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87)
“그냥 늦잠을 주무시는 건 아닐까요……?”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열지 않는 정적 속, 티나가 용기 있게 입을 열었다.
나는 여관 1층에서 빌려 온 냄비 뚜껑과 국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난리 통 속에서도 안 깨어나는 사람이 있진 않을 것 같아.”
하물며 지크프리트 씨는 내 발소리만 들려도 벌떡 일어나서 다가오던 사람인데.
“이거 참…….”
아버지가 깊게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냄비를 칠 때 같이 고함을 지르시더라니, 그새 목이 쉰 모양이었다.
이렇게 시끄럽게 굴었는데도 뒤척임 한 번 없는 걸 보면 역시…….
“어제 들었던 그 증상과 같군요.”
이윽고 유스틴이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미간은 여느 때보다도 깊게 주름진 상태였다.
“어쩌면 정말로 전염병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건 아닐 거예요.”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다 같이 꿈에서 만나고 있었겠죠. 더군다나 어제 마을 사람들과 가장 가까이 접촉했던 건 대공자님이시잖아요.”
“…….”
“그렇다고 저희가 그곳에서 음식이나 물을 마신 것도 아니고요.”
하물며 지크프리트 씨는 처음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대화하는 내내 뒤에 서 있었는걸.
‘한 명 빼고 모두가 다 슈퍼 항체를 가지고 있을 리도 없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사한데, 지크프리트 씨만 혼자 이렇게 된 건…….
“정말로 신벌인가.”
“당신도 참, 무슨 그런 불길한 소리를 하고 그래요?”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머니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사납게 핀잔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억울하다는 듯이 눈썹을 누그러뜨리며 어물어물 변명을 내뱉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잖나. 따지고 보면 어제 지크가 마을 사람을 건든 것도 사실이고…….”
“아이한테 검을 겨눈 건 잠깐이었잖아요. 그것도 반사적인 행동이었고요.”
“뭐가 됐든 아이한테 검을 겨눈 건 잘못된 행동이 맞지 않소.”
“러셀 경이 아이인 걸 알고 검을 겨눴겠어요?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다간 지킬 사람도 못 지키게 된다고요.”
“진정하세요,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그냥 가능성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뿐이니까요.”
게다가 솔직히 아빠 말이 아예 틀리지도 않고.
내 말에 두 분이 설전을 멈추고서 동시에 푹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 봐, 완전히 초상났네.
아직은 때가 아닌데도.
“……어쩔 수 없죠.”
이번에는 편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난 결국 어딜 가든 일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봐.
나는 들고 있던 물건을 모두 티나에게 넘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제가 러셀 경의 꿈에 들어가 볼게요. 러셀 경이 꿈을 꾸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항상 나보다 늦게 자는 사람이라 문이 생기는 걸 보지 못하는 데다, 요즘엔 루스의 꿈에 머물다가 곧장 꿈에서 깨는 바람에.
“어쩌면 당신의 능력이 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어 유스틴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딱딱히 굳은 얼굴로 끼어들었다.
“저도 알아요. 그래도 일단 시도는 해 봐야죠.”
내 능력이 통할지 안 통할지, 그리고 만약 꿈속에 들어가도 그를 깨울 수 있을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어쨌든 가능성은 있잖아요.”
원인을 모른다는 이유로 손을 놓고 하염없이 깨어나길 기다리는 것보다야,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게 백번 나았다.
“그럼 전 먼저 침실로 올라가 볼게요. 세 분은 러셀 경한테 무슨 변화가 생기지 않는지 확인해 주시고……. 음, 티나는 오늘 먹을 약에 수면제까지 함께 챙겨서 가져다줘.”
그냥 자기에는 방금 깨서 잠이 잘 안 올 것 같단 말이지.
슬쩍 기지개를 켜며 말하자, 모두의 걱정 어린 시선이 내게 박혔다.
나는 말없이 그들을 차례로 바라보다가, 이내 내게 시선 한 점 주지 않은 채 잠자코 누워 있는 남자를 일별하고서 씩 미소 지었다.
“다녀올게요.”
그러자 부모님은 이번에도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가.
“……다녀오렴.”
늘 그렇듯 다정하고 온화한 미소를 띠고서 나를 배웅했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잠자는 숲속……에 살던, 공주……가 아닌 사냥꾼을 깨우러 가 보실까.
* * *
불행 중 다행스럽게도, 지크프리트 씨의 꿈 문은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부모님께 다 털어놔서 다행이야.]끝없이 펼쳐진 검은 공간 속, 나는 유난히 빛나는 문 앞에 서서 작게 중얼거렸다.
내 능력을 밝히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갑자기 쓰러진 척을 하거나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억지로 잠들었었겠지.
‘그 과정에서 걱정이라는 걱정은 모두 샀을 테고.’
