 지크프리트 씨의 목을 슬며시 끌어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나 이제 좀 무서운 것 같아.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