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Salvation? RAW novel - Chapter (88)
‘빅토리아.’
빅토리아를 마주한 건 고작 두 번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모든 것이 내 가슴속 깊이 남아 있는 바람에.
나는 이번에는 고개만 빼꼼 내밀어 골목 안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누구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건지, 빅토리아 씨는 주위를 연신 둘러보며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뒤로 지크프리트 씨가 저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손수건을 들고 따라가는 중이고.
‘잠깐만, 이거 설마 두 사람의 첫 만남인가?’
이런 프라이빗한 사생활을 이렇게 냅다 공개해도 되는 겁니까?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눈을 가릴 수도, 자리를 뜰 수도 없는데?
‘깨고 나면 조금 어색해질지도 모르겠는데.’
혹여나 지크프리트 씨의 예민한 감각에 걸릴까, 제자리에 꼼짝도 못 하고 서 있던 찰나.
[저, 레이디.]곧 지크프리트 씨의 손이 빅토리아의 어깨에 닿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내가 말했지, 날 건드려 봤자 얻어 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빅토리아 씨가 지크프리트 씨의 손을 쳐 낸다 싶더니, 이내 반대쪽 팔로 그의 턱주가리를 퍽 쳐올렸다.
이 모든 게 눈 깜빡할 새 이루어진 일이었다.
와우, 첫 만남 한번 화끈한데.
[아, 아니…….]저조차도 예상치 못한 건지, 아니면 차마 반격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건지.
지크프리트 씨가 평소와는 달리 넋 나간 목소리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는 그냥……, 떨어진 손수건 주워 드리려고…….] [아.]빅토리아 씨 역시 그제야 지크프리트 씨의 복장을 확인했는지, 놀라 얼음이 된 표정으로 엉거주춤 팔을 내렸다.
이윽고 극한의 어색함이 한차례 그들 사이를 휩쓸고 난 후.
[하……, 하하!]내내 벙한 얼굴로 서 있던 지크프리트 씨가 불현듯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나 이거 알아.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 예상치 못하게 한 대 맞고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잖아.
이제 곧 ‘날 때린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라는 대사를 날리며 로맨스 코미디 드라마가 시작되는 거지.
[엥?]하지만 여기서 더 이어질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주변의 풍경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나는 순간 방향감각을 잃고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이다가, 몇 초가 지나서야 제대로 주위를 살폈다.
이번 역시 내게는 퍽 낯선 공간이었다.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을 반사하는 분수의 물 알갱이, 희미하게 드러난 작은 무지개.
그리고 그런 내 시야를 막아서는 커다란 덩치의…….
[너, 저번에 걔 맞지?] [악, 깜짝아!]이벤트 맵 확인하고 있는데 그렇게 갑자기 끼어들면 어떡합니까!
화들짝 놀라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는 동안, 지크프리트 씨가 계속해서 내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도 잠옷 차림에, 딱히 호위도 없는 것 같고. 그런 주제에 황도 북쪽에 있던 애가 이런 남쪽까지 오다니. 날 쫓아다니는 것도 아닐 테고…….]왜 아니야, 맞아!
정확히는 당신이 있는 곳에 내가 소환되는 형태에 가깝지만.
나는 작게 심호흡하고서 곧바로 말을 꺼냈다.
[자세히 봐 보세요, 러셀 경. 저 진짜 모르시겠어요? 알 텐데? 알아야 하는데?] [내 성은 또 어떻게 알고, 아니, 그보다 그런 수작은 나한테 안 통한다니까?] [수작이 아니에요! 여기는 당신 꿈속이고, 나는 당신을 깨우러 온 거고, 우리는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볼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고!] [그래, 알았으니까 나한테 이러지 말고 커서 훌륭한 작가 해라.] [아니이!]아무래도 이 사람, 꿈에 완벽히 잠식된 모양인데.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발언의 신빙성을 얻기에는 이 사람의 과거를 아예 모르고.
‘그렇다고 빅토리아 씨의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괜히 긁어 부스럼만 될 것 같단 말이지.’
제 사람에 관해서는 어린아이건 노인이건 일단 들이박고 보는 사람이니까.
가뜩이나 이곳은 내 능력이 통하지 않는데, 괜히 나를 첩자 취급하며 해치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아저씨는 너랑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빨리 집에 안 돌아가면 혼낸다. 조금 이따 와서 확인해 볼 거야.]그사이 지크프리트 씨가 일부러 표정을 굳히고서 내게 엄포를 놓은 뒤, 빙글 뒤 돌아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 끝에는 늘 그렇듯 빅토리아 씨가 있었다.
[미안해, 비키. 많이 기다렸어?]곧이어 빅토리아 씨 앞에 선 지크프리트 씨가 활짝 미소 지었다.
내 앞에서는 한 번도 보였던 적 없는, 그야말로 빛이 나는 웃음이었다.
나는 홀린 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사람 특유의 서툴고 조심스러운 몸짓, 애틋한 목소리.