지크프리트를 깨워도 즐거운 여행을 이어 나가긴커녕, 당장 리처드 8세를 불러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을 터였다.
[다 당신 덕분이에요, 러셀 경.]아니었으면 죽기 직전까지 이 비밀을 끌고 갔을 텐데.
나는 언제나처럼 ‘페터’라는 이름이 적힌 명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으로 지크프리트 씨의 꿈에 들어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나한테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크프리트 씨도 내가 자기 꿈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하는 눈치였고.
[그래도 이번만큼은 용서해 주세요.]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게다가 나는 나름대로 당신한테 책임감도 지니고 있다고.
자유롭게 살라고 했던 빅토리아 씨의 유언을 저버리고 내 곁에 남아 있도록 만들었으니까.
[그러면 진짜 실례하겠습니다.]마지막으로 닿지 않을 인사를 건넨 후,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돌려 당겼다.
뒤이어 눈앞에 자못 익숙한 듯싶으면서도 퍽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이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붉은 저녁놀 사이로, 줄지은 구름이 유유하게 하늘을 갈랐다.
그 아래 드러난 건 타오르는 생명이 깃든 것처럼 활기찬 거리였다.
누군가가 열띤 목소리로 호객하는 소리, 관심사에 관해 이야기하며 거리를 거니는 신사들, 빠른 걸음으로 사이를 지나치며 발을 동동 구르는 하녀.
알록달록한 상점의 천막과 먹음직스러운 사과의 색채, 왁자한 사람들의 목소리.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차이는 조금 있었지만, 분명 이곳은 황도 람파스의 주요 시가지였다.
‘지크프리트 씨의 기억.’
이 정도로 생생하게 재현될 정도라면, 분명 그 역시 이 근처에 있을 텐데.
생각을 마친 즉시, 나는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지크프리트 씨를 찾기 시작했다.
사실 지크프리트 씨 찾기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아무튼 우뚝 솟아오른 빨간 머리만 찾으면 되는 일이니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사람이 너무 많아!’
지크프리트 씨와 나만 남도록 꿈을 변형해 볼까 했는데, 이상하게 능력이 통하는 것 같지도 않고.
보통은 내가 의지를 지니는 순간 꿈이 바뀌기 마련인데.
[실례, 실례합니다……!]별로 죄송하진 않지만 어쨌든 제가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요!
제법 가련하게 말을 내뱉어 보아도, 주변 사람들은 저마다 할 일을 할 뿐이었다.
‘꿈 주인의 기억을 재연하는 거라서 날 못 인식하는 거야.’
그렇다면 결국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러, 으악……!]아이고, 넘어진다!
결국 인파를 이기지 못하고 발을 헛디딘 순간이었다.
[이런, 조심해야지.]순간 허리에 부드럽고 강인한 손길이 닿는다 싶더니, 누군가가 나를 한쪽 팔로 번쩍 들어 올렸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지크프리트 씨였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10년은 더 젊어 보인다는 것 정도일까.
[대체 어느 집 자제길래 이런 얇은 잠옷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녀?]특유의 붉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어 내린 젊은 미남자가 호쾌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빅토리아 씨의 꿈에서 보았던 것보다 좀 더 어려 보이는 모습이었다.
황궁 근위대 제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그때보다 아예 옛날은 아닌 것 같은데.
[저 모르시겠어요? 기억 안 나요?]일단은 지크프리트 씨의 상태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그의 팔에 안긴 채로 묻자, 지크프리트 씨가 나를 내려놓으려다 말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대롱대롱 들려 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에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
[……너한텐 아쉬운 얘기겠지만, 난 그 정도로 방탕하게 살지 않아서.]그가 나를 사람 없는 곳에 내려 주고선 자못 친절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그의 말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몇 초 눈을 깜빡였다가, 비로소 의미를 깨닫고 입을 떡 벌렸다.
대체 뭔 생각을 한 거야, 이 양반!
‘애초에 우린 닮지도 않았잖아!’
게다가 내가 뭐가 아쉬워! 나는 우리 부모님이 제일 좋거든?
[날 보고도 안 우는 아이는 처음이라 신기하긴 한데, 나는 애 돌보기에는 영 소질이 없어서. 알아서 집에 들어가라, 응?]이어 그는 내 머리를 톡톡 두어 번 토닥이고서 빠르게 자리를 떴다.
보폭이 어찌나 큰지, 그 짧은 사이에도 지크프리트 씨는 벌써 저만큼 사라진 상태였다.
[하여간 저 성격하고는.]맨날 자기 할 말만 한다니까.
나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서 그가 향한 곳으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월등히 커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또 놓칠 뻔.
[저기, 러셀 경…….]이윽고 골목 어귀에 선 지크프리트 씨를 발견하고서 다시 다가가려던 순간이었다.
[엇.]나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벽 뒤에 재빨리 몸을 감췄다.
저 뒷모습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