그 큰 덩치로 저보다 한참 작은 사람 앞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어쩌면 꿈에서 깨지 않는 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닐까.’
그 사람의 가장 행복한 시절을, 추억을, 혹은 꿈 주인이 가장 바라는 것을 쥐여 줘서 영원히 붙들어 놓는 종류의 저주.
만약 내 추측이 사실이라면, 정말 지독하고 잔인한 저주이지 않은가.
‘이래서야 내가 꼭 악역처럼 느껴지잖아.’
이런 건 딱 질색인데.
괜히 피어오르는 죄책감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사이, 또 한 번 시야가 뒤바뀌었다.
술인지 토사물인지, 그도 아니면 피인지 모를 어두컴컴한 웅덩이와 이리저리 널브러진 사람들.
슬쩍 시선을 돌리니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오는 건물 안에서 왁자한 고함이 들려오고 있었다.
‘딱 보니 질이 안 좋은 거리인 것 같은데.’
지크프리트 씨가 여기에 올 일이 있나? 겉보기에는 이런 곳과는 영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였는데.
[실례합니다.]어쨌든 이곳에 지크프리트 씨가 있다는 말이지.
생각을 마친 즉시 나는 건물 안으로 거침없이 발을 들였다.
뭐 하는 곳인가 했더니만, 도박장이잖아.
나야 이곳 사람들이 나를 인식하지 못하니까 이렇게 당당히 들어가는 거지, 착한 어린이들은 이런 곳엔 발도 들이면 안 됩니다.
[에구, 털리시겠네.]이 사람도 꾼한테 걸렸나 보군.
지크프리트 씨를 찾을 겸 내부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패를 구경하는 사이.
[으아악!]쿠당탕, 책상이 뒤집히는 소리와 함께 한쪽에서 큰 소란이 일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소란의 주인공은 단연 지크프리트 씨였다.
그리고 그 큼지막한 손에 멱살을 붙잡힌 이는…….
[내게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구먼, 자네.]흐트러진 금발을 한 손으로 대충 쓸어 넘긴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머리카락 색과 발언을 보아하건대 빅토리아 씨의 아버지인 모양이었다.
장인어른의 멱살을 잡다니, 이것도 흔치 않은 광경인걸.
[잘 보여? 내가? 누구한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지크프리트 씨가 다른 쪽 손을 치켜들어 그대로 주먹질하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이 금수만도 못한 자식! 도박 빚에 제 딸을 팔아넘겨?] [그게 싫었으면 자네가 빅토리아를 사 가면 되는 일 아니었나? 그건 한사코 거절하더니, 이제 와서 행패를 부리다니.] [그럼 당연하지! 내가 사람을 돈으로 사고파는 새끼랑 똑같은 짓을 할 것 같아?] [그래서 안 된다는 걸세, 자네는.]곧이어 남자가 입에 고인 핏물을 퉤 내뱉으며 비열하게 말을 이었다.
[이미 계약서도 주고받은 마당에,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나? 아니, 혹시 모르지. 계약금의 두 배를 내게 가져오면 손수 파기해 줄지도.]나는 난생처음 보는 쓰레기 직관에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저, 저런 미친놈을 다 봤나.
내가 웬만해서는 폭력을 쓰지 않으려는 사람인데, 저건 조금…….
‘그런데 왜 이 장면을 보여 주는 거지?’
이번 기억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내 추측이 틀린 걸까?
그도 아니라면…….
[이런 미친!]결국 참다못한 지크프리트 씨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시 한번 손을 치켜든 순간이었다.
[그만, 지크.]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우아한 목소리가 지크프리트 씨의 행동을 멈춰 세웠다.
나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는 빅토리아 씨를 바라보았다.
[이런 곳에서 괜히 소란을 피웠다가는 징계받을지도 모른다고.] [비키…….] [그러니 이런 더러운 것에 손대지 말랬지.]이내 지크프리트 씨 앞에 멈춰 선 빅토리아 씨가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풀고서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그녀의 시선 끝은 제 아비에게로 향한 채였다.
[천박하게.] […….] [당신, 잘 들어. 결혼이든 목숨이든, 내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고.]제 아비와 전혀 닮지 않은, 아름다운 금빛 눈동자가 고요한 분노를 담아 일렁였다.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게 더없이 고고하고 아름다운 자태로.
[나는 이 남자에게 내 모든 걸 걸었어.]그녀가 더없이 당당하게 선언했다.
음, 좋아.
배경이 도박장인 것만 제외하면, 완벽하게 행복한 순간이 맞네.
‘나 같아도 다시 반했다.’
빅토리아 씨가 ‘따라 죽으면 죽여 버릴 거야’라고 말한 것도 급발진이 아니라 본인의 원래 성격이었구나.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의 풍경을 다시 한번 눈에 담은 찰나였다.
[……!]황홀한 듯 제 연인을 바라보던 지크프리트 씨의 시선이 돌연 내게 향하고서 그대로 일그러졌다.
